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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그 밤 1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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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틈새 Jul 28. 2024

주파수

지금은 사라진.

사진: Unsplash의 Muhammad Hussam


1. 자동 검색

라디오는 지역 내에서 강한 신호를 수신하여 채널의 목록을 자동으로 작성한다.


2. 수동 선국

수동으로 검색하면 자동으로 작성된 목록에 없는 채널을 찾아 선국 할 수 있다.

수동 선국으로 하면 수신이 불량해도 라디오가 더 이상 주파수를 자동으로 변경하지 않는다.


3. 어린 시절

오래된 라디오의 다이얼을 돌린다.

돌리다 보면 어딘가 닳아지고 풀려버린 나사 때문인지 삐걱거리며, 불안하게 돌아간다.

숫자 위로 빨간 막대가 달리기 시작한다.

60, 70, 80......

서서히 손가락 끝에 감각을 집중하고 힘은 뺀다. 긴장을 늦춰선 안 된다.

조심스레 주파수 92-3번지의 문을 두드린다.

음악의 세계로 통하는 문이 열린다.

무겁던 방 안의 공기가 포근해지고, 알 수 없는 불안은 자장가가 된다.

밤이 깊어 갈수록 마음은 침잠해 결국에는 나와 선율만 남는다.

그 선율이 슬프지도, 아름답지도 않다. 그저 함께 이리저리 흔들릴 뿐이다.


4. 고장 난 라디오


4-1. 지지직 거리는 라디오

안테나가 문제일까? 건전지가 다 된 걸까? 어디에서 전파가 방해받는 것일까?


4-2. 삐걱 거리는 나

내가 문제일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문제일까? 참으면 될까?

내 삶을 방해하는 강력한 존재가 있는 걸까?

고장 난 라디오는 버리면 그만이지만, 망가진 것 같은 나는 버리지도 못해.

하루 종일 지지직거렸다.


5. 자동 검색의 시절

가장 강한 신호를 수신하며 살았다.

자동적인 삶이란 스스로 움직이는 삶이 아니라 저절로 움직여지는 삶이었다.

미래의 불안에 맞서기보다는 순응의 삶을 택했다.

모험보다 경제적 안정을 꿈꾸며, 하루하루를 살아냈지만,

매달 월급명세서와 카드사용내역서가 꼬박꼬박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말해주었다.


6. 수동 선국으로의 삶

"난 말이야 입 밖으로 꺼낸 마음만이 진심이라고 생각해"

지레짐작하지 않고 상대방이 한 말을 듣고 판단하고 싶다고 했다.

아마 상대를 오해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겠지.


가장 강한 신호의 채널에서는 재미없는 이야기만 흘러나왔다.

자동으로 저장된 목록에 없는 채널을, 수신이 불량해도 돌리지 않고 듣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지지직거리는 소리가 하루를 채웠다.

물음표 같은 그 소음에 귀 기울이며, 일상의 작은 조각들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지 생각했다.

불완전한 신호 속에서 느껴지는 불안한 감정의 정체는, 잃어버린 조각이 뭔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 막막함이었다.


 "진심은 잘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아. 그냥 물어물어 찾아가 닿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는 거야. 한참을 지지직거려도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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