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에는 악의로 가득 찬 세상이 나옵니다.
도시 전체에 넘실거리는 전란의 불꽃은 비이성적인 인간의 광기와 닮았습니다. 그러나 전쟁은 너무나 이성적인 선택인지도 모릅니다. 광기란 비이성적인 상태에서만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이 도구적·계산적으로 전용(轉用)될 때 더욱 격렬하게 타오릅니다.
"계몽이 자신의 목적을 배반한다."
“이성이 자기 스스로를 도구화한다면, 이성은 일종의 물질성과 맹목성을 갖게 된다.”
이 문구는 독일 철학자 막스 호르크하이머와 테오도어 아도르노가 공동 저술한 『계몽의 변증법』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성과 과학을 통해 인간을 해방시키고자 했던 계몽주의가 오히려 새로운 지배와 지배 체제를 만들어냈다는 것이 이 문구의 주장입니다. 계몽의 목적은 자연에 대한 지배와 인간 해방이었습니다. 그러나 계몽이 추구한 이성은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하여, 인간 해방이 아닌 지배와 억압의 수단이 되었습니다.
대중문화와 매스미디어는 인간을 수동적 소비자로 전락시키고, 획일화된 문화를 생산합니다.(하지만 저는 여전히 대중문화를 좋아합니다. 수동적 소비자가 아니라 능동적으로 향유하는 것은 가능할까요) 또한 계몽의 논리는 전체주의로 이어져, 개인의 자유를 억압합니다. 결국 계몽은 신화적 사고를 극복하고자 했지만, 자신도 새로운 신화로 전락하고 맙니다.
앵무새 대왕이 ‘DUCH’(이탈리아어로 ‘두목’)라고 쓴 팻말을 든 앵무새들의 환호와 환송을 받으며 세상의 주인에게 가는 장면에서 허버트 후버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늙은이들이 전쟁을 선포한다. 그러나 싸워야 하고 죽어야 하는 것은 젊은이들이다.' 마히토의 아버지는 그 당시 군수공장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전쟁 중에도 마히토 집안 사정은 통조림이나 설탕을 구할 수 있을 정도로 넉넉했습니다. 하지만 대공습으로 인하여 어머니가 계신 병원이 불에 타며 마히토는 어머니를 잃게 됩니다. 국가에 헌신한다는 신념과 위기의 시대 속에서도 이익을 추구하는 아버지의 행동은 비극적 이게도 어머니를 서서히 죽음으로 몰고 갑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러한 상황을 깨닫지 못합니다.
전쟁은 인간이 일으키지만, 그 피해는 자연재해처럼 사람들을 가리지 않습니다. 더욱 비극적인 것은 '재난의 불평등'처럼 전쟁에서도 여성, 아동, 노인과 같은 취약계층이 소외되고 잊힌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이지만 그들의 목소리를 세상은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주인은 마히토에게 악의가 담겨있지 않는 돌조각을 쌓아 올려 아름답고 깨끗한 세상을 창조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마히토는 자신의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합니다.
살인과 도둑질이 난무하고 곧 불타버릴 세상에서 살고 싶은지 다시 물어보는 증조부(세상의 주인)에게 마히토는 세상 속에서 자신 또한 악의에 물든 적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돌아가 친구를 만들고 싶다고 합니다. 히미(어머니의 어린 시절), 키리코(자신을 지켜준 사람), 왜가리(마히토를 탑으로 유인하지만 그를 도와주기도 함) 같은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고 합니다. 마히토에게 악의(惡意)란 불의(不義)가 아니라 미련과 되뇌임으로 점철된 불순(不純)한 세계가 아니었을까요.
다른 세계에서 어린 시절의 엄마를 만난 마히토는 히미에게 자신의 엄마가 된다면 죽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히미는 불은 두렵지 않다며, 마히토를 아들로 가지게 된다면 자신은 정말 행운일 것이라며, 자신의 시간 속으로 들어갑니다.
악의로 가득 찬 세상 속으로 다시 들어갈 수 있는 이유는, 그곳에 이해해야 할 무언가가 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과거의 자신일 수도, 어느 시절의 친구 혹은 가장 소중하고 사랑하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義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