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용 없는 이전의 경험?
"나는 잘 견딜 수 있습니다"
"많이 힘드실 거예요"
우리가 마지막 나날을 보냈던 보*스병원 호스피스병동의 A 상담 선생님은 걱정이 많았습니다. 제가 일을 당한 후 겪을 힘겨운 과정을 예측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A 선생님은 실력 있는 상담가였습니다. 호스피스 병동은 치료 희망이 없는, 그래서 죽음을 기다리는 곳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환자 본인은 말할 것도 없고, 그 가족들도 힘겹기 짝이 없습니다. 물론 천수를 누렸다고 할 만큼 연세가 드신 분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연세가 높아도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것은 힘들기 짝이 없는 일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A 선생님은 그런 환자 가족들의 마음을 보살피는 분입니다. 혼자 그 일을 감당하다 보니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충분한 시간을 할애하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만, 최선을 다해서 충실히 상담을 진행하셨습니다.
저는 처음 몇 마디를 나눠보고 바로 깊이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앞서 대학병원에서도 상담을 통해 큰 위로를 받았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시 주치의로부터 더 이상 치료할 방법이 없고 임종단계에 들어갔다는 통보를 받고 절망적인 슬픔으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때 병원 상담 선생님, 직함으로는 사회복지사 선생님의 안내를 받게 되었습니다. 상담은 크게 2가지로 진행되었습니다. 첫째는 최종적인 통고를 받은 충격을 어루만지는 상담이고, 그다음은 현실적인 문제, 즉 호스피스 병원으로 옮기는 등 임종을 맞이하기 위한 실질적인 준비 과정에 대한 설명과 조언입니다.
많아야 40대 초반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 여성 상담선생님을 처음 대면했을 때, 솔직히, 이런 젊은 사람이 인생을 얼마나 알까 하는 거부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을 갖춘 상담가였습니다. 어떤 것이든 '조언'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제가 말을 하도록 유도하고, 그럼으로써 내면의 응어리를 끄집어낼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마주 앉았을 때 테이블에는 물 한잔과 크리넥스 한통이 놓여 있었던 것입니다. 물은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크리넥스는 최소한 1/3 이상은 소비했던 것 같습니다. 처음 보는 젊은 여성 앞에서 제가 그렇게 펑펑 울 줄은 몰랐습니다. 물론 마음에 그만큼 큰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생각해 보면 상담 선생님이 대단히 특별한 말을 한 것은 아닙니다. 그의 첫마디는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어요?"라는 물음이었습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아내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우리 부부에 대한 이야기를 이끌어내고, 우리 사이에 쌓인 아름다운 추억과 사랑을 엮어 하나의 멋진 그림처럼 그려낼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헤어짐을 위한 징검다리를 놓은 셈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임종 대기' 통보를 받은 후 갈갈이 찢어졌던 마음을 다시 모아 일어설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그런 경험 때문이었는지, A 선생님과의 첫 대면은 즐겁다고 해도 될 정도로 말이 술술 잘 통했습니다. 그리고 A 선생님은 저에게 여러 번 많은 시간을 할애해 주셨습니다.
"아마 많이 힘드실 거예요. 다른 사람들보다..."
"왜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치유되지 않은 내면의 상처가 있기 때문이죠."
"저는 이미 여러 번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겪었기 때문에 어떻게 견뎌나가는지 알고 있거든요."
"사별의 슬픔은 한번 겪었다고 학습되는 것이 아닙니다. 경험이라는 것이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에요. 오히려 그 반대죠."
그는 대화를 통하여 저에게 누적된 치유되지 않은 내면의 상처를 마치 점쟁이처럼 진단해 냈습니다.
저는 7살 때 어머니를, 12살에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그 외에도 동생의 죽음, 친구의 죽음 등 일반적인 경우보다 많은 '사별'의 아픔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경험으로 이번에도 씩씩하게 잘 이겨나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A 선생님의 진단은 달랐습니다. 그의 설명은 이렇습니다. 7살에 어머니를 잃는 것과 12살에 아버지를 잃은 것은 각각 다른 슬픔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 따른, 그 나이에 알맞은 치유 과정이 필요한데, 과거 우리나라에는 그런 맞춤 치유에 대한 인식조차 없었고, 지금도 그런 것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그것이 세월이 흐르면서 다 극복이 된 것 같지만, 내면의 상처로 남아있다... 그러므로 지금 다시 사별의 아픔을 겪는 것은 새로운 상처를 받는 것에 더해 누적된 상처가 덧나서 합병증을 일으키는 것과 같다... 는 것입니다. 거기에다 우리 부부가 서로를 많이, 깊이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많이 힘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말을 정확하게 옮기지는 못했지만, 대략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물론 저는 수긍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잘 '이겨낼'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리고 그의 말이 맞았고, 저의 자신감은 빗나갔습니다.
A 선생님은 아내가 떠난 후 특별히 문상도 오시고, 그 후에도, 그럴 의무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별도로 상담까지 해 주셨습니다. 그때 저는 정말 견디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식사를 제대로 못하시는군요..."
다시 만난 첫마디가 정곡을 찔렀습니다.
"어떻게 아셨어요?"
"몸이 꽤 불었어요. 식사를 규칙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밥을 안 먹어도 배가 안 고프고, 또 배가 고플 때는 아무리 먹어도 배가 고프고... 그래서 폭식을 하고..."
"그렇죠? 바로 그러면 살이 찌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그러다 보니 심한 변비가 오고... 그런 상황까지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어떤 힐링 프로그램이 있으면 참여하기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A 선생님은 자신은 병원에 매인 몸이기 때문에 그렇게 정기적으로 시간을 낼 수 없고, 우리나라에는 사별 가족을 위한 힐링 모임을 진행하는 곳이, 자기가 알기로는, 없다고 했습니다. 아직 국내에는 상담이라는 것이 대개는 부부관계, 아동 청소년, 자살 등에 국한돼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나중에 교회를 중심으로 그런 모임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당시로선 그냥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A 선생님은 그 대안으로 정신과 치료를 제안했습니다. 그에 따라 저는 A대학병원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았고, 그 도움으로 상당한 정도로 일상을 되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시간은 많이 걸렸지만...
또 한 가지 감사한 것은 보*스병원에서는 호스피스병동에서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가족을 대상으로 매년 1회 힐링 프로그램을 진행한다는 것입니다. 초청장을 받고 저는 망설임 없이 참가신청을 했습니다. 그런데 가 보니 참가자 중 남자 유족은 저밖에 없었습니다. 평일 낮에 남성들이 참석하기 어렵기도 하지만, 또한 한국 남성들은 이런 자리를 기피한다고 합니다.
모임은 추모, 명상, 강의, 사례 발표, 연주회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오후 한나절 진행되었고, 저에게는 참으로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1년에 단 한차례밖에 열리지 않았고, 그나마 이듬해부터는 코로나19 팬데믹 사태로 그마저도 끊어져버렸습니다.
죽음이란 모든 생명체에게는 피할 수 없는 것이고, 따라서 사랑하는 누군가와의 사별도 언젠가는 겪게 될 일입니다. 살아남은 사람은 그 아픔을 견뎌내어야 합니다. 그 아픔과 슬픔은 부모, 형제, 자녀, 배우자, 친구 등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또 그 일을 당하는 당시의 나의 나이와 여러 가지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깊이와 강약의 차이도 있지만, 어느 것이 더하고 덜하다는 차이가 아니라, 아예 차원이 다르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물론 더 슬픈 일도 있고, 상대적으로 덜 슬픈 경우도 있겠지요. 사람뿐만 아닙니다. 오랜 세월 함께 해 온 반려동물의 죽음을 맞아 너무 크게 상심해서 어려움을 겪는 사례도 있습니다.
흔히 말합니다. 일생 중 가장 큰 스트레스는 배우자의 죽음이라고. 물론 그 슬픔의 강도와 지속 기간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그에 대한 물음에 답변 대신 반문합니다.
"이 슬픔이 얼마나 오래갈까요?"
"얼마나 사랑하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