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랄 수 없을 때 바라는 행복

삶과 죽음 사이…'나'란 무엇일까?

by 제이슨

『만일 나에게 단 한 번의 아침이 남아 있다면』 /존 릴런드/북 모먼트 /2024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 살아 있는 이들을 위한 열네 번의 인생수업』/미치 앨봄/살림/ 2024

『싯다르타』/헤르만 헤세/민음사/2002


삶은 계속된다


세계의 화약고 발칸반도에서 사막의 오아시스 도시, 또 해적의 본거지 소말리아 해안에서 아프리카 대륙을 거쳐 신(神)들의 나라 인도까지 긴 여정을 달려왔다. 그곳에는 온갖 갈등과 욕망이 들끓고 있었고, 그 속에서도 삶은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면서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음을 보았다.

사람이 없고, 삶이 없다면 이 모든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사람이 있고, 삶이 있다고 한들 기록이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역사는 사람과 삶의 기록이다. 그러나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에는 사람과 삶의 기록이 별로 없다. 위대한 국가, 위대한 인물만 있다. 그것은 큰 틀이고 그릇이다. 그 틀 속에, 그 그릇 속에 든 내용물, 즉 사람과 삶을 들여다볼 때 진짜 역사를 보는 것이다.

그래서 소설 시 에세이 등의 문학 작품과 사적인 기록물들이 소중하다. 알렉산더 대왕, 카이사르, 칭기즈칸, 태정태세문단세… 다 중요하다. 그러나 사실은 그 당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는지가 훨씬 중요하다. 위대함이란 어떤 국가, 어떤 인물이 얼마나 많은 영토를 손에 넣었고, 얼마나 대단한 권세를 누렸는가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 치세에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하게 살았는가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문학은 바로 그런 것을 기록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소설을 읽는다.


그렇다면 행복한 삶이란 무엇일까? 지금까지 소개한 책에서 보는 삶은 신산하다. 전쟁과 학살, 욕망과 갈등, 굶주림과 질병, 사랑과 증오, 희망과 좌절, 그리고 절망… 그 속에서 사람들은 몸과 마음을 다치고, 상처 속에서 신음하고, 때로는 허망하게 죽어간다. 소설과 여러 가지 삶의 기록 속에는 행복은 별로 없고, 고난은 끝이 없다. 그러나 여기에 평범한 진리가 숨어있다. 빛이 없는 어둠은 없다. 그 모든 절망과 불행은 희망과 행복의 다른 모습이다. 어느 한쪽이 없으면 다른 한쪽도 없다.

그래서 나는 소설을 좋아한다. 역사나 인문학은 소설, 즉 사람의 삶을 이해하기 위한 도구이다.

다시 “행복한 삶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으로 돌아오자면, 그것은 소설의 결말과도 같은 것이다. 갈등과 클라이맥스, 반전을 거쳐 주인공이 눈을 감든가, 길을 떠나는 장면 같은 것 말이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 그러므로 행복을 이야기하려면 인생의 황혼을 이야기해야 한다.

가장 극적인 드라마는 현실이다. 그래서 때로는 소설 아닌 소설 같은 이야기도 있다.


죽어가는 이들에게 배우는 인생 수업


끝이 좋으면 다 좋다.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에 “나는 행복했다”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 행복한 삶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어떤 힘겨운 인생을 살았든 간에 인생의 막바지를 행복하게 보내는 것이 최고의 가치를 갖는다는 뜻이다. 그 조건으로 우리는 제일 먼저 ‘돈’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과연 그럴까?


『만일 나에게 단 한 번의 아침이 남아 있다면』 /존 릴런드/북 모먼트 /2024


이 책은 특별하다. 노인을 관찰이나 돌봄 또는 지원 대상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인 생활인으로서 그들의 삶을 소개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유별난 사람들이 등장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다. 그래서 특별하다는 것이다. 아무 희망도 즐거움도 없고, 인생이 무의미할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 모두는 하루하루 ‘자신의 삶’을 살고 있다. 비록 끝이 아주 가깝고, 실제로도 ‘죽어가고’ 있지만, 젊은이들과 똑같이 삶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냥 시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저자 존 릴런드는 언론인으로 「여든다섯, 그 너머」라는 제목의 「뉴욕 타임스」 연재 기사를 준비하면서 뉴욕의 초고령자 여섯 명을 선정해 1년 동안 지켜보면서 취재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노년의 어려움과 고통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취재 결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는 취재 전 상상했던 것과 판이하게 다른 노인들의 삶을 목격하고 그것이 최고의 인생 수업이었으며, 그래서 그 자신의 인생이 바뀌었다고 고백한다. 이 책은 이 취재 결과를 담아 「뉴욕 타임스」에 연재한 6부작 기사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우선 저자는 “나는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있는가”라는 화두를 던진다. 그리고 제1부는 ‘아주 특별한 만남’이란 제목 아래 취재 과정과 느낀 점, 관련 연구를 인용한 자료 등을 제시한다. 제2부는 취재 대상이 되었던 6명의 초고령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소개하는 ‘마지막 인생 수업’이다. 저자 자신이 취재를 통해 그들로부터 소중한 교훈을 배웠다는 의미에서의 ‘인생 수업’이다. 물론 그들이 누구를 가르치겠다고 한 것이 아니다. 그저 남은 삶을 살아 낸 것이 ‘관찰자’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인생 수업‘이 되었다는 뜻이다.


책 첫머리 ‘내 삶에는 어떤 내일이 올까’ 장(章)은 전체 내용을 잘 요약한 ‘안내서’ 같아서, 이 부분만 읽어도 ‘얻을 것’이 많다. 저자가 선정한 취재 대상은 6명의 85세 이상의 고령자이고, 거기에 더해 86세인 자신의 어머니의 사례까지 섞여 있어 실제로는 7명의 이야기가 소개되는 셈이다. 그들 중 2명은 취재가 끝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이들은 모두 “서로 살아온 환경도 다르고 속해 있는 사회 계층도 다르다.” 그들 모두에 대한 묘사는 이렇다.


모두 무언가를 잃은 후였다. 의지대로 움직여주는 몸, 또렷한 눈, 밝은 귀, 배우자, 자녀, 친구, 기억 같은 것들 말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은 없었다.(p.13)


내가 만난 고령자들은 대부분의 다른 노인들과 마찬가지로 위의 예시(유별난 사람들) 중 어느 쪽에도 해당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잃은 것들도 있고 할 수 없는 일들도 많았지만, 거기에 연연하지 않고 계속해서 뭔가를 바라고 원하며 새 아침을 맞이했다. 무릎이 쑤시고 예전만큼 십자말풀이가 술술 풀리지 않는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노화는 방심하고 있던 찰나에 불현듯 들이닥치는 일이 아니었다. 또한 고쳐야 할 문제도 아니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자신뿐만 아니라 세상에 대해 배우며 어떻게 살아갈지 선택해 나가는 인생의 한 단계일 뿐이었다.(p.24)
여섯 명의 고령자들은 모두 자신만의 일과가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국 원칙은 모두 같았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시간과 에너지를 자신이 좋아하고 여전히 할 수 있는 무언가에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때는 할 수 있었지만 더 이상 할 수 없는 것들을 아쉬워하면서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 된다. 노인학자들은 이를 선택ㆍ적정화 보완(SOC, Selective Optimization with Compensation) 모델'이라 부른다. 노인들은 남은 능력을 최대한 활용해 잃어버린 것을 보완한다는 것이다.(p.28)

나이가 들면서 배우게 되는 한 가지 교훈은, 나이 듦은 우리의 생각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흔히들 몸과 마음이 쇠약해지면 인생이 크게 달라질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고령자들은 계속해서 그대로 살아간다. 그러니 우리는 자신을 아껴야 한다. 나이 드는 것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아무리 많은 것을 잃어도 우리에게 닥칠 그 모든 상황을 짊어지고 갈 수 있기 위해서다.(p.38)
스탠포드장수연구센터의 설립자이자 심리학자인 로라 L. 카스텐슨 Laura L. Carstensen 교수는 노인들이 삶에 더 크게 만족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회 정서적 선택성’Socioemotional selectivity)이라 불리는 그녀의 가설에 따르면, 앞으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아는 노인들은 당장 즐거울 수 있는 일에 에너지를 집중하는 반면, 아직 갈 길이 먼 젊은이들은 비록 앞으로 쓸모가 없을지 모르더라도 새로운 경험이나 지식을 쌓기를 선호한다. 또 젊은이들이 현재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들 중 나중에 혹시라도 필요한 것이 있을까 봐 초조해하는 반면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이미 가진 것들 중 가장 좋아하는 것 몇 가지만 추려냈다. 젊은이들은 개구리가 왕자로 변하기를 바라며 키스를 한다. 하지만 노인들은 손자 손녀들에게 키스한다.(p.55) ....
기능적 자기공명영상(MRI)으로 촬영한 결과, 고령자들의 뇌에서는 감정 처리를 담당하는 편도체가 긍정적인 이미지를 보았을 때 더 활발하게 반응한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한편 젊은이들의 두뇌는 두 가지 이미지에 모두 동일하게 반응했다. 고령자들의 뇌는 명상을 하는 사람들의 뇌와 유사했다. 반면 사이코패스들이나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를 겪고 있는 사람들은 부정적인 자극을 받았을 때 편도체가 활성화되었다.(p.59)


첫째 취재 대상자는 87세 남성 프레더릭 존스다. 그는 2차 대전 참전 용사이며 퇴직 공무원으로 “여자를 밝힌다.” 교정용 신발이 창피해 교회를 못 나가고 있다. 겨우겨우 올라갈 수 있는 3층에 살고 있으며, 늘 하나님께 110세까지 살 수 있도록 기도하면서, 실제 그렇게 되리라고 믿는다. 그의 행복 비결은 ‘감사’다. 매일 아침 “다시 한번 해 뜨는 장면을 볼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하는 기도를 올린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던 때가 언제냐는 질문에 “바로 지금이지”라고 대답한다.

사실 그의 감사는 놀라운 일이다. 그는 돌봐 줄 사람도 없다. 딸은 암으로 죽어가고 있고, 아들들은 그에게 돈을 빌려간 뒤 연락이 없다. 거동은 불편하고 집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서른일곱 개다. 전등을 갈지 못해 암흑 속에서 며칠을 보낼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잘못되거나 나쁜 일에 연연하지 않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감사한다. “삶은 그 자체로 감사할 일”이라는 것이다. 그의 결론은 이렇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야. 좋은 날이 있고 나쁜 날도 있는 거지.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좋은 날들인 거야.”


핑 웡은 중국계 여성으로 89세다. 정부 보조 아파트에 월 200달러를 내고 살고 있으며 저소득층 의료보장제도 지원으로 매일 7시간씩 간병인의 도움을 받는다. 거의 80세가 될 때까지 차이나타운의 개인병원에서 최저시급에도 못 미치는 돈을 받고 일하다가 저축 한 푼 없이 퇴직해 월 700달러 생활보조비에 의존해 살아간다. 관절염으로 걸을 때마다 고통스럽다. 매일 마작 게임하는 것이 낙이다. 그녀는 말한다. “난 되도록 나쁜 일은 생각을 안 하려고 해. 늙은이들이 불평하면 못쓰지.” 그녀에게 노년은 “여느 나이와 다름없는 인생의 한 단계”이며, 그래서 “최대한 즐겁게 살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당연히 실망과 좌절도 많다. 몸이 아파서 매년 한차례 가던 여행이 무산되거나 하면 침울해진다. 종종 기뻐하다가 순식간에 절망에 빠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치 기쁘게 사는 양 겉치레로 꾸미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저자는 그녀가 그렇게 긍정과 부정을 오가는 상반된 관점이 유용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기쁨이란 힘들었던 지난날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데서 온다는 것이다. 즉 “인생이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다 좋을 필요는 없고 당연히 그렇게 될 리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다.


90세 여성 헬렌 모리스는 좌충우돌이다. 스무 살이나 어린 남자와 사랑에 빠져 있고,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다. 이게 말이 되는가? 나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이가 들면 겉은 거북 등처럼 쩍쩍 갈라진 고목과 같아 보이지만, 그 속에 소년 소녀 감성은 여전히 남아있다. 사랑할 수 없는 나이란 없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것은 ‘연애 감정’이다. 이 책에 소개된 미국의 통계에 따르면 85세 이상 미국인 중 27%만이 배우자가 있고, 40%가 혼자 살며, 결혼하지 않은 채 연인과 함께 사는 사람은 1% 미만이다. 남녀 성비는 2대 1 정도로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다. 우리나라도 아마 비슷할 것이다. 대부분은 ‘연애’에 관심이 없다. 특히 여성들은 더욱 그렇다. 그러나 어떤 계기가 있다면 다시 사랑에 빠질 수 있다. 헬렌의 사례는 사실은 놀랄 일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흔한 경우도 아니다. 그녀와 연인 하위 지머는 흔치 않은 행복한 커플인 셈이다. 그 비결은 사랑이고, 그 사랑이란 곧 베풂이다.


하위와 있으면 헬렌은 여전히 쓸모 있는 사람이었다. 하위가 할 수 있는 일이 적을수록 그녀는 더 많은 것을 해줄 수 있었다. 그가 그녀를 더 많이 필요로 할수록 그녀 역시 더 많은 것을 얻게 되는 것이다. 얼핏 한쪽은 주기만 하고 한쪽은 받기만 하는 모습 때문에 남들 눈에는 서로 어울리지 않아 보이기도 했고 헬렌의 자녀들은 그들 사이를 반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헬렌과 하위는 그 덕분에 삶의 목표와 방향을 찾을 수 있었다. 그녀는 하위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인생에 의미를 부여해 주던 자신의 역할을 되찾고 있었다.(p.90)


“인생의 의미는 서로의 가치를 높여주는 관계를 형성하는 법을 배우는 데 있다.” - 영국의 문화평론가 테리 이글턴(p.94)


그러나 연애는 리스크가 따른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새로운 사람을 사귀기보다는 기존의 관계에 안주하고, 그것도 긍정적 관계만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것이 옳다. “끔찍한 연애를 한다거나 앙숙과 같은 가족들과 함께 있어 봐야 젊은이에게나 노인에게나 좋을 게 없기” 때문이다.

루스 윌리그가 바로 이런 점을 잘 보여준다. 91세인 그녀는 헬렌과는 성향이 반대다. 남편을 잃은 지 21년이 되었고, 한 번도 연애에 관심이 없었다. ‘사회생활’보다는 책을 열심히 읽는다. 대학을 나오고, 일을 했던 여성인 루스는 자신이 더 이상 ‘유용하지 않다’는 느낌 때문에 우울하다. 그래서 외로움도 있지만, 새로운 사람, 즉 남자를 만나는 것에는 그냥 관심이 없다. 이 점은 작가의 어머니와 거의 비슷하다고 한다. 루스는 남편과 살 때 좋았던 일을 떠올리며 누구를 만나도 그보다 나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작가의 어머니는 남편이 세상을 떠날 때 끔찍한 고통을 겪는 것을 지켜본 나날들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어찌 됐건 두 사람의 결론은 같다.

그러나 루스는 외롭다는 말을 하지는 않는다. 자녀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늘 티격태격한다. 자녀들은 어머니를 부축하거나 뭔가 도움을 주려 하고 루스는 혼자 할 수 있다고 고집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자녀들의 보살핌을 고마워한다. 이것이 말은 쉽지만, 실천은 어렵다. 대단히 지혜로운 것이다. “그녀는 그녀가 잃어버린 것들이 아니라 가지고 있고, 사랑하는 것을 위해서 살았다.”


여기 또 한 사람의 남성이 있다. 그는 특별하다. 게이, 동성애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파트너와 60년을 함께 하고, 85세가 넘어서 혼자 몸이 되었다. 수십 년을 함께 살다가 아이도 없이 홀로 남은 노년의 남성 동성애자는 극히 드물다. 91세의 존 소런슨이 바로 그런 남자다. 나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지만, 존은 평생 파트너를 사랑했고, 그가 떠난 다음에도 음악을 들으면 그와 함께 했던 기억들을 떠올리면서 행복해한다. 그러나 “이제는 사는 게 큰 재미가 없어. 끝났으면 좋겠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그는 남은 날들을 하찮게 여기지는 않는다. 그것을 보면서 작가는 오히려 “너무 짧아서 소중하게 여겨졌다”라고 말한다. 죽음이 모든 것을 가치 있게 만들어줬다는 것이다. 작가는 존에게 배운 것이 연민과 공감이라고 했다. 그는 삶을 사랑했지만, 죽음을 집착할 정도로 바랐다. 존이 남긴 명언은 이렇다. “죽어서 나쁜 점은 딱 하나, ‘드디어 죽었구나’하는 기쁨을 만끽할 시간이 별로 없다는 거야.”


이 책에서 유일하게 유별난 사람이 있다면 그는 요나스 메카스다. 92세로 작가의 취재대상자 여섯 명 중 가장 나이가 많지만, 가장 젊고 활동적으로 산다. 그는 영화감독이자 작가로 40~50대 젊은 친구들과 함께 열정적으로 현역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영화를 찍고, 회고록을 쓰고, 스크랩북을 만들면서 자신이 세운 비영리재단을 위해 자금을 모으고 웹사이트를 운영한다. 그는 스스로에 대하여 ‘그냥 살고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나는 사색을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니야. 농장에서 자라서 시골 생활을 해본 사람들은 자신을 분석하지 않아. 그냥 사는 거지.” 이에 대해 작가는 “이런 식의 삶이 오히려 유난히 확고한 목표의식과 방향감이 필요하다”라고 지적한다. 그러므로 ‘요나스의 수업’의 키워드는 ‘긍정’과 ‘목적’이다.

실제 과학적 연구는 노년에 대한 태도와 실제 모습 간에 놀라운 상관관계를 발견했다. 즉 노년을 더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부정적인 고정관념을 가진 사람들에 비해 장애를 가졌을 때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44%나 높고, 혈압, 스트레스, 신체 균형, 건강한 생활습관 등 모든 면에서 훨씬 좋은 상태이며 평균 7.5년을 더 산다는 것이다. 또 다른 연구는 목적의식을 가진 노인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오래, 더 충실하고, 더 건강하게 사는 경향이 있다는 것도 확인되었다.

요나스는 말한다. “자네 안에 있는 뭔가가 자네를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거야.” 그러면서 자신의 건강하고 활기찬 삶의 비결도 알려준다. “사람들이 나한테 비결이 뭐냐고 묻는데 비결이 어딨어. 내 나이에 나 같지 않은 사람들이 비정상적인 삶을 살아서 그런 거지. 너무 많이 먹고, 너무 많이 마시고, 모든 게 너무 과해. 나는 그냥 필요한 만큼만 해.”


이렇게 6명의 초고령자와 1년을 보낸 작가는 그들의 시간이, 모든 인생에서의 시간이 “하루하루가 평범하면서도 소중하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에필로그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행복, 목적, 만족, 우정, 아름다움, 사랑과 같이 인생의 좋은 것들은 내내 그 자리에 있었다. 우리는 그것들을 얻기 위해 특별히 뭔가를 해야 할 필요가 없다. 좋은 음식, 친구, 예술, 따뜻함, 가치와 같은 것들을 우리는 이미 가지고 있다. 그러니 우리는 그저 그렇게 살기로 결심하기만 하면 된다.”


이 책은 각 장마다 딱 맞는 제목을 붙여 놓아서 그것을 열거하는 것만으로도 내용을 일별 할 수 있다.


내 삶에는 어떤 내일이 올까.

이 순간을 제대로 살아야 다음 순간을 맞을 수 있다.

행복의 선택은 자신에게 달려 있다.

서로의 가치를 높여주는 그 의미 있는 일.

사랑은 늘 손을 뻗으면 닿을 곳에 있었다.

조금만 더 일찍 알았다면 좋았을 것들.


그래서 행복한 노년을 위하여 필요한 것은,


감사

내려놓음

현실에 만족

하루를 소중히 여김

서로의 가치를 높여주는 일인 사랑

긍정


그리고 또 다른 구절들…


아델트 교수는 이 척도를 통해 실제로 나이가 들수록 더 현명해지며 현명해질수록 더 행복해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 고령자들은 결코 쓸 수 없는 재산에 욕심을 내거나 이룰 수 없는 욕망을 품지 않는다. 게다가 기억나지 않으니 무시당했다고 복수한다며 입에 거품을 물지도 않는다.(p.71)


코넬 대학의 칼 필레머 교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것과 ‘그래야만 행복’한 것을 구분했다. 전자는 노년의 즐거움이고 후자는 젊음의 괴로움이라는 것이다.(p.182)


연구자들은 우리 모두에게는 인생의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행복이 일정 수준으로 유지되는 행복의 ‘설정값’이 있다고 믿는다. 예를 들어 로또가 당첨되는 것처럼 좋은 일이 벌어지면 우리는 한동안 행복하다. 하지만 결국에는 전과 같은 수준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 좌절도 마찬가지다.(p.184)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 살아 있는 이들을 위한 열네 번의 인생수업』/미치 앨봄/살림/ 2024


알고 보니 나만 모르고 다 아는 책이었다.

앞의 책 『만일 나에게 단 한 번의 아침이 남아 있다면』의 책 소개 글에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을 연상시키는 책”이란 표현이 있어서 관심을 갖고 주문했다. 책을 받아보니 2024년판 43쇄다. 1쇄는 2010년. 미국에서 초판이 나온 것은 1997년이라고 하니 과연 나만 모르고 있었던 책이었다. 내가 몰랐던 까닭은 아마도 ‘죽음’, 그리고 그 ‘죽음을 전제로 한 삶’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사실 ‘죽음’이란 아무리 좋은 쪽으로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유쾌한 주제는 아니다. 그러나 누구도 피해 갈 수 없으며, 따라서 외면한다고 외면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이 책의 ‘주인공’ 격인 모리 슈워츠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어떻게 죽어야 할지를 배우게 되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깨닫게 된다.” 이 책은 바로 그런 내용을 담은 책이다. 루 게릭 병으로 죽어가는 노교수와 그의 젊은 제자가 함께 하는 삶의 마지막 여정의 기록이다.


저자 미치 앨봄은 에미상을 수상한 바 있는 방송인이자 칼럼니스트다. 그는 스포츠 칼럼니스트로 바쁘게 살다가 우연히 자신의 은사인 모리 슈워츠 교수 소식을 접한다. 그리고 불원천리 먼 길을 거의 매주 화요일마다 찾아가서 죽어가는 옛 스승의 벗이 되어준다. 그 기록을 담은 것이 바로 이 책이고, 이를 계기로 그는 ‘삶과 죽음을 끌어안는 휴머니스트 작가’가 된다.


작가가 소개하는 스승과의 인연은 이렇다. 대학 시절 그는 강의 시간 외에도 모리 교수와 만나 마음을 나누기도 한 특별한 제자였다. 졸업과 함께 헤어질 때는 모리 교수가 눈물을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졸업 후 방황도 하고, 또 언론인으로 자리를 잡고 바쁜 삶을 살게 되면서 작가는 스승을 잊고 살았다. “자주 찾아뵙겠습니다”란 말은 인사치레일 뿐임은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다. 그러다가 16년 만에 진짜로 스승을 “찾아뵙게”된다. 우연히 TV 토크쇼에서 모리 교수의 이름을 듣게 되고, 거기서 스승이 불치병으로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앞서 살펴본 『만일 나에게 단 한 번의 아침이 남아 있다면』에 소개된 평범한 사람들과는 달리, 모리 슈워츠 교수는 유별난 사람이다. 그는 사회학 박사로 평생 대학 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쳐 왔다. 루게릭 병으로 거동이 불편해진 뒤로는 제자와 동료,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며, 24시간 돌봄을 받고 있고, 수많은 ‘팬들’의 성원도 받고 있다. 서민이 누리기 어려운 환경에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런 환경에 있다고 해서 누구나 모리 교수처럼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이와 같은 ‘환경의 유별남’은, 그러므로, 멋진 죽음을 맞는 삶의 필요조건이 아닌 것이다.


그는 ABC TV의 유명 토크쇼 <나이트라인>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모든 게 시작됐을 때 난 스스로에게 물었어요. ‘다른 사람들처럼 나도 이 세상에서 그대로 물러날 것인가, 아니면 보람 있는 삶을 살 것인가?’하고 말이에요. 난 원하는 대로 살기로, 아니 최소한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기로 결정했어요. 위엄 있게, 용기 있게, 유머러스하게, 침착하게.”(p.66)


이렇게 결심한 그는 그 실천 방식의 하나로 ‘죽음의 그림자를 껴안고 살아가는 삶의 단상’을 메모로 쓰기 시작했다.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있음을 인정하라.” “너무 늦어서 어떤 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마라.” 등등… 이런 ‘아포리즘’이 쌓여갔고, 어느 날 이를 본 대학 동료 중 한 사람이 이들 글귀에 매혹되어 신문사로 보냈다. 그렇게 기사화되었고, 그것이 <나이트라인> 담당자의 눈에 띄어 모리 교수와의 대담이 제작, 방영된 것이다.

루게릭 병은 ‘운동신경세포만 선택적으로 파괴되는 질환’이다. 즉 발끝부터 근력이 약화되고 위축되어 못쓰게 되는 마비가 진행되어 몸의 각 부분으로 번져 나가 결국은 호흡근 마비로, 수년 내 사망에 이르는 치명적인 병이다. 정확한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으며 치료법도 없다. 이것이 무서운 것은, 보통 병이 깊어지면 정신도 흐려지지만, 루게릭병의 경우, 정신은 말짱한데 몸이 말을 안 듣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스스로 죽어가는 과정을 명징한 정신으로 고스란히 겪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리 교수가 의연하고 당당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는 슬퍼하고, 두려워하고, 절망하기도 한다. 그래서 울기도 하고, 슬픔에 잠기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말한다. “죽음은 슬픈 일이지만, 불행은 아니다.”


이 책에서 무언가 지금까지 들어본 적 없는 놀라운 가르침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다. 대부분 모리 교수의 가르침은 잔잔하다. 그러나 그 모두는 우리가 살면서 잊고 있던 그 무엇이다. 그것이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대소변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죽어가는 노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는 것이 놀랍다.


살아가면서 현재 자신의 인생에 무엇이 좋고 진실하며 아름다운지를 발견해야 하네. 뒤돌아보면 경쟁심만 생기지. 하지만 나이는 경쟁할 만한 문제가 아니거든. … 사실 내 안에는 모든 나이가 다 있네. 난 세 살이기도 하고, 다섯 살이기도 하고, 서른일곱 살이기도 하고, 쉰 살이기도 해. 그 세월들을 다 거쳐 왔으니까 말이야. 나는 그때가 어떤지를 알지. 어린애가 되는 것이 적절할 때는 어린애인 게 즐거워. 또 현명한 노인이 되는 것이 적절할 때는 현명한 어른인 게 기쁘네….”(p.188)


모리 교수는 죽어가면서도 다른 사람의 고민을 들어주기를 즐겼다. 사람들은 문병 왔다가 위로를 받고 돌아간다. 애제자인 저자에게도 “무엇이든 물어보게”라고 ‘학구열’을 북돋운다. 저자는 리스트를 만들어 간다. 그 리스트는 ᇫ죽음 ᇫ두려움 ᇫ나이가 든다는 것 ᇫ탐욕 ᇫ결혼 ᇫ가족 ᇫ사회 ᇫ용서 ᇫ의미 있는 삶 등이다. 그리고 화요일마다 이 주제를 하나하나 탐구해 나간다. 이것이 모리 교수의 마지막 강의이고, 이 책이 두 사람의 ‘마지막 논문’이다.

그는 늘 공감과 사랑, 그리고 함께 하는 삶을 강조한다. 그래서 나는 다음 구절이 그의 생각을 가장 잘 드러낸다고 느꼈다.


“우리가 아기로 삶을 시작할 때는 누군가 우릴 돌봐 줘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어. 그리고 나처럼 아파서 삶이 끝나 갈 무렵에도 누군가 돌봐 줘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어. 그렇지 않은가? … 여기에 비밀이 있네. 아이 때와 죽어 갈 때 이외에도, 즉 살아가는 시간 내내 사실 우린 누군가가 필요하네.”(p.232)


그래서 모리 교수가 가장 좋아하면서 좌우명처럼 늘 되풀이하는 말은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멸망하리.”라는 시 구절이다.

모리 교수는 <나이트라인>과 시차를 두고 3번 인터뷰를 했다. 첫 인터뷰가 큰 호응을 얻고, 수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받았기 때문이다. 마지막 3번째 인터뷰는 사실상 세상을 떠나기 전 ‘작별 인사’를 하는 자리와 같았다. 거기서 그는 유언처럼 당부의 말을 남긴다.


“연민을 가지세요. 그리고 서로에게 책임감을 느끼세요.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이 세상은 훨씬 좋은 곳이 될 겁니다.”(p.238)


내가 나를 모르는데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나는 이 말을 증오할 정도로 싫어한다. 절대 쓰고 싶지 않다.

얼마 전 내가 나가는 모임 중 하나의 단톡방에 부고가 떴다. 금세 답이 주르륵 달린다.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


답을 해야 하는데, 나도 똑 같이 하기는 싫다. 오래전 함께 여행하던 중 고인과 나눴던 대화가 생각났다. 그 대화 중 한 토막을 인용하면서 고인과의 추억을 되새기는 짤막한 추도문을 써서 올렸다. 어색했다. 그래도 틀에 박힌 조의보다는 훨씬 나았다. 의미도 있었다. 적어도 내 생각에는 그랬다. 다른 이들은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모르겠지만.

아무리 한두 문장일지라도, 그렇게 추모의 글을 쓴다는 것은 꽤 많은 생각이 필요하다. 그 생각의 핵심은 아마도 고인이 어떤 사람이었느냐, 또는 적어도, 내게는 어떤 사람이었느냐 하는 것일 터이다. 그러니 부고를 받을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하기란 쉽지 않다. 그냥 인사치레만 하면 되는 사이라면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결국 나도 똑같이 판에 박힌 소리를 하게 되고 만다.


그는 어떤 사람인가? 참으로 어려운 물음이다. 나 자신도 잘 모르는데, 다른 사람을 내가 어떻게 알까? 또는 그 사람에 대하여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옳기나 한 것일까?

누군가를 안다는 것에 대한 평범하지만 독특한 경험이 있다.

우리 형제는 어려서 부모님을 잃었다. 막내인 내가 일곱 살, 맏이인 큰 누님이 열아홉이던 해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그로부터 5년 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가 부모님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마음 한 구석에 지니고 있다.

세월이 흘러 우리 형제 모두가, 부모님은 경험하지 못한, 노년에 접어들게 되었다. 어떤 계기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그래서 5남매가 매년 돌아오는 제사와 별도로 하루 날을 잡아서 아버지를 추억하는 모임을 갖기로 했다. 배우자도 제외하고 오로지 친남매만 모여서 이야기 꽃을 피우며 밤을 꼬박 지새웠다.

그 결과는?

짐작할 수도 있겠지만, 그날 우리는 다섯 사람의 아버지를 만났다. 각자 기억하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모두 달랐고, 따라서 각자의 마음속에 살아 계신 아버지의 의미도 모두 달랐다. 처음에는 깜짝 놀랐지만, 곧 수긍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추론할 수 있는 것은, 형제들이 보는 ‘나’와 내가 생각하는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겠구나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나를 알고 있는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답은 “모른다”였다. 오히려 타인이 어떤 사람인지가 더 명확하고, 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그러니 나 자신에 대하여 쓰는 것보다 다른 사람에 대한 추모의 글을 쓰는 것이 훨씬 쉽다.

“나는 누구인가?”, 또는 나는 “어떤 존재인가?”라는 물음의 답은 끝내 얻지 못하는, 또는 얻을 수 없는 것 아닐까? 인류가 이 땅에 발을 디딘 후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혹은 절해고도에서, 혹은 사람 발길 닿지 않는 숲 속에서, 혹은 깊은 동굴에서, 혹은 사막과 광야에서 오랜 시간, 또는 평생을 사색과 명상, 탐구와 수련, 단련과 고행을 통하여 그 답을 찾으려 했다.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안다면 삶이 무엇인지에서 시작하여 우주의 궁극적인 문제까지 모두가 풀릴 터이다.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는 바로 그 답을 찾아가는 고단한 여정을 기록한 소설이다.


『싯다르타』/헤르만 헤세/민음사/2002


헤르만 헤세(1877~1962)는 독일계 스위스인 소설가, 시인, 화가로 1946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독문학의 거장이다. 『수레바퀴 아래서』(1906), 『데미안』(1919), 『황야의 이리』(1927), 『나르치스와 골드문트』(1930), 『유리알 유희』(1943) 등 발표한 작품은 모두 고전 반열에 들어 있다. 그는 원래 독일인이지만, 1차 세계대전 중 극단적 애국주의에 반대하고 반전 평화주의를 주창하다 비난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고국을 버리고 1923년 스위스 국적을 취득했다. 부모는 개신교 선교사로 인도에서 사역한 바 있으며, 외조부와 외삼촌은 저명한 인도학자였다. 이런 배경에서 헤르만 헤세는 기독교 신앙의 바탕에 인도는 물론 노장 사상 등 동양의 종교와 철학까지 아우르는 폭넓은 정신세계를 구축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엄격한 신학교 기숙학교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뛰쳐나왔던 젊은 시절의 방황도 그에게는 풍성한 문학적 자산이 되었다.


『싯다르타』는 1922년 작품이다. 독일인 작가가 인도의 정신세계, 특히 불교적 시각으로 인간과 삶의 본질과 궁극의 진리를 탐구한다. ‘기독교 세례를 받은 불교적 해탈’이라고 할까…


시대적 배경은 석가모니가 이 땅에 살아있던 시기이므로 BC 6세기 경의 인도 땅이다. 싯다르타는 바라문, 즉 인도 카스트의 최상위계층인 사제 계급 브라만의 아들이다. 그는 바라문의 제의(祭儀)와 학문과 명상으로 궁극의 진리에 다다를 수 없음을 깨닫고 사문, 즉 고행, 금욕, 수행을 통해 해탈을 추구하는 자유 수행자, 즉 ‘슈라마나’의 길로 떠난다.(‘바라문’, ‘사문’ 등은 산스크리트어의 한자 음역이다.) 이는 곧 바라문인 아버지, 그리고 온 집안과 인연을 끊고, 버리고 떠난다는, 뜻이다. 절친한 친구이자 수행의 동지인 고빈다가 그와 함께 한다.


이렇게 사문의 길로 들어선 싯다르타는 순례의 길에서 고행을 통해 높은 경지에 오르지만, 영적인 갈증은 여전하다. 이때 고타마란 위대한 인물에 대한 소문이 들려온다. 고타마는 “자신의 내면에서 세상 번뇌를 극복하고 윤회의 수레바퀴를 정지시킨’, 즉 해탈한 현존하는 부처라는 것이다. 싯다르타와 고빈다는 사문의 무리에서 탈퇴하고, 고타마를 찾아간다. 그리고 그 위대한 설법을 듣고 감복한다. 고빈다는 그 자리에서 고타마의 제자로 입문한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고타마의 가르침에 한 점 ‘빈 틈’을 발견하고 다시 구도의 길을 떠나려 한다. 그가 말하는 그 ‘틈’이란 것은 무엇일까? 고타마와의 대화에서 싯다르타는 말한다.


“세존이시여 저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해탈은 가르침을 통하여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세존이시여, 당신은, 당신이 깨달은 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아무에게도 말이나 가르침으로 전달하여 주실 수도, 말하여 주실 수도 없습니다. … 세존께서 몸소 겪으셨던 것에 관한 비밀, 즉 수십만 명 가운데 혼자만 체험하셨던 그 비밀이 그 가르침 속에는 들어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 이 점이 바로 제가 편력의 길을 계속 가려는 이유입니다. 어떤 다른 가르침, 더 나은 가르침을 찾기 위하여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고타마에게서 떠난 싯다르타는 ‘깨달음’에 이른다.


‘내가 나 자신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 싯다르타가 나에게 그토록 낯설고 생판 모르는 존재로 남아 있었다는 것, 그것은 한 가지 원인, 딱 한 가지 원인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는 나를 너무 두려워하였으며, 나는 나로부터 도망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아트만을 나는 추구하였으며, 바라문을 나는 추구하였으며, 자아의 가장 내면에 있는 미지의 것에서 모든 껍질들의 핵심인 아트만, 그러니까 생명, 신적인 것, 궁극적인 것을 찾아내기 위하여, 나는 나의 자아를 산산조각 부수어 버리고 따로따로 껍질을 벗겨 내는 짓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면서 나 자신이 나한테서 없어져 버렸던 것이다.’


‘깨달음’을 얻은 싯다르타에게는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세상은 “아름다웠다.” 삼라만상이 아름다웠고, 수수께끼로 가득 차 있었다. 마침내 그는 피안(彼岸)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차안(此岸)을 바라보게 되었다. 자신의 본질, 아트만은 피안의 세계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본질 속에 있다는 것이다. 즉 우주의 본질 ‘브라흐만’과 자아의 본질 ‘아트만’은 본래 하나, 즉 ‘범아일여(梵我一如)’이다. 그리하여 싯다르타는 드디어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듣는다.

그렇게 길을 가다가 싯다르타는 강을 만난다. 이 강은 깨달음의 차원을 넘나드는 경계를 상징한다. 뱃사공은 그를 재워주고, 삯도 받지 않고 나룻배로 강을 건너게 해 준다. 그는 훗날 다시 한번 싯다르타를 만날 것이다.


예측할 수 있듯이 이제 싯다르타는 육욕과 재물과 향락과 온갖 세파에 물들어가게 된다. 아름다운 카말라를 만나 육체의 환락을 배운다. 카말라의 호화로운 정원을 드나들고, 그녀의 몸을 탐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는 머리와 수염을 단정히 하고 좋은 옷차림으로 상인 카마스와미 아래에서 ‘장사’를 하고, 크게 성공한다. 카말라나 카마스와미 둘 다 이름이 인도 신화에 나오는 사랑의 신 ‘카마’를 어근(語根)으로 해서 지어낸 이름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싯다르타의 타락을 암시하는 셈이다.

그렇게 싯다르타는 사문으로서의 삶, 바라문으로서의 삶 모두 내팽개치고 ‘카마’의 포로가 되었다. 향락을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이승의 삶을 사랑하는 데 푹 빠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한때 사문이었던 그가, 맹렬히 궁극의 진리를 탐구하고, 자아의 본질을 추구하던 그가 완전히 영혼의 소리에 귀를 닫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의 관심사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관찰하면서 그들과 같은 삶을 살고, 그러면서 그러한 삶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 구석에서는 또한 그런 삶을 경멸했다.


싯다르타는 세속적인 삶, 향락의 삶, 풍족한 삶을 누리면서도 뭔가 부족함을 느낀다. 그것은 바라문으로서, 사문으로서, 구도자로서 늘 가지고 있던 어떤 사색과 탐구의 정신, 해탈을 추구하는 깊은 소망 같은 것이 여전히 영혼을 붙들고 있어서 보통 사람들처럼 일상의 삶에 완전히 몰두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을 부러워하였는데, 자신이 그런 부류의 사람들과 닮아갈수록, 그만큼 더 그들을 부러워하였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는 없는데 그들은 가지고 있는 한 가지, 즉 그들은 자신들의 삶에 중요성을 부여할 줄 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뼛속까지는‘ 세속적인 사람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갈등 속에서 싯다르타는 도박에 몰두한다. 엄청난 판돈을 걸고 잃기도 하고 따기도 하는 그 도박은 “장사꾼들의 우상인 부(富)에 대한 경멸감”을 가장 냉소적으로 표현하는 그만의 방법이었다. 그렇게 돈에 휘둘리다 보니 싯다르타는 채무자를 들들 볶고, 거지들을 내쫓는 인색하고 추악한 인간이 되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역시 주지육림의 환락을 보낸 후 잠을 자는 동안 꿈을 꾼다. 그 꿈은 카말라가 기르는 새에 대한 것이었다. 꿈속에 싯다르타는 그 새가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는 새를 새장에서 끄집어내어 한순간 손에 올려놓고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골목 밖으로 휙 하니 던져 버렸다. 바로 그 순간 그는 갑자기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그의 마음은 쓰리도록 아파왔다. 마치 그가 이 새와 함께 자기의 내면에 있는 가치 있는 모든 것과 선(善)을 송두리째 내던져 버린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에 그의 마음은 온통 고통으로 뒤범벅이 되었다. …


그렇게 싯다르타는 “자신의 내면에 있던 어떤 것이 죽어 버리고 없다는 것을 느꼈다.” 단식 사색 기다림 등 자신의 힘이며 생명이라 할 수 있는 ‘재주’를 가장 비천하고 가장 덧없는 것을 얻기 위해 내팽개쳐 버렸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는다.

그렇게 오랜만의 사색을 통하여 자신을 성찰한 그는 자신의 집, 그 도시를 버리고 홀연히 길을 떠난다. 이때 카말라는 임신 중이었다.


싯다르타는 다시 강에 다다른다. 강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혐오스럽다. 그 얼굴에 침을 뱉는다. 그리고 죽음을 향하여 ‘떨어지려는’ 찰나 내면의 소리가 들린다. “옴”. 진언(眞言/만트라)이다(‘옴’은 “우주 만물의 근원적인 소리”이며, “옴 마니 판 메훔”이란 진언을 시작하는 첫소리이기도 하다) 그것이 자신의 입을 통하여서도 흘러나왔다. 그리고 쓰러져 깊은 잠에 빠진다. 이 잠은 과거와의 단절을 의미한다. 그리고 오래전 속세로 건너왔던 그 강을 다시 건너 ‘피안’(彼岸)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잠을 지켜준 것은 승려가 되어 순례길에 우연히 이곳을 지나던 그의 옛 친구 고빈다였다.

싯다르타는 흐르는 강물을 보고, 강의 소리를 들으면서 그냥 보고 듣는 것이 아니라 강이 해주는 이야기를 보고 듣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강물은 흐르고 또 흐르며, 끊임없이 흐르지만, 언제나 거기에 존재하며, 언제 어느 때고 항상 동일한 것이면서도 매 순간마다 새롭다!


그리고 늙은 뱃사공을 만난다. 그는 과거 사문의 길로 들어섰을 때 삯을 받지 않고 건너 주었던 바로 그 사공이다. 그는 말한다.


나는 수많은 사람들, 수천의 사람들을 건네다 주었지요. 그들에게는 나의 강이 단지 여행하는 데 장애물에 지나지 않았어요. 그들이 여행하는 목적은 가지가지였지요. … 뱃사공은 그들이 장애물을 신속하게 건널 수 있도록 해 주기 위해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들 수천 명 가운데 몇 사람에게만은, 아주 몇 안 되는 너더댓 명의 사람에게만은, 이 강이 장애물 노릇 하는 것을 그만두었던 셈인데, 그 까닭은 그들이 이 강의 소리를 들었으며, 그들이 이 강물 소리에 귀를 기울였기 때문이에요. 이 강은 나에게 성스러운 것이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도 성스러운 것이 되었지요.


싯다르타는 바로 이 뱃사공 바주데바의 제안에 따라 그의 오두막에 머물게 된다. 바주데바는 싯다르타의 모든 말을 주의 깊게 들어준다. 그는 싯다르타의 말을 들어줌으로써 그의 스승이 된다. 그렇게 강의 이야기를 듣고, 뱃사공 바주데바에게 배우며 싯다르타는 다시 한번 깨달음에 다다랐다.

그러나 시험은 끝나지 않았다. 싯다르타가 떠난 후 카말라는 아들을 낳고 불교에 귀의했다. 카말라는 고타마의 입적 소식을 듣고 아들을 데리고 순례길에 나서 나루터에 왔으나 독사에 물려 죽게 되었다. 싯다르타는 뜻하지 않게 아들을 얻게 된 것이다. 이 아들은 싯다르타의 깨달음을 무위로 돌려버린다. 아들에 대한 사랑과 기대가 모든 것을 집어삼켜버린 것이다. 그러나 아들에게 그것은 족쇄일 뿐이다.


그는 선량하고 마음씨 좋고 부드러운 사람이었으며, 어쩌면 매우 경건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성자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그 소년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특성이 아니었다. 자기를 그 초라한 오두막 안에 가두어 놓고 있는 이 아버지라는 사람이 소년에게는 지겨운 존재였다.


아들은 싯다르타로부터 도망치고, 애타게 아들을 찾던 싯다르타에게 뱃사공 바주데바는 깨달음을 준다.


누가 사문인 싯다르타를 윤회로부터, 죄업으로부터, 탐욕으로부터, 어리석음으로부터 지켜 주었던가요? 아버지의 경건함, 스승들의 훈계, 자신의 자식, 자신의 구도 행위가 그를 지켜 줄 수 있었던가요? 어느 아버지, 어느 스승이 지켜 서서 그를 말릴 수가 있었겠어요?


그렇게 아들을 잃은 후에야 바주데바의 가르침으로 싯다르타는 다시 한번 깨달음을 얻는다. 강으로부터 배우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함께 합해져서 사건의 강을 이루고 있었으며, 생명의 음악을 이루고 있었다. … 그 수천의 소리가 어우러진 위대한 노래는 단 한 개의 말로 이루어지는 것이었으니, 그것은 바로 완성이라는 의미의 옴이라는 말이었다.


바주데바는 숲으로 떠나고, 싯다르타는 바주데바가 완성자이며 신이었고 스승이었음을 깨닫는다. 이제 싯다르타는 해탈에 이르렀을까? 싯다르타는 다시 만난 옛 친구 고빈다에게 ‘깨달음’에 대하여 말한다.


구한다는 것은 하나의 목표를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찾아낸다는 것은 자유로운 상태, 열려 있는 상태, 아무 목표도 갖고 있지 않음을 뜻합니다. 스님, 당신은 어쩌면 실제로 구도자일 수도 있겠군요. 목표에 급급한 나머지 바로 당신의 눈앞에 있는 많은 것을 보지 못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덧붙인다.


지혜라는 것은 남에게 전달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이네. 지혜란 아무리 현인이 전달하더라도 일단 전달되면 언제나 바보 같은 소리로 들리는 법이야.”


싯다르타는 바라문으로서, 사문으로서, 그리고 ‘돌아온 탕아’로서 궁극의 진리, 해탈이라는 목표를 끊임없이 추구하고 모색해 왔다. 그러나 그 목표를 내던져버리고, 끊임없이 흘러 늘 새롭지만, 항상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강물을 보고, 강물의 이야기를 듣고 마침내 깨달음에 도달했다. 목표를 추구하지 않을 때 비로소 그 목표가 이뤄진 셈이다.

싯다르타는 특히 2가지를 강조한다. 그것은 시간과 말이다.

강물이 흘러 늘 새로우면서도 늘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과 같이 시간이 흘러 아기는 노인이 되고 죽음을 맞지만, 시간을 빼고 보면 아기나 노인은 변함없는 하나의 동일한 개체일 뿐이다. 모든 것이 변하는 것 같지만, 본질은 그대로다. 싯다르타는 말한다.


일체의 번뇌의 근원이 시간 아니고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자신을 괴롭히는 것도, 두려워하는 것도 그 근원은 모두 시간 아니고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그렇다면 인간이 그 시간이라는 것을 극복하는 즉시, 인간이 그 시간이라는 것을 없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즉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힘겨운 일과 모든 적대감이 제거되고 극복되는 것이 아닌가


말에 대하여서라면 싯다르타는 일찍이 고타마를 만났을 때 깨달음을 얻었을 때 ‘겪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가르침, 즉 말이 아니라 실체를 요구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싯다르타는 본질을 꿰뚫어 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마지막 깨달음을 얻은 후 옛 친구 고빈다를 만났을 때 한 말은 고타마에게 했던 말과 일맥상통한다.


말이란 신비로운 참뜻을 훼손해 버리는 법일세. … 우리가 열반이라고 부르는 것,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아. 다만 열반이라는 단어만이 존재할 뿐이지.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다시 읽었다. 처음 읽었던 고등학교 때의 감상은 희미하다. 고빈다라는 친구의 이름과 사문으로서 순례의 길에 나섰던 것 정도가 기억에 남아있었다. 그리고 전반적인 감상은 약간의 실망이었던 것 같다.


똑똑하고 그래서 자신의 앎과 깨달음에 자신만만한 싯다르타, 패기 있게 사문의 길로 들어서는 모습, 고타마를 만나 대화하는 약간은 건방진 모습, 카말라를 만나 환락의 세계로 빠져들고, 장사로 성공해 호화로운 삶을 사는 ‘타락’, 뱃사공과 강의 이야기, 아들의 출현에 따른 ‘흔들림’, 그리고 마침내 깨달음… 당시 느낌은 “전형적인 불교 설화”라는 것이었고, 그래서 뭔가 틀에 박힌 스토리라는 인상이 강했던 것 같다. 어쩌면 불교적 사고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그렇게 느끼기 쉽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유럽 사람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이겠지…” 아마 이런 생각도 했던 것 같다.


세월이 흘러 다시 읽은 지금도 ‘전형적인 불교 설화’ 스타일 같다는 인상은 그대로다. 달라진 점은 헤르만 헤세 특유의 시적인 표현을 하나씩 음미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유의 흐름은, 내가 그 같은 깨달음에 도달하지는 못하지만,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그리고 그 진리가 주는 기쁨이 어떤 것인지는 조금씩 짐작할 수 있다.

시간과 말에 대한 생각이 바로 그런 부분이다.


몇 년 전부터 나는 ‘영원’이란 시간의 무게에 억눌려 있다. 우주를 이야기할 때 시간 단위는 억 년, 수십억 년이다. 우리의 일생은 지구의 나이에 비하면 찰나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지구의 나이도 영원에 비하면? 존재하지 않는 것과도 같은 한 순간일 뿐 아닌가! 도대체 ‘영원’이란 어떤 것일까?

그렇다. 영원은 순간이다. 시간이 직선으로 흐른다면 영원은 다다를 수 없는 저 피안의 어딘가에 있다. 그러나 시간이 순환한다면 영원은 바로 뒤에 있는 순간이다. 그 순간이란 현재가 아니다. 시간은 끊임없이 흐르는 것이므로 현재란 없다. 현재라고 인식하는 순간 과거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싯다르타가 흐르는 강물에서 순간을 보고, 영원을 보고, 과거와 미래를 본 것이 바로 그것이다. 시간이 우리를 ‘번뇌’로 붙잡아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간의 족쇄를 벗어나는 것이 해탈이다. 싯다르타의 깨달음을 ‘내 식으로’ 해석해 본 것이다.


시간이 그러하므로 삶은 지금 이 순간이 소중하고, 마지막 한 순간까지 소중하다.


말이란 것이 우리의 생각을 담는 그릇으로는 터무니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은 굳이 지적할 필요도 없다. 하물며 진리를 말이란 그릇에 어떻게 담는다는 말인가? 그래서 싯다르타는 뱃사공 바주데바의 ‘늙은 동안’(童顔)을 바라본다. ‘염화시중의 미소’란 것이 바로 그런 것 아니겠는가? “지혜는 가르칠 수 없다”는 싯다르타의 말은 그래서 진리다.


작가는 이 책 주인공의 이름을 왜 굳이 ‘싯다르타’라고 했을까? 우리가 알고 있듯이 싯다르타는 석가모니의 이름이다. 고타마 싯다르타. 나는 생각한다. 작가는 고타마와 싯다르타를 각기 다른 독립된 캐릭터로 그림으로써 석가모니의 사유의 내면을 드러내려 한 것이 아닐까? 덧붙여서 그 내면을 비추는 거울로서 또 하나의 캐릭터를 만들어내야 했고, 그것이 뱃사공 바주데바가 아니었을까? 그렇게 보면 고타마-싯다르타-바주데바로 ‘삼위일체’의 ‘완성자’가 그려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3개의 각기 다른 방향에서 삶과 죽음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모두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알지만, 자신이 죽는다는 생각은 좀처럼 하지 않고 산다. 세상을 두루 살피다 보면 문득 지금 ‘나의 가지런한 삶’이 얼마나 깨지기 쉬운 것인지를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랄 때가 있다. 우크라이나나 가자지구를 보라. ‘그 일’이 벌어지기 하루 전, 또는 몇 시간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모두 평범한 일상을 살았다. 모든 것은 가지런했다. 약속한 사람은 만나게 될 터였고, 집에 가면 따뜻한 저녁 식사가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그리고 사람들은 전혀 다른 일상을 살게 되었다.

꼭 전쟁이나 천재지변일 필요도 없다. 배우자가 어느 날 쓰러져 불치병 진단을 받거나, 가족 중 누군가 교통사고를 당할 수도 있다. 그 순간 삶은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것으로 바뀌고 만다.

어느 날 길을 가다가 발을 헛디뎌 넘어져 발에 골절상을 입었다. 이런 사소한 일마저도 일상을 완전히 바꾼다. 수술을 받고 휠체어 신세를 지는 동안, 죽음도 이렇게 올 수가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발 골절상이야 시간이 지나면 회복되겠지만, 죽음은 회복되지 않는다.

아프리카에서도, 인도에서도, 발칸 반도에서도 삶은 그렇게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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