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윤서 Sep 13. 2023

좋은 포기

얼마 전, 포기라는 걸 선언했다. 다만 한 가지 다른 점은 '좋은 포기'였다는 것.


늘 놓지 못하던 습관은 모든 일에 '흑백논리'를 펼치는 것이었다. 좋고 나쁘고를 +100, 혹은 -100으로 설정했다. 좋거나 나쁘거나. 그래서 희망적이거나 불운하거나. 중간 따위는 없는 고집을 부렸다. 스스로를 잘못 바라본 탓이었다. 당연히 그런 사람인 줄 알았다. 


흑백논리를 강하게 주장하는 사람의 흠은 하려는 일에 대해서도 명확히 선을 긋는다는 것이다.

애초에 하기 싫은 건 가장 뒤로 미뤄 끝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끝내고, 좋아하는 것조차 미리 간을 보며 완벽한 상태의 나를 기다린다. 생각해 보면 내 학창 시절은 늘 시험 마지막 날 전 과목을 밤새 끝내버리겠다는 계획을 세우며 눈물을 훔치던 모습이었다. 혹은 좋아하는 것에게 배신당할까 시도조차 않던 무수히 많은 것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마감일을 지키지 못할까 봐 시작도 못하고 있는 메일링, 여전히 똑같은 지점에 머물러있는 강의들, 신청기간 마지막까지 미루는 중인 어떤 일들. (이 글조차 브런치의 따스해 보이는(?) 독촉 알림을 받고 나서다. 습관이란 얼마나 무서운지.)


일주일의 모습도 그렇다. 월요일은 늘 큰 포부로 시작하는 날, 화요일은 깨작깨작 늦장을 부리는 날, 수요일은 그렇게 행동한 내가 미워 얼굴이 붉어지는 날. 일요일엔 다시 다음 주를 향한 완벽한 계획을 세우고, 토요일엔 늘 반도 이루지 못한 노트를 바라보곤 한다. 내 한계를 넘어서는 양의 목표치를 잡아놓고 이마저도 못한다고 매번 타박하는 모습은 일주일 내내 이루어진다. 그러니까, 1년 내내 이렇단 뜻이다. 행복을 쉽게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그래서다. 24시간 전체를 써도 이룰 수 없는 계획을 세웠는데 그를 백 프로 끝내지 못하면 그날은 게을렀던 하루가 된다. 오늘은 부끄러움이 되고, 내일은 혹여 또 이루지 못할까 걱정하는 하루로 변한다. 그렇게 남이 보는 '나'와 내가 보는 '나'의 격차는 점점 넓어진다. 


이 논리의 허점은 미래를 상상하는 것에서 늘 최대치의 어려움을 만난다. 좋아하지만 아직 할 수 없는 일과 딱히 좋아하진 않지만 상황과 능력이 가능한 일 앞에서의 첫 고민은 이거였다.

'뭐가 덜 불행할까.'

좋은 것과 좋은 것 사이라고 해도 좋은데, 굳이 둘 다 불행한 일이라 정의 내리고 시작한다는 점에서 어쩐지 이상하다. 모든 출발이 두렵게만 느껴지더랬다. 좋아도 걱정되고, 싫어도 무섭고. 부정적 언어로 시작해 그 언어로 문을 닫는 하루는 결국 내 시야에서 출발한다. 


미래를 길게 보고 판단하는 건 좋은 습관이다. 가능한 상황을 확인하고, 가장 나은 선택을 하려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불확실한 것도 미래이기에, 알 수도 없는 모습을 미리 이렇다 저렇다 하는 건 오늘의 용기를 쉽게 망쳐놓는다. 어제는 그런 내가 너무 싫어 이 모순을 감히 내보였다. 들키기 싫어 숨기던 것을 몸 밖으로 꺼냈다. 사실은 너무 잘하고 싶어서 시작도 안 한다는 말도 안 되는 나를, 이것저것 발만 담가놓고 회수도 못하는 실속 없는 나를, 내가 가장 부끄러워하는 인간은 다름 아닌 나라는 사실을.


'… 언제부터 인생에 완벽한 행복 같은 게 있었나.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굳게 믿는 심보가 행복을 종교 삼는 행위처럼 느껴진다. 이 또한 부끄럽다.'


토하듯 진심을 게워내고 나니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속 말을 마친 주인공 마냥 속이 편해졌다. 자를 잰 듯 정확한 행복을 포기하니 정확한 불행이랄 것도 없어졌다. 근사치는 있을지언정 그게 정확한 나는 아니었다. 이 몸속에 너무 다양한 내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의 출발이 행복을 포기하는 거라니. 이상해도 좋은 포기는 맞았다.


지금 내 아픈 손가락은 뭘까, 하면 망설임 없이 1년 뒤다. 휴학이 끝나고 다시 본거지로 돌아가야 하는 날. 혹여나 1년이 지나도 현재의 불만족스러운 나로 남지는 않을지, 거기서 또 어떤 어려움을 만나고 또 얼마나 깨져버릴지, 등등. 올해 1월의 선택엔 추후의 후회도 실망도 없으나 그 뒤가 문제였다. 사실은 실패했다고 생각하던 작은 '나'가 튀어나오진 않을까 두렵다.


행복을 포기했다. 그 뒤엔 무얼 벗어던져야 할까. 


이런 생각 안 하는 내가 필요하겠다.


작가의 이전글 받은 마음은 그렇게 회신되어야 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