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의 생활을 캐리어에 하나 둘 정리하고 있다. '정리'라는 말을 쓰기까진 시간이 오래 걸렸다. 새로운 시작을 마음먹었단 뜻이고, 마음먹는다는 건 늘 힘에 부치니까. 이 과정을 건너면서 내가 얼마나 시작을 어려워하는 사람인지 알았다. 기한이 지나도록 일을 처리하지 않는 나의 습성이 제대로 드러난 시기였다. 수강신청도 제때 하지 못해서 학교에 메일을 보내고, 비자 신청도 엄마의 폭풍 잔소리로 겨우 막차에 올랐고, 출국 전 하고 싶은 일도 이제야 생각해보고 있다. 하지만 이 일에 관해서는 마음속으로 늘 응원하는 내가 끼어있다. 누구보다 하기 싫은 일을 하는 중이니까. 조금만 더 치면 부서질 것 같은 마네킹의 모습으로 옷을 입히고 여기저기 자리를 옮기고. 내가 어떤 상황인지를 잘 알다 보니 이해해주지 않으면 결국 깨져버릴 수밖에 없어서 계속 나를 안아주는 마음으로 산다.
그제에는 서윤과 오이도에 다녀왔다. 조개구이를 몇 년 만에 먹어보는지 모른다. 기안 84가 다녀갔다는 비좁은 민박에서 그와 같은 우리의 성공을 기원하고, 시간당 3만 원 하는 노래방에서 서비스를 위해 열심히 애교도 떨어보고, 바다 앞에 쪼그려 앉아 라면을 먹기도 했다. 아, 일몰 때 들어가 있었던 카페는 커피 맛이 아주 좋았다. 우리는 거기서 금붕어 타투스티커를 붙이고 개이쁘냬, 모델이냬 하는 갖은 아양을 떨어댔다. 아, 물론 진실은 그렇지 않다.
마지막이 될 여행인데도 다음날 카페에서 서윤에게 편지를 쓸 때까지 차분함 외에 별다른 감정은 찾지 못했다. 이젠 간다는 사실이 받아들여진 것인가. 아주 이상하고 기분이 좋았다. 하긴 출국까지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자주 가던 술집에 들러 마지막 저녁을 하기로 했다. 우리에겐 입 발린 말이 없어서, 가지 마라, 아쉽다, 하는 얘기도 없었다. 다시 돌아오는 순간이 있고 나에겐 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특히나 그것이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라면, 서윤은 날 응원해 주는 방법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내가 마지막이라 생각해도 그는 마지막으로 생각해주지 않아서 고마웠다. 뽑기로 뽑은 맥주가 바닥이 날 때쯤, 서윤이 입을 열었다.
- 이제 진짜 마지막이네.
그때 알았다. 현실이 아니라 생각할 때도 마음은 덤덤해진다는 걸. 그간 나는 이 사실을 마치 꿈처럼 아주 비현실적인 일로 여기고 있던 것이다. 불안정한 감각으로부터 몸이 도피해 버린 것일지도 모르고, 그냥 게을러서 또 생각을 늦추고 있던 것일지도 모른다. 눈앞의 현실이 선해지면서 나는 꼿꼿이 얼어버렸다. 입으로만 중얼거렸다.
- 그러게......
맥주를 남기고 급하게 일어났다. 나는 생각에 과부하가 올 때 멍을 때리는 습관이 있는데, 서윤의 손을 잡고 걸으면서도 종일 세상이 둘로 보였다. 여유가 동나기 시작했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까만 공포가 겹쳐진 세계 사이에서 더 까만 먹색이 되었다. 현실 자각도 한껏 뒤로 미뤘나 보다. 내 눈치를 보던 그가 "언니는 말보다 얼마나 더 힘들겠어."라고 하자 눈물이 줄줄 쏟아졌다. 서윤에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울었다. 챙 넓은 모자가 오열하는 부끄러움을 가려주어 다행이다. 진탕 울어버리곤 언제 울었냐는 듯 킥킥대다가 빈티지숍도 구경하고, 이솝과 그랑핸드에서 코가 마비될 만큼 향을 맡고 왔다. 사 온 것은 그랑핸드의 캔들. 새로운 보금자리가 될 집에서 사용할 생각이다. 익숙한 향이라는 것이 새 집을 익숙한 곳으로 만들어줄 것이다. 아늑한 사람과 편안해지는 향을 구경하고 나오니 이젠 조금 괜찮다 싶다. 무서워서 울어버릴 시간도 필요했던 것이다.
무서워도 굳이 가야겠던 이유를 차분히 다시 생각해 본다. 무서운 집에서 무서운 상해로, 무서운 중국으로까지 퍼진 실체 없는 두려움은 다시 부딪쳐보지 않고서야 계속 덩치를 키울 것이다. 그럴수록 나는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 조금 겁쟁이에서 더 겁쟁이로, 훗날엔 엄청난 겁쟁이가 되어 중국의 '중'만 꺼내도 벌벌 떠는 내게 될 게 뻔하다.
그걸 조금이나마 헤쳐보려 간다. 멀고 먼 두려움의 세계로. 한동안은 지옥 같을 나날에게로. 다시 돌아와도 좋다. 지금은, 가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