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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틈새 Jun 03. 2024

5. 왜 죽였을까?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마구치 류스케,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를 보면서 누가 '악인'일까를 생각해 본다. 악을 정의하고 선과 구분 지으려는 시도는 어쩌면 오래되고 낡은 습관인지도 모르겠다.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함'을 이야기한다. 우리가 사유하는 삶을 포기하는 순간 악은 어느 곳에서든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있으면 그 '무사유(思惟)' 자체는 악이 존재할 수 없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서로의 공간을 침범하지 않고 햇빛을 점유하고 있는 나무. 어떤 존재가 내려다보는 것인지, 누군가 올려다보는 것인지 모를 트래킹 숏이 수 분간 이어지며 영화는 시작한다. 서늘하도록 울창한 숲 속 작은 마을에 도시 개발업자가 글램핑장을 만들기 위한 설명회를 개최한다. 그 마을에는 자신을 마을의 심부름꾼이라고 자처하는 타구미와 그의 딸 하나가 살고 있다.


타구미는 모든 사람에게 높임말을 쓰지 않는다. 예의가 없다기보다는 모두에게 무사(無私) 하다는 느낌을 준다. 나무의 이름과 숲의 여러 가지 생리를 알고 있지만, 건망증이 심해 딸의 하원 시간을 매일 놓쳐버린다. 돈 계산에 서툴며, 돈을 가치 있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마치 인간사에 무심(無心)한 자연의 모습을 닮았다.


글램핑장의 정화조 설치에 대하여 설명하는 연예 기획사 직원 타카하시에게 타구미는 말한다.

"우물은 지하수와 연결돼 있어, 지하수는 아래 지역의 샘물이 되고."

"외부인을 받아들여 발전해 왔고, 자연을 파괴하기도 했어, 문제는 균형이야."


타구미의 말은 당위(도덕법칙이나 의무의 명령)가 아니라 자연계를 지배하고 있는 원리와 법칙에 대한 설명에 가깝다. 타카하시는 그에게  좀 더 조언을 구하기 위하여 마을을 재방문하게 되고, 그때 타구미의  딸 하나가 실종된다. 타카하시는  타구미와 함께 하나를 찾던 도중 총에 맞은 사슴 앞에 앉아 있는 하나를 발견한다. 하나가 일어나 털모자를 벗고 사슴에게 다가가려고 하자, 상처 입은 사슴에게 공격받을 것을 염려한 타카하시가 말리려 하지만, 그 순간 타구미가 그의 목을 조른다. 타카하시는 의식을 잃어버리고, 타구미는 코피를 흘리고 쓰러져있는 하나를 데리고 숲으로 들어간다.


노자의 <도덕경> 5장에는 이런 말이 있다.

"하늘과 땅은 인仁 하지 않아 만물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여긴다."


'짚으로 만든 개'라는 것은 고대 중국에서 제사에 쓰기 위해 짚으로 만든 개며, 쓰고 나서 버리는 중요하지 않은 물건이다. 노자에게 인仁이란 치우침이나 편견에 가깝다. 사사로움이 없는 상태, 차별적인 관계가 배제된 상태, 감정이나 의도가 없는 상태를 노자는 '인하지 않음'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작품 <원령공주>의  시시가미라는 사슴 신 또한 생명을 주고 빼앗는 행위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존재의 탄생과 죽음, 순환은 생태계의 본질이다. 창조와 파괴는 한 몸이지만, 인간은 언어라는 도구로 그것을 개념화하려고 하며, 그 순간 본질에서 멀어지게 된다.


타구미가  타카하시를 왜 죽였느냐는 질문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살펴본다면, 하나는 총에 맞아 죽을 위기에 있는 사슴을 살리기 위하여 다가간다. (이 장면에 대해서는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다. 총에 맞은 사슴과 코피를 흘리고 쓰러진 하나를 동일시할 수 도 있다. 개인적인 해석일 뿐이다.) 그것을 막으려는 타카하시의 목을 조르는 타구미의 행위는 삶과 죽음, 창조와 파괴가 동시에 일어나는 자연의 본질일 뿐이다. 하나가 사그라들고, 피어났을 뿐이다. 


'이유(理由)'를 생각하는 일 또한 인간의 관점일 뿐이다. 선악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 그래서 '균형'이 깨지는 순간, 얼마든지 무자비해질 수 있는 곳이 자연이다. 그 앞에서 느끼는 공포는 아마도 헛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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