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은 어제 자기소개서를 나눠 주면서 자신에 대해 솔직히 써 주면 고맙겠다고 말했다.
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얼마나 적어야 솔직한 게 되는 걸까. 어떤 것을 적고 어떤 것을 적지 말아야 할까.'
-문경민, 훌훌, 2022.
예상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주인공 ‘유리’가 입양되어서 겪은 일. 유리를 둘러싼 인물들의 이야기.
모든 사람이 같지는 않겠지만,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아픔. 그리고 그 아픔이 ‘우리’라는 관계 안에서 참을 만해지는 시간들.
‘가슴으로 낳았다는 말이 주는 따뜻한 느낌이 서정희 씨에게서는 느껴지지 않았다.’
고등학생인 유리는 엄마 서정희에게 입양되었다가 버림받았다. 그래서 외할아버지와 함께 살지만 최소한의 대화만 하며 지낸다. 갑작스러운 엄마 정희의 죽음과 존재를 몰랐던 9살 남동생 연우가 나타난다. 대학생이 되면 입양아로 자란 자신의 과거를 훌훌 털어버리고 이 공간을 떠나고 싶었지만 연우의 등장과 할아버지의 암 소식에 상황은 달라진다.
‘연우의 지난 삶을 생각했고 연우가 살아가며 겪게 될지 모를 무수한 어려운 일들을 생각했다. 목이 메어 왔고 눈물이 돌았다. 엄마 서정희 씨의 삶을 생각했다. 내가 살아가야 할 삶도 생각했다.’
버림받았다고 느꼈던 시간. 버려지고 버려졌던 시간들. 그리고 그 시간이 쌓여 부서지고 흩어지면 버려진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갖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우리를 성장시키는 것이 고통이라고 하지만 나는 고통을 떠올리면 향나무가 생각났다. 몸통부터 가지 끝까지 위태롭게 꼬여있는 향나무가.
‘정희는 내 딸이었다. 그 말에 쟁여 넣은 할아버지의 마음을 생각했다. 엄마 서정희 씨가 세상을 떠난 지 한 계절이 지났다. 그 시간을 할아버지는 어떻게 보냈을까 생각했다. 죽을 만큼 힘들었을 터였다. 몸과 마음의 고통이 영혼을 쥐고 흔들었으나 할아버지는 무너지지 않았다. 괴팍하다고 여겼던 할아버지의 성정이 어쩌면 고통의 터널을 무사히 지나오게 했을지도 몰랐다.’
소설을 읽다 보면 줄거리보다 책 속의 문장들에 마음이 더 끌렸다. 200여 쪽이 넘는 소설책을 마지막 장까지 읽고 덮으면 줄거리가 단 몇 줄로 정리되는 데 그 내용이 너무나 초라했다. 그래서 어느 날부터는 줄거리가 아니라 문장들을 노트에 적었다. 시간이 흘러 다시 들춰보면, 줄거리는 잊었지만 그 당시 문장을 어떤 마음으로 노트에 또박또박 썼는지는 다행히도 희미해지지 않았다.
위의 문장들에 묻어있던 감정은 이런 것들이었다.
나와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고통의 무게를 저울질하지 않기.
나의 고통을 남에게 전가시키지 않기.
보편적인 고통에 매몰되지 않기 혹은 다른 사람의 고통에 노련해지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