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O의대생의 공황/우울/불안 극복기
국내의 의대, 치의대 등의 특수단과대는 6년제 구조이다. 예과 2년과 본과 4년을 거쳐 교육과정을 마치고, 국가고시를 통과하면 마침내 의사, 치과의사, 한의사 등이 된다. 나는 (의대는 아니고) 앞에 한 글자가 더 붙은 O의대에서 본과 1학년만 4년을 했다. 사유는 다음과 같았다.
- 첫번째 1학년 : 공황장애가 발병했다. 시험지를 백지로 제출하고 F.
- 두번째 1학년 : 1학년을 다시 다니다가 불안함을 못 견디고 휴학
- 세번째 1학년 : 무기력이 심해 침대를 벗어나지 못했다. 한 달 정도 학교를 결석했고, 출석이 중요한 과목에서 F를 받았다.
- 네번째 1학년 : 울면서 공부했고 간신히 C를 받아 통과
공황장애와 우울, 불안은 결을 같이한다. 언제 어디서 공황발작이 올지 모른다는 공포가 당사자를 불안하게 만들고, 이로 인해 제약되는 생활이 사람을 우울하게 만든다. 하루하루가 바쁘게 굴러가는 의대생활 역시 우울의 한 축이 된다. 모두가 열심히 공부하고, 거기서 뒤쳐지지 않으려면 함께 달려야 하니까 번아웃이 오기 쉽다. 우울증으로 진단받은 상황에서는 더욱 문제다. 암기 위주의 공부를 해야 하는데 도통 외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의 공부 잘 하던 스스로의 모습이 겹쳐지면서 더욱 암담해진다. 그래서 나는 드러눕는 쪽을 택했다. 너무 힘들어서 도망갔다(가 돌아왔다).
같은 학년을 4번 경험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도돌이표 속에 갇혀 무기력한 상태이기도 했고 조금만 더 해보면 넘어갈 수 있겠다는 생각에 (울면서) 힘껏 애쓰는 상태이기도 했다. 다사다난한 4년을 지나보내고 느낀 것은, 도움을 요청하는 건 약한 모습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도와달라고 용기내어 말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강함에서 나오는 행동이다. 1학년을 탈출할 수 있었던 것도, 마침내 내 한계를 깨닫고 주변에 도움을 구했기 때문이다. 사건을 함께 바라보는 시각이 많아질수록 해결방안이 빠르게 나타났다. 학과사무실의 도움으로 제적 위기에서 구제받았고, 학교 상담센터에서 심리 상담을 받았다. 정신과도 꾸준히 다니며 주치의 선생님과 상의 하에 약을 복용하고 있다. 상태를 고백했을 때 지지해주고 한결같이 대해주는 친구들이 있다. 이들 중 누구도 내가 약하다고 비난하지 않았다. 나를 훈계하던 건 내 마음속의 목소리였을 뿐이다.
4년 또는 그 이상의 시간 동안 나 자신과 씨름하면서 얻은 장점도 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고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했다. 회피적인 대신에 플랜B를 잘 짜둔다는 것, 생각을 빠르게 행동에 옮긴다는 것, 압박감을 견디기 힘들어하지만 대신 자유로운 환경에서 창의성이 풍부하다는 점 등. 나의 내면을 짚어보면서 비로소 완벽주의를 다소 내려놓고 자신에게 좀 더 관대해졌다. 중간에는 함께 입학한 동기들이 먼저 졸업하는 걸 지켜보고 조바심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개의치 않는다. 사람마다 인생의 시계는 다르게 흐르고, 나는 내 속도대로 가면 되니까. 시간이 흘러 70살쯤 되면, 그때는 내가 몇 살에 대학을 졸업했는지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 중요한 건 내 속도와 내 방향이니까.
마지막은 최근에 상담 세션에서 한 말이다.
“많이 나아졌고, 저를 알고, 도움을 청할 수 있고. 지금 상태가 마음에 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