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서명... 연명치료 중단 서약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 후, 그 슬픔 중에서도 견디기 힘든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것은 아마도 죄책감일 것입니다.
지금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연명치료를 거부한다는 의사를 밝히는 서명입니다. 어느 날 주치의가 선언을 합니다.
“이제 더 이상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환자분은 임종 단계에 들어서셨습니다.”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병원에서 진행되는 절차는 따라야 합니다. 그 단계에서는 일단 퇴원을 해서 호스피스 병원으로 옮아가야 합니다. 현재로서는 제가 아는 한, 호스피스 병원으로 가는 것이 환자에게는 남은 나날을 가장 편안하게 보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호스피스 병원으로 가기 위해서는 연명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의사를 문서로 밝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환자가 의식이 있으므로, 본인이 직접 서명을 해야 합니다.
호스피스 병원으로 간다는 것은 거칠게 말해서 ‘죽으러 간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내가, 직접, 사랑하는 아내에게 설명하고 서명을 하라고 말해야 합니다. 너무나 가혹한 일을 앞에 두고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과연 입이 떨어지겠습니까? 그 순간 나는 아내 앞에서 정말 그 무엇으로도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눈물을 보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하지 않을 수도 없고…
어떻게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그 시간이 5분이었는지, 30분이었는지, 아니면 그보다 짧았는지, 길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그 사람 앞에 서명을 위한 태블릿이 놓였습니다. 그 사람은 펜을 쥐고 얼마 동안 가만히 있었습니다. 나는 그 사람을 바라볼 수도 없고, 그 자리에 서 있을 수도 없고, 말을 할 수도 없고, 울 수도 없는, 그러면서 그 앞에 태블릿을 쥐고 서 있어야 했습니다. 그야말로 미칠 것 같은, 죽을 것만 같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결국 서명을 하고, 모든 절차가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렇게 잔인한 시간은 지나갔습니다. 지금도 그 순간이 떠오르면,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그냥 소리 내어 펑펑 울고 싶습니다. 한없이 사랑하는 그 사람에게 나는 그렇게 잔인한 짓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요?
그렇게 호스피스 병원으로 옮아가면서, 그나마 이름난 좋은 병원이긴 했지만, 입구에서 나는 아내에게 큰소리쳤습니다.
“내가 꼭 당신이 여기서 걸어 나가게 할 거야!”기도의 힘으로 그렇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물론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나면 했던 모든 것을 후회하고, 하지 않았던 모든 것을 후회한다고들 합니다. 그때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그때 그렇게 했더라면, 죽지 않고 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지요.
사람의 생명은 하나이고, 삶과 죽음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기에 모든 선택은 결정적입니다. 단순히 생각해 봐도, 과연 항암치료를 해야 하느냐는 의문이 제기됩니다. 그렇게 고통스러운 항암치료를 견디어 냈지만, 결과는 결국 죽음이었습니다. 그나마 한 5년이라도 살았더라면 생각이 다를 수도 있겠지만, 그 사람은 13개월밖에 살지 못했습니다. 멀쩡하던 사람이 13개월 만에 모든 것이 망가지고, 결국 숨을 거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굳이 항암치료, 방사선치료를 했어야 할까요? 제가 보기에 항암치료라는 것은 너무 ‘무식’할 정도로 잔인한 치료법이었습니다. 암세포를 죽이기 위해 멀쩡한 세포까지 죽이는 독한 약을 투여하는 것이지요. 비유하자면, 적과 아군이 뒤섞여 시가전을 벌이고 있는 도시 한복판에 그냥 폭탄을 투하하는 셈입니다. 적과 아군이 한꺼번에 다 죽고, 건물도 모조리 파괴되는 것이지요.
사람 몸이 그렇게 해서야 어디 견디겠습니까? 그래서 차라리 항암도 방사선도 하지 않았더라면, 더 오래 살지는 못했을지라도 고통은 좀 덜하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끊임없이 마음을 괴롭힙니다.
그러나 또 뒤집어 생각하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세상을 떠난 후에 항암, 방사선 치료를 적극적으로 했더라면 낫거나, 최소한 더 오래 살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 후회할 것입니다.
결국 이러나저러나 후회만 남는 것입니다.
이렇게 후회할 거리는 널려 있습니다.
대안의학도 있고, 자연치유 요법도 있고, 기적의 식물, 식이요법…
우리의 경우, 처음부터 의료진을 완전히 믿고 따르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착실하게 치료를 받으면 나으리라는 믿음을 굳게 가졌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치료 효과도 좋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뇌로 전이되었고, 그 후로는 속수무책, 걷잡을 수 없이 상태가 악화되어 결국은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전이된 후, 온갖 다른 대안을 찾아 헤맸으나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억수같이 퍼붓는 빗속을 뚫고, 기적의 치료법을 찾아 먼 길을 달리던 그날도 기억이 납니다. 아내는 조제에 며칠이 걸리는 그 ‘기적의 약’이 도착하기 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좀 더 일찍 찾아가지 못한 것이 너무나 후회가 되고,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나을 수 있는 방법이 어딘가 분명 있지 않았을까? 처음부터 왜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까? 의료진만 믿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잘못이었나?”
답이 없는 물음만 되풀이되고, 더 열심히 방법을 모색하지 않은 자신이 밉고, 죄책감이 사무칩니다. 사실 기적의 치료법, 대안, 식이, 약물 등등의 정보는 많습니다. 거기에는 기적적으로 살아난 사람들의 사례가 반드시 등장합니다. 하지만, 그런 정보는 믿을 수도, 안 믿을 수도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아니, 효험이 있어 실제 어떤 사람이 기적적으로 살아났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에게 적용된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투병 중에 안 사실이지만, 같은 위암, 간암, 폐암 등이라고 하더라도 사람마다 부위가 다르고, 체질이 다르고, 그래서 병의 진행도 모두 다릅니다. 그러니 이 사람이 나았다고 해서, 저 사람도 낫는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우리는 그런 요법으로 살아난 사람은 볼 수 있지만, 그런 요법에도 불구하고 낫지 않고 죽은 사람은 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살아난 사람은 한두 명이지만, 죽은 사람은 몇 명인지도 모릅니다.
논리적으로는 이렇게 설명이 가능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설명이 죄책감을 덜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미안함, 그 죄책감.
그것은 죽을 때까지 짊어지고 가야 할 숙명과도 같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