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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틈새 Jun 10. 2024

9. 교실에서 정치적 중립을 외치다

자기 검열의 시대

  교실에서 정치적 중립을 외치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책 펴!!"


  나에게 쓸데없는 소리란, 나를 곤란하게 만드는 말이었다.


  전·현 정부에 대한 비난, 특정 정당에 대한 원색적인 발언, 정치인에 대한 감정적인 말이 불쑥 튀어나오면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 화들짝 놀란 마음을 애써 감춘다. 하지만 사정없이 흔들리는 눈동자를 숨길 수 없다.

흥미로운 건 아이들은 그 미세한 변화를 금세 알아차린다. 짓궂은 아이는 선을 넘기 위하여 도발적인 한마디를 더하지만 돌아가는 건 싸늘한 한마디다.


  학생들은 언제나 정치적 주체처럼 보였다. 그들은 자기 생각을 '눈치' 보지 않고 말한다. 물론 '쓸데없는 소리'라는 핀잔을 들을까 봐 '눈치'를 보기도 하지만 그 정도는 그들에게 무해한 것 같다. 스쿨 미투, 청소년 참정권 연령의 하향을 위해 노력하는 아이들을 볼 때면 대견하기도 하지만 부끄럽기도 했다.


부끄러움은 언제나 어른의 몫이다.



  ‘청소년은 정치적 판단력이 부족하다’, ‘청소년에게 정치는 해롭다’, ‘정치보다는 공부가 우선이다’와 같은 인식도 여전히 널리 퍼져있다. ‘교육의 정치화’ 논란이 그 방증이다. 청소년의 정치 활동을 금지하는 학칙도 여전하고 얼마 전 선거관리위원회는 모의선거교육까지 금지하는 후퇴 결정을 내놓기도 했다. “우리들이 정치를 하지 못하는 것은 당신들이 막아서 그런 것이고, 우리들이 정치를 잘하지 못하는 것은 당신들이 가르치지 않아서 그런 것이고, 우리들이 고통받는 이유는 우리들의 정치를 하지 못해서다.” 지난해 12월 초, 선거권 연령하향을 촉구하는 국회 앞 행사에 참가한 한 중학생의 발언은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바를 잘 보여준다. ‘몇 살부터 가능하냐’고 묻기보다 ‘어떻게 하면 참정권을 더욱 확대하고 참정권 행사를 지원할 수 있는가’로 접근을 전환할 때, 특정 연령집단을 배제한 특권으로서의 참정권이 인권에 좀 더 가까워질 수 있다.

-출처: 국가인권위원회 인권 웹진, 2020. 03.


  2019년 12월 27일, 공직선거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면서 대한민국 정치사상 처음으로 선거권 연령이 만 19세에서 만 18세로 하향 조정됐다. 만 18세는 어느새, 혼인신고를 할 수 있으며, 입대, 공무원 임용 시험을 치를 수 있다. 운전면허 취득도 가능한 나이다. 촛불 청소년 인권법제정 부산연대 김00은 MBC 뉴스와 인터뷰에서 선거권 연령 하향의 의미에 대해서 당차게 말했다. 그 말 중 지금도 귓속을 맴도는 말이 있다.  


"청소년을 정치적으로 유의미한 존재로 본다는 데 있습니다."


  

  가치관이 정립되지 않은 학생들은 교사의 의견에 동조하기 쉬워, 교사가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학생에게 강요할 때 교육적 부작용이 심각할 수 있다는 말과, 청소년을 정치적 유령으로 보지 말라는 선언 사이에서 정작 소외된 존재가 있다. 바로 교사다. 교사는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 그래야만 신뢰성 확보, 형평성 유지, 공익성이라는 공공의 가치를 달성할 수 있다고 배웠다. 배우고 나니 나를 두렵게 하는 것이 있다. '영향을 미치는 행위'에 대한 해석이다. 어디까지 말할 수 있고, 말하면 안 되는지 모를 때는, 아무것도 말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정치에 관심 있는 아이들은 유튜브에서 정보를 찾지만, 그들이 보는 대부분의 유튜브는 알고리즘에 의해 극단적인 성향에 치우친 영상이 대부분이다. 극단적인 성향이 반드시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극단적인 말은 다른 생각을 못 하게 한다. 극단의 위험성은 그 중간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데 있다.


  극단이란 '중용'을 잃고 한쪽으로 치우침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중용(中庸)이 단순한 중간이나 산술적인 평균을 의미하지 않는다. 중용(中庸)은 상황과 때에 맞는 행동을 의미한다. 그래서 중용에는 정형화된 행위가 존재하지 않는다. 사안에 따라 올바른 결단을 내리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태를 파악하는 능력과, 판단을 내리기 위한 보편적 기준이나 가치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중립을 설명하는 말이 불편부당(不偏不黨)이 아니라 불편정당(不偏正當)이었으면 한다. 한쪽에 치우치지 않으며, 도리에 합당하다는 의미다. 중립은 자기 관점을 갖는 일이며, 비이성적이며 정의롭지 못한 상황이나 불공정에 타협하지 않는 태도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정치적 중립이 터져 나오는 소리를 막는 벽이 아니라 물꼬를 터주는 길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자기 검열의 시대, 이 글을 쓰면서도 최대한 '중립'을 유지하기 위해서 부단하게 자신을 검열하였다.



사진: UnsplashParker John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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