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신의 나라’의 인간

신화와 욕망이 끝없는 순례의 길

by 제이슨


『델리』/쿠쉬완트 싱/아시아/2014

『지복의 성자』/아룬다티 로이/문학동네/2020


똥 탄트라 중간자


비행기 창 밖으로 활주로가 보인다. 그 가장자리에 무슨 점 같은 것이 죽 늘어서 있다. 자세히 보니 쪼그리고 앉은 사람들이다. 이 지역을 잘 아는 사람의 설명은 모두 ‘똥을 누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오래 전 네팔 여행 때 이야기다. 요즘은 어떤 지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방콕까지 가서 타이항공편으로 가는 것이 가장 편리했다. 방콕발 카트만두행 비행기는 직항이 아니라 인도 캘커타를 경유했다. 그런데 캘커타 공항에서는 내리지 못하게 했다. 일부 승객들이 내리고 새로운 승객이 타고, 청소까지 한 후 비행기가 다시 출발할 때까지 꼼짝 없이 자리에 앉아 기다려야 했다. 심지어 탑승구에는 기관단총을 든 병사가 양쪽을 지키고 있었다. 그렇게 하릴없이 창밖을 보다가 그 어처구니없는 광경을 목격한 것이다.

내가 처음 본 인도는 그랬다.(지금까지 인도는 가보지 못했다)


네팔은 힌두교권으로 인도 분위기를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강가에서 시신을 불에 태우는 화장 문화도 같다. 가난한 늙은 순례자는 발목에 은 발찌를 차고 있다. 자신이 죽었을 때 화장할 장작 값으로 쓰라는 뜻이다. 그 은 발찌는 그의 전재산이다. 무연고자가 죽으면, 정부에서 장작 2개가 지원된다고 했다.(지금은 어떤 지 모르겠다) 시신을 제대로 태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시신이 잘 타지 않으면 망자는 좋은 곳으로 가지 못한다. 빈자는 자신의 몸을 태워줄 장작 값도 모자라는데, 부자의 저택은 담장 한 면 길이만 100미터가 넘었다. 뜰에는 큰 연못이 있고, 거기서 작은 보트를 타고 낚시를 즐길 정도였다. 2025년 여름을 달구었던 네팔의 젠지(GenZ)혁명은 바로 그런 빈부격차와 그것을 초래한 부정부패 때문이었다.

카트만두행 비행기의 일등석은 인도인들의 무대였다. 가서 보니 카트만두에 카지노가 있었고, 그 일등석의 인도인들 상당수는 카지노의 단골 고객이었다. 인도 부자들은 네팔 부자와는 또 차원이 다르다.




또 한가지 인상적인 것은 힌두교 사원에서 본 광경이다.

하도 오래 전 일이라 그 사원 이름을 잊어버렸는데, AI를 통해 알아낸 것은 카트만두 더르바르 광장의 자간나트 사원(Jagannath Temple)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실제 이미지를 검색해보고 그곳이 맞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사원의 특징은 지붕을 떠받치는 버팀목(‘툰달/tundal’이라고 하는 모양이다.)에 노골적인 성행위 장면이 조각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것도 한두개가 아니라 각기 다른 다양한 체위의 장면으로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 너무 놀랐다. 사람들이 힌두교 신상과 같은 스타일로 새겨져 있어서 에로틱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지만, 너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어 쳐다보기가 민망했다.

그것은 탄트라, 즉 밀교 경전, 예컨대 ‘카마수트라’ 같은 곳에 나오는 각종 체위를 새긴 것이다. ‘탄트라’는 산스크리트로 ‘직물’, ‘실타래’, 연결 등을 을 뜻하는 것으로 우주의 원리와 인간 내면의 에너지를 ‘짜 맞추는’ 수행체계를 말한다. 5~7세기 인도 북부·네팔 지역을 중심으로 확산되었다고 한다. 남녀 간의 결합을 수행의 한 수단으로 삼는 경우, 그 핵심은 샥티(Shakti), 즉 여성적 창조 에너지를 깨워 남성 원리와 결합시켜 해탈(moksha)에 이르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때 남성은 ‘의식’(意識)을, 여성은 ‘에너지’를 상징하며, 이렇게 둘이 결합함으로써 절대적 경지 – 깨달음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행위는 단순한 육체적 행위가 아니라 하나의 수행 방식이며 우주적 결합의 은유라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탄트라의 전부가 아님은 말할 필요고 없으리라.

설명은 문자적으로는 대충 알아들을 수 있는 것 같지만, 솔직히 이해는 되지 않는다. 지금 기억에 당시 네팔을 다녀온 후 관련 책자를 좀 찾아봤던 것 같기는 하다. 그러나 당초 ‘수행’이라는 것에는 큰 관심도 취미도 없었던 터라 이해도 못했을 터이고, 따라서 별 기억도 없다. 다만 국내 어떤 작가의 소설은 내용이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그것은 이런 탄트라에 관심을 갖게 된 주인공이 인도에 가서 동굴에서 수행자를 만나 수행을 배우면서 행한 경험담 형식이었다. 밤을 보내면서 아름다운 법열의 경지를 보았지만, 아침에 깨어보니 아무 것도 없는 초라한 동굴이더라는 것이다. 그것이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인가…

그러므로 카트만두 힌두교 사원의 그 ‘망측한’ 조각은 사실은, 절이나 교회에 불경, 성경 등의 내용이나 성자의 생애 등을 표현한 벽화나 조각이 있는 것처럼, 형상화한 탄트라 경전인 것이다.




동아프리카의 문학 작품에는 인도인 묘사가 종종 나온다. 특히 2021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탄자니아 출신 작가 압둘라자크 구르나의 작품에는 거의 빠지지 않고 인도인이 언급된다. 그 내용은 별로 좋지는 않다. 식민지배 하에서 제국주의자들의 하급 관리자 역할을 하거나 상권을 장악하고 ‘돈을 뜯어 내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들이 백인을 대신해 우리의 주머니를 털었다”는 것이다.

인도와 아프리카 사이의 바다는 인도양이다. 왜 인도양일까? 얼핏 생각하면 인도의 영향력이 그만큼 강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명칭의 유래는 어떤 지 몰라도 이곳이 인도의 바다라는 사실은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인도인들이 많이 진출했고, 교역도 활발했기 때문이다. 특히 아프리카가 유럽 국가들의 식민지가 되면서 인도의 영향은 더욱 커졌다.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 경영 모판이었다. 모든 통치 제도와 시스템이 인도에서 만들어지고 시험된 다음 다른 식민지에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인도인들은 영국인들에게 ‘믿을 수 있는 중간자’였다. 이렇게 아프리카 식민지에 세무 회계 상업 등의 실무 또는 실무 책임자로 인도인들이 활동하게 된 것이었다. 인도는 제국주의의 희생자인 동시에 “제국의 언어를 말하는 중간자”가 되었고, 그리하여 아프리카인들에게는 유럽인 대신의 ‘욕받이’가 된 것이다.

그래서 아프리카 다음 행선지는 인도가 된다.

똥과 탄트라, 그리고 ‘중간자’ 또는 ‘욕받이’…. 이 3가지는 내게 인도를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가 되었다.


피와 땀과 정액


“델리는 천 년의 정욕과 살육이 쌓인 도시다.” 델리의 이야기는 곧 인도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피와 땀과 ‘정액’의 퇴적물 위에 세워진 도시라고 하는 이곳의 정복자와 기록자, 그리고 희생자를 통해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보자.


『델리』/쿠쉬완트 싱/아시아/2014


쿠쉬완트 싱(1915~2014)은 인도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사람으로 변호사, 언론인, TV 댜큐멘터리 진행자, 논픽션 작가, 상원의원 등 다양한 경력의 소유자로 99세까지 장수한 인물이다. 소설로는 『파키스탄 행 열차』, 『나이팅게일의 노래는 듣지 않으리』, 『델리』, 『여인들의 회사』 등이 있고, 걸작으로 꼽히는 『시크교도의 역사』 등 시크교 관련 저작도 많이 남겼다. 이름에서 보듯이 그는 시크교도다. 쿠쉬완트 싱의 인도에서의 사회적 지위와 인도의 시크교도 문제를 상징적으로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그는 1984년 정부가 시크교의 성지인 황금사원을 공격해 무력진압한 데 대한 항의의 표시로 1974년 받았던 파드마 부샨’(Padma Bhushan/’연꽃 훈장’이라는 뜻) 상을 반납했지만, 인도 정부가 2007년 다시 수여한 것이다. ‘파드마 부샨’상이란 인도공화국의 3번째 높은 민간 훈장이다.


『델리』는 ‘걸쭉한’ 소설이다. 표현이 아주 상스럽지는 않지만, 욕망이 여과 없이 꿈틀거린다. 델리라는 도시 자체를 ‘살아있는 육체’로 그리고 있는 셈이다. 무굴제국에서 영국 식민지를 거쳐 독립과 분열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인물과 ‘성욕’의 은유로 엮었다. 그래서 이 책에서 델리를 상징하는 주요 인물은 ‘히즈라’, 즉 남녀의 성을 함께 가진 ‘남녀추니’이면서 별로 매력도 없고 말씨나 태도도 ‘추잡한’ 바그마티라는 매춘부다.

화자는 언론인이면서 고급 관광안내인 역할도 하는 중년의 시크교도 남성이다. 그는 호색한이다. 바그마티는 그의 정부(情婦)다. 그는 의뢰를 받은 고객을 대상으로 델리의 유적지를 다니면서 역사를 설파한다. 고객은 공교롭게도 모두 여성이다. 그는 약간의 의무감(?) 마저 느끼면서 늘 상대에게 ‘지분거리고’, 가끔 성관계를 맺는데 성공하기도 한다. 여기에 역사적 인물의 회고담이 한 장(章)씩 삽입되고, 하나의 에피소드가 끝나면 늘 바그마티에게로 돌아온다. 그에게는 역사의 흐름은 성행위 같은 것이고, 그래서 역사는 늘 델리로 돌아오며, 그와 같이 화자 역시 늘 바그마티에게로 돌아온다. 그러므로 바그마티는 델리다. 그리고 늘 “델리까지는 길이 멀다.”

소설은 첫 문장부터 델리를 명확하게 정의한다.


나는 델리로 돌아온다. 외국에서 사창가를 헤매고 돌아다니다 진력이 나면 내 애인 바그마티에게 돌아오듯…… 델리와 바그마티 사이에는 공통점이 매우 많다. 오랫동안 난폭한 사람들에게서 시달림을 받아온 델리 사람들은 역겨우리만큼 추한 가면 밑에 마음 홀리는 매력을 숨길 줄 알게 되었다. 그들이, 나도 그 가운데 하나지만, 자신의 참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오로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만이다. ….. 델리 사람들은 누구에게도 잘 보이려고 애를 쓰지 않는다. 그들은 어디에서나 가래와 시뻘건 베텔즙을 뱉어내고, 변의를 느끼면 아무 데서나 일을 보고, 요란스럽게 떠들어대며 상스러운 욕지거리로 친밀감을 표시하고, 이야기를 하는 중에도 사타구니를 긁적거린다. ….. 하지만 장담하건데, 그것은 사람들이 모기나 각다귀, 그리고 피를 빠는 다른 해충들을 쫓기 위해 바르는 냄새 고약한 기름 같은 표면적인 것일 뿐이다. 델리가 다르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 당신이 해야 할 일은 그 도시에 대한 소속감을 키우고 바그마티 같은 사람에게 애착을 갖는 것이다. 그러면 델리의 대리석 궁전들 위로 드리워진 하늘이 쪽빛으로 변하고, 둥근 지붕을 인 사원들의 가느다란 첨탑이 무지개에 걸리고, 땅은 향기로운 뿌리와 자스민과 마울사리의 소박한 향기를 발산한다.


이 작품이 다루는 역사는 대략 델리를 중심으로 한 인도 북서부 ‘힌두스탄’이 이슬람 통치에 들어간 시기(맘루크 왕조)부터 인도의 독립 후 인디라 간디 총리 암살까지다. 연대기 스타일이지만, 시대를 성큼성큼 뛰어넘으면서 역사 상의 실존 인물이나 작가가 창조한 인물을 한 사람씩 내세워 그 단면을 묘사함으로써 전체 역사를 관통하는 독특한 방식을 사용한다. 그러므로 일관된 스토리가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의 독립된 에피소드로 구성돼 있다.


바그마티-호이티 토이티-무사디 랄

첫 에피소드는 조금 의아한 느낌이다. 화자인 ‘나’가 우연히 같은 비행기로 델리에 도착한 영국 여왕의 사촌으로 고고학자인 호이티 토이티란 여성의 유적지 탐사에 안내자로 동행하는 것이다. 여러 유적지에서 역사를 설명하지만, 이 여성을 첫 에피소드의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은 사실 그 설명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녀에 대한 ‘나’의 첫 인상을 묘사한데서 작가의 의도를 알 수 있다.


…. 오십 대 중반에 조그맣고(150센티가 약간 넘는) 깡마른 데다 가슴은 절벽이고 엉덩이는 빈약해서 성적 매력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보려도 없는 여자. 누런 머리칼, 거칠고 불그죽죽한 피부를 온통 뒤덮은 누런 솜털, 턱 양옆의 성형수술을 받은 칼자국, 음유시인의 말을 빌리자면 그녀는 ‘그을린 골동품과 더불어 쪼그라든’ 바로 그런 여자다.


‘그을린 골동품과 더불어 쪼그라든’이란 수식어는 곧 영국 식민주의의 형해화된 잔재다. 그것은 델리를 지배했던, 달리 말하면 파괴했던 지배자들을 상징한다. ‘남녀추니’ 바그마티가 델리를 ‘살아낸 자들’, 즉 정신적 ‘히즈라’ 또는 ‘혼종’의 표상인 점과 대비된다. 그녀의 관광은 헛되이 되돌아보는, 식민주의의 재연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무사디 랄’이라는 13세기 술탄국의 하급 관리(서기)의 일생이 2번째 에피소드로 이어진다. 이는 지배자가 아닌 제국 내부로부터의 시선이다. 말하자면 기록을 통하여 델리를 유지 관리해 온 사람이다.

그리고 다시 바그마티로 돌아온다. 그는 델리를 실제 삶으로 ‘살아낸’ ‘혼종의’ 민중이다. 바그마티-호이티 토이티-무사디 랄의 구도는 델리 역사를 ‘정복자와 기록자와 생존자’의 삼중주로 이 작품의 끝까지 이어지는 순환 구조를 이룬다. 이 구조 속에서 정복자는 계속 바뀌고, ‘기록자’는 델리의 누적되는 토대로 남으며, 바그마티는 변함없이 되돌아온다. 화자인 ‘나’는 이 600년간의 순환의 역사를 보여주는 ‘관광 안내인’이다.


정복자 – 지배자 - 파괴자

델리의 정복자는 파괴자이다. 작가는 그 역사를 14세기 ‘절름발이 티무르’에서 시작해서 무굴 제국의 샤 자한과 아우랑제브, 페르샤의 정복자 나디르 샤, 동인도회사와 대영제국으로 이어진다.


‘타이무르의 비망록’은 14세기 말 델리를 침공한 티무르의 스토리를 비망록 형식으로 재창조한 것이다.(실제 티무르의 비망록도 존재한다.) 티무르는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징기스칸의 계승자를 자처하면서 제국을 일군 정복자다. 그는 젊은 시절 전투(일설에는 사냥)에서 다리 부상을 입어 심하게 다리를 저는, 그래서 ‘절름발이’ 티무르라고 불리는 사람이다. 비망록은 스스로 ‘신의 뜻’을 구현하는 선의의 지배자로 미화하면서 델리 정복을 정당화한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은 그의 목적이 약탈과 힘의 과시일 뿐임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티무르의 의지는, 기실은 원초적인 정욕과 다름없는 것이다.


이런 원초적 욕망은 17세기 무굴 제국의 샤 자한과 그의 아들 아우랑제브도 크게 다를 바 없고, 18세기 델리에 쳐들어와 학살과 약탈을 자행한 페르시아의 나디르 샤에 이르러 절정에 달한다. 타지마할을 건설해 사랑의 화신으로 칭송되는 샤 자한이나 독실한 신앙으로 이슬람의 순수성을 크게 고양했다는 아우랑제브 역시 그 이면에는 원초적 욕망이 들끓고 있을 따름이다.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 자신의 순수함을 강변하지만, 그것은 잔혹한 왕위쟁탈전, 탄압, 학살, 약탈 등을 감추는 겉치레일 따름이다. 작가는 이들 군주들의 1인칭 기록을 이런 잔혹한 파괴성과는 정반대로 패러디함으로써 더욱 적나라하게 고발한다. 그러므로 델리의 화려한 건축은 파괴의 또다른 표현이다.

이들은 와서, 욕망을 채우고, 간다. 그래서 늘 “델리까지는 길이 멀다.”


기록자 또는 생존자?

무사디 랄의 후계자는 시인 메르 따끼 메르, 세포이 항쟁에서 동인도회사 편에 서서 싸운 시크 교도 니할 싱, 영국의 델리 신도시 건설 과정에서 부를 축적하고 신분 상승까지 이룩한 ‘건설자들’ 등이다. 여기에 스스로를 ‘불상놈’이라고 부르는 ‘불가촉천민’, 독립 후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되면서 델리로 쫓겨 들어온 힌두교도 람 라카 등도 있다.

무사디 랄은 술탄국의 하급 서기로 힌두교도이면서 이슬람교도처럼 살고 예언자로 추앙 받는 수피 수도사 크와자 니자무딘을 따른다. 바그마티가 ‘육체적 혼종’이라면 무사디 랄은 ‘정신적 혼종’이다. 시대와 환경은 그로 하여금 혼종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이런 혼종성은 계속 이어진다. 그것은 근대로 올수록 복잡한 양상을 띈다. 무사디 랄은 말한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힌두교도인지 이슬람교도인지를 물으면 우리는 두가지 다라고 대답했다. 니자무딘은 우리에게 이슬람교도들의 편협이라는 땡볕과 힌두교도들의 경멸이라는 폭우를 막아주는 우산이었다…..(p.108)


시인 메르 따끼는 탁월한 시로 아그라에서 명성을 날리고, 부잣집 마나님의 정부(情夫)가 된다. 그는 그녀를 사랑하고 잊지 못하지만, 그녀에게 그는 일시적인 환락의 노리개였을 뿐이다. 그렇게 ‘폐기 처분’ 되는 수단으로 그는 아그라에서 델리로 보내진다. 델리에서도 시인으로 성공은 하지만, 나디르 샤의 침공으로 델리는 초토화되고 그는 후원자를 잃는다. 이후에도 왕위 쟁탈전, 또다른 침공 등으로 고생고생한 끝에 초라한 생을 마무리한다.


…. 내 삶에는 두 연인, 카마룬니사와 델리가 있었으니, 하나는 나를 파멸시켰고, 다른 하나는 나를 위하여 파멸되었다. 내게는 살 이유가 아무 것도 없다. 그 두 연인을 위해 나는 이 시를 짓는다.
내가 죽은 뒤에 눈을 뜨면,
내 유일한 소망은 그대의 얼굴을 다시 보는 것.
그대가 거처를 둔 곳은 내 마음속이었으니,
어디에서 이 약탈당한 곳을 볼 눈들을 찾을거나?


불가촉천민은 “하수구치고 변소 푸는 일”을 하다가 먹고 살기 힘들어서 급기야 시체 나르는 일을 한다. 그는 시크교도인 양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는다. 그러다가 탄압을 받아 참수형으로 처형된 구루의 시신을 수습하는 ‘중차대한’ 일을 수행함으로써 존재의 이유를 찾는다. 시크교도로서 델리의 당당한 시민, 생존자로 거듭나는 것이다.


세포이 항쟁의 장(章)에서는 지배자, 기록자, 생존자 또는 피해자의 경계가 흐려지고 뒤섞인다. ‘세포이’란 영국 정부 대신 인도를 통치하던 동인도회사가 고용한 인도인 용병을 지칭하는 말이다. 세포이 항쟁은 이들 세포이가 1857년 일으킨 반란이다. 직접적인 원인은 소나 돼지 고기를 금하는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금기를 깨뜨린 것이다. 즉 종이 탄약통을 입으로 물어 뜯어야 하는데, 거기에 쇠기름, 돼지기름이 칠해져 있다는 것이다. 그 이면에는 영국 통치의 경제적 정치적 모순이 드러났고, 더 직접적으로는 세포이의 처우에 대한 불만이 커진 탓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니할 싱은 시크교도이면서 세포이 항쟁을 진압하는 동인도회사 군대에 속해 싸운다. 그는 정복자의 하수인이고 기록자이며 동시에 생존자다.


이런 양상은 근대로 오면서 더욱 두드러진다. ‘건설자들’ 장(章)은 영국이 식민지 수도를 캘커타에서 델리로 옮기면서 신도시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부를 축적한 건설업자 이야기다. 아버지와 아들은 탁월한 수완으로 뇌물과 아부를 적절하게 구사하면서 공사를 따내고 성공적으로 건설하면서 식민지배의 충직한 협력자가 되어 기사 작위까지 받는다. 따라서 당연히 영국의 지배에 호의적이고, 독립을 추구하는 민족주의 진영에 비판적이다. 그들은 이렇게 항변한다.


어쩌면 내가 시대와 조화를 이루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영국의 통치가 인도에 유리하다고 믿었다. 우리 인도인들은 모든 사회에 공평무사한 행정을 편 적도 없었고, 또 앞으로도 펴지 못할 것이었다. …. “영국인들이 오기 전까지 인도에 정의라고는 없었소.” …. ”그들의 영향이 사라지고 나면 인도에 정의라고는 없을거요. 그들은 당신들에게 비판할 자유를 주었고, 당신네가 폭력에 호소할 때만 행동을 취했소. 그들에게 반대해서 선동을 교사했던 간디나 네루 같은 사람들을 참아줄 사람들로 영국인 말고 다른 종족을 생각할 수 있소?”(p.515, 520)


‘쫒겨난 사람들’ 장(章)에서는 파키스탄에서 쫒겨 온 람 라카는 힌두 민족주의 조직인 RSS(라슈트리야 스와얌세박 상/ Rashtriya Swayamsevak Sangh/’민족봉사단’ 정도의 뜻. 현 나렌드라 모디 총리는 이 조직 출신이며, 따라서 현 인도 집권당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배후 세력이다)에 들어가 이슬람교도를 공격하는 폭동을 일으키고 간디 암살 사건을 목격한다.


그리고 마침내 화자 자신의 무기력한 모습을 폭로하면서 소설을 끝맺는다. 인디라 간디 암살 후 힌두교도들이 폭동을 일으켜 시크교도들을 학살하는 극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하인’ 역할을 해오던 부드 싱이 늙고 병든 몸으로 젊은 힌두교도 여러 명에게 맞서 조롱 당하면서 죽어가는 모습을 집 안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1984년 시크교의 성지인 황금사원 침공사건 당시의 시크교도로서의 작가 자신의 모습을 처절하게 재연하는 것이다. 실제 황금사원 사건 후 그는 인도 상원의원 직을 사퇴하고 이 작품을 썼다.

황금사원 사건이란 1984년 시크교 과격파가 이 사원을 점거하고 분리 독립을 요구하자 당시 인디라 간디 총리의 명령으로 군이 투입돼 무력 진압한 사건이다. 성지에서 벌어진 살륙으로 시크교도의 반발은 극에 달했고, 이것이 6개월 뒤 인디라 간디 암살의 원인이 되었으며 반시크교 폭동으로 이어졌다.


“델리까지는 길이 멀다.”

It is a long way to Delhi.

이것은 주요 등장 인물의 입을 빌려 되풀이되는 이 작품의 키워드 같은 문장이다.

즉 델리는 ‘목적지’로 제시되고 이 작품은 델리로 가는 여정을 그린 순례의 기록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말을 반복함으로써 목적지에 도착은 했으되 도달하지는 못한 ‘불완전한 도달’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정복자들에게 델리는 종착지이지만, 그들은 끝내 소유하지 못하고 스쳐 지나갈 뿐이다. 그 피와 땀과 ‘정액’이 쌓이고 쌓인 퇴적층 위에 델리는 마치 ‘도달 불가능한 이상’처럼 서 있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인도의 역사, 종교, 정체성의 이야기다.


작가는 델리를 ‘딜리’(Dilli)로 표기하기도 한다. 그것은 특정 시기의 호칭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 발음에도 의미가 있을 수 있다. ‘딜리’의 어근이 ‘딜’(Dil, हिंदी ), 즉 ‘심장’, ‘마음’이란 뜻임을 생각하면 그렇다. 그러므로 ‘델리로 가는 길’은 곧 “마음(heart)으로 가는 길”이며, ‘길이 멀다’는 것은 “진정한 델리(heart of India)에 도달하기까지는 아직 멀었다”는 뜻이 된다는 것이다.

이 구절을 반복함으로써 작가가 하고자 하는 말은 화합과 용서까지는 길이 멀고, 궁극적으로 ’인도라는 이름의 완성’까지는 먼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해 본다. 소설의 맺음말은 “진리를 위해 돌진!”이다. 이 말은 시크교의 ‘성전 구호’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인디라 간디 총리 암살 후 반시크교도 폭동에서 힌두교도 청년들이 시크교도인 화자의 아파트 경비원 부드 싱을 살해하고 조롱하면서 내뱉은 말이다.

작가는 시크교도지만 과격주의에는 비판적인 입장이다. 시크교는 화합의 종교다. 이슬람과 힌두교의 화합 또는 통합을 부르짖은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또 하나의 대립항이 되고 말았다. “진리를 위해 돌진”이란 구호도 마찬가지다. 본래의 의미는 폭력이 아니라 진리의 궁극적인 승리를 말하는 것이지만, 결국 종파, 종족의 승리 또는 복수를 위한 싸움의 구호로 변질된 것이다. 그것을 힌두교도의 입을 통한 조롱으로 묘사한 것은 “델리까지는 먼 길”이 남았음을 가장 고통스럽게 표현한 것이 아닐까?


히즈라의 도시, 히즈라의 나라


『지복의 성자』/아룬다티 로이/문학동네/2020


『델리』가 역사적 인물과 ‘성욕’의 은유로 인도를 해부했다면, 이 작품은 분열된 현실을 통해 국가의 신화를 해체하고 작은 이상향을 건설함으로써 꿈을 이야기한다.


아룬다티 로이는 현대 인도를 대표하는 세계적 작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언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1997년 첫 소설 『작은 것들의 신』을 발표해 곧바로 부커상을 수상했고, 20년 만에 두번째 내놓은 이 작품, 『지복의 성자』도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부커상 후보에 올랐기 때문이다. 건축을 전공하고, 졸업 후 국립도시계획연구소에서 일하던 중 독립영화 감독 프라디프 크리셴을 만나 그의 영화에 주인공으로 출연한 인연으로 결혼에까지 이르렀다. 이후 남편과 영화 작업을 하는 한편 사회운동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펼친다. 그 과정에서 인도 사회는 물론 세계의 여러 이슈에 대한 다양한 저작 활동으로 이론가로서도 이름을 떨친다. 그녀는 스스로를 ‘이야기꾼’이라고 칭한다. 그러면서 “나에겐 그것이 세상을, 세상사의 모든 충돌을 이해하는 유일한 방식이다.”라고 말한다.


앞서 『델리』에서 남녀 양성을 가진 ‘히즈라’ 바그마티를 만나보았다. 이 작품에는 또다른 히즈라 안줌이 등장한다. 왜 히즈라인가? 그것은 우연이 아니다. 델리가 히즈라이고, 인도가 히즈라이기 때문이다. 바그마티나 안줌은 남성의 몸에 갇힌 여성이다. 힌두 신화의 ‘아르다나리슈바라(Ardhanarishvara)’는 시바와 그의 배우자인 파르바티가 결합된 형태로 절반은 남성, 절반은 여성의 모습을 한 신이다. 신의 영역에서는 남성과 여성 에너지의 완벽한 통합을 상징하지만, 현실에서는 고통스러운 혼종성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인도는 ‘더럽고 신성한’ 나라다.


1. ‘늙은 새들은 어디에 가서 죽는가?’ 장(章)은 “그녀는 묘지에서 나무처럼 살았다.”라는 말로 시작된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늙은 새’가 ‘안식’을 찾아 온 묘지에서 ‘나무처럼’ 사는 이야기다. 그 녀 이름은 안줌이다. 그녀는 스스로 ‘지복의 성자’가 되고, 그 넉넉한 품에 또다른 ‘히즈라’, 정신적, 영적 히즈라인 틸로라는 여성이 먼 길을 돌아온 끝에 안긴다. 이 두 여성을 중심으로 세상에서 배제된 사람들과 영혼(죽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잔나트’(파라다이스)가 만들어진다.


안줌

델리에서 딸만 내리 셋을 낳은 한 여인이 넷째로 아들을 낳고 이름을 아프타브라고 지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이 아기가 남녀의 성기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엄마는 여성의 성징은 곧 없어질 것이라고, 또는 없어지기를 기도한다. 그녀가 찾아간 곳은 하즈라트 사르마드 샤히드(이슬람 순교자)의 영묘다. 하즈라트 사르마드는 ‘지복(至福)의 성자이자 위로받지 못한 자들의 성인이며, 정확히 규정될 수 없는 자들, 신자들 속의 신성모독자, 신성모독자들 속 신자의 위안(慰安)’이다.

하즈라트 사르마드는 페르시아로 온 아르메니아 유대 상인이었다. 그가 델리로 온 것은 힌두교인 소년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슬람교를 받아들이고, 알몸 고행자로 살았다. 황제 아우랑제브가 사르마드를 궁으로 불러 ‘칼리마’를 암송해 진정한 이슬람교도임을 증명하라고 했다. ‘칼리마’란 “라 일라하 일랄라, 마호메트-우르 라술 알라” 즉 “알라 외에는 신이 없고, 마호메트는 알라의 사도다”라는 말이다. 그런데 사르마드는 “라 일라하”만 암송하고 중단한다. 이것은 “신이 없다”는 말이다. 그 뒤에 “일랄라”, 즉 “알라 외에는”이 붙어야 완성된다. 그러나 그는 영적 추구를 완성해 충심으로 알라를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고집을 부렸다. 원리주의, 또는 완벽주의라 할 수 있다. 그렇게 고집을 부린 탓에 그는 처형되어 ‘순교자’가 된다. 참수된 그는 잘린 자기 머리를 들고 자마 마스지드(델리 최대의 이슬람사원) 계단을 걸어 올라가 천국으로 직행했다고 한다.


아프타브는 남자 아이로 키워졌으나, 다른 히즈라를 보고 따라가서 그들이 공동체를 이뤄 사는 ‘콰브가’를 기웃거린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그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고, 고통스러운 수술을 받고, 호르몬 주사 등을 맞으면서 여성으로 살아가게 된다.


안줌은 자마 마스지드 계단에 버려진 아기를 거두어 자기 딸로 키운다. 이 딸, 자이나브가 병에 걸려 오래 앓게 되자 안줌은 수호 성인의 영묘로 순례를 떠난다. 동행인은 자신의 아버지의 오랜 친구인 노인 자키르 미안이다. 그렇게 구자라트 지역으로 가 있는 동안 폭동이 일어난다. 구자라트에서 힌두교 순례자들이 탄 열차에 화재가 발생해 많은 사람들이 사망했고, 주 정부가 이를 이슬람교도들의 소행이라고 밝히면서 분노한 힌두교도들이 이슬람교도들을 학살한 것이다. 이것은 2002년에 실제 일어났던 사건이며 당시 구자르트 주 총리는 훗날 인도 총리가 되는 나렌드라 모디였다.

폭동의 와중에서 자키르 미안은 죽고, 안줌은 난민 수용소에서 남자 모습으로 발견되어 무사히 ‘콰브가’로 돌아온다. 그러나 애지중지하던 딸 자이나브가 콰브가의 다른 사람을 ‘엄마’라고 부르고 자신은 ‘큰엄마’라고 하는 데에 충격을 받고 결국 콰브가를 떠난다. 그녀가 정착한 곳은 무덤이다. 국립병원과 시체안치소 등이 인접해 있고, 그녀의 부모 무덤이 있는 곳이다. 시체안치소는 부랑자나 무연고 시신을 안치하는 곳이다. 그녀의 고객이던 건설업자의 도움으로 무덤 사이에 거처를 짓고 아예 눌러앉는다. 그리고 그곳은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게스트하우스가 된다. 이름하여 잔나트(파라다이스) 게스트하우스. 물론 간판도 없고 찾아오는 이를 받아들일지 여부는 전적으로 안줌의 의중에 달려 있다.


사담 후세인

안줌의 든든한 조력자가 되는 청년은 스스로를 사담 후세인이라고 이름 지었다. 달리트(불가촉천민) 출신인 그는 시체안치소에서 일하다가 의사 하나와 다투고 해고된 뒤 온갖 잡일을 하면서 살아간다. 사담의 이야기는 인도 사회의 여러 단면을 보여주고 있어 흥미롭다.

시체안치소에서 검시를 하는 의사들은 시신을 직접 만지지 않는다. 상위 카스트이기 때문이다.그래서 검시 중 시신을 직접 다루는 것은 이들 달리트의 몫이다. 그래서 사담은 반(半)외과의사다.


그의 이름에 얽힌 사연은 인도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본명은 다야찬드이고, 가죽 일을 하는 ‘차마르’ 카스트에 속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소가 죽으면, 농부들은 만질 수 없기 때문에 치들 차마르에게 소 사체를 처리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면 이들은 소 사체를 수거하고 가죽을 벗겨 무두질해서 제품을 만든다.

어느 날 그의 가족은 처리 의뢰를 받고 소 사체를 싣고 ‘상납’을 위해 경찰서에 들렀다. 그런데 그날따라 경찰서장이 평소의 3배 금액을 요구했다. 그렇게 되면 사체를 처리해봤자 남는 것이 없기 때문에 실랑이를 벌였다. 그러자 경찰서장은 이들을 ‘소 도살’ 혐의로 체포해 가둬버렸다. 이 소식이 흘러 나갔다. 경찰이 일부러 흘렸을 수도 있다. 그러자 흥분한 군중이 몰려와 ‘소 도살자’를 내놓으라고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경찰서로 몰려들어가 이들 가족을 끌어낸 뒤 집단 폭행을 가해 죽여버린다. 차에 버젓이 소 사체가 실려 있었으니 군중에게는 다른 증거가 필요도 없었다. 사담 후세인, 즉 다야찬드는 차에 남아있다가 그 광경을 목격하고 살아남았다. 그래서 언젠가 그 경찰서장을 죽여버리겠다고 다짐하고 이름을 사담 후세인이라고 지었다는 것이다.

‘힌두성’(性)을 건드리는 것이 인도에서 얼마나 큰 폭발력을 지니는지, 군중이 얼마나 쉽게 흥분하고 무책임한 행동에 휩쓸릴 수 있는지, 달리트가 얼마나 멸시의 대상인지, 그리고 그들의 목숨이 얼마나 경시되는지… 등등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또한 뇌물과 부정부패가 인도 사회의 일상임을 잘 드러내는 사건이기도 하다.

사담은 훗날, 잘 자란 안줌의 ‘딸’ 자이나브와 결혼하고 사담이란 이름과 경찰서장을 죽이겠다는 결심도 버린다.


잔타르 만타르에서의 탄생

잔타르 만타르란 인도 북부 여러 도시의 ‘천체 관측소’를 뜻하는 말이다. 그중 하나가 델리의 잔타르 만타르로 시내 중심부에 위치해 있다.

3 ‘탄생’ 장(章)은 이 잔타르 만타르 일대가 무대다.

이 에피소드도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한다. 2011년 군인 출신 사회운동가 안나 하자레가 “부패 없는 인도”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마하트마 간디 방식의 비폭력과 단식 투쟁을 벌이면서 인도는 물론 세계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당시 인도는 굵직한 부패 스캔들로 시끄러웠다. 그는 1차 4일, 2차 12일 등 2차례 단식을 했고, 광장에는 수십만 시민이 몰려 지지를 표명했다. 이는 시민옴부즈맨 법안을 논의하기로 하는 합의로 결론이 났고, 하자레는 “간디의 윤리적 유산을 21세기에 되살린 인물”로 불렸고, 정치권에서는 ‘아암 아드미 당(AAP, 평민당)’ 창당으로 인도 정치지형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서는 또 ‘구자라트 카 랄라’가 등장한다. 이 사건을 최대한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기회주의적 모습이다. 구자라트 카 랄라란 ‘구자라트의 아들’이란 뜻이다. 이는 명백히 나렌드라 모디 총리를 겨냥한 것이다.


아룬다티 로이는 이 둘 모두를 냉소적으로 바라본다. ‘부패 없는 인도’라는 순수한 캠페인이 대중을 선동하는 쇼로 변질되고, 이것이 ‘성자의 정치’라는 식으로 권력에의 욕망으로 바뀌어 버리는 ‘탄생’의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다. 2025년 현재 구자라트 카 랄라의 장기 집권이 이어지고 있으니, 작가의 통찰은 핵심을 꿰뚫어 본 셈이다.


‘탄생’은 또 하나의 은유를 담고 있다. 광장에는 인도의 모든 문제가 한 자리에 모인다. 세계 언론의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되는 상태를 조금이라도 자신들의 목소리를 알리는 데 이용하려는 것이다. 거기에는 땅을 화력발전소를 지으려는 석유개발회사에 빼앗긴 농부들, 보팔참사(수많은 희생자를 낸 미국 유니온카바이드사의 가스 유출사고) 피해자들, 힌디어를 국어로 채택할 때까지 말을 하지 않겠다는 묵언 수행자들, 델리시의 쓰레기와 하수처리 민영화에 반대하는 관련 업자들, ‘똥 무늬’ 옷을 입은 설치미술가, 소수민족주의자들, 티베트 난민들, 카슈미르 실종자 어머니 모임, 안줌과 히즈라들 그리고 사담 후세인 등 잔나트 게스트하우스 식구들까지….(안줌은 그의 독특한 외모 덕분에 외국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여기에 버려진 아기가 등장한다. 그 사이 단식과 관련있는 정치인과 안줌 사이에 언쟁이 벌어져 소동으로 발전하고, 그 사이 아기는 사라지고 없다. 이 아기가 바로 또 하나의 ‘탄생’인 것이다. 사라진 아기는 훗날 이 소설의 또 하나의 주인공인 틸로가 데리고 간 것으로 밝혀진다.


그러므로 ‘탄생’의 장(章)은 간디주의, 힌두국가주의가 탄생하고, 그 와중에 진짜 한 생명이, 모두가 저마다의 슬로건을 떠들어대는 사이에, 탄생하는 것이다. 이상과 현실정치, 그리고 희망의 3중 탄생인 셈이다. 이상은 쇼가 되고, 현실정치는 힘과 국가주의로 치닫지만, 아기는 진정한 희망의 생명으로 자라간다.


틸로와 세 친구

이 작품의 후반부는 완전히 분위기가 바뀐다. 틸로라는 여성을 중심으로 다스, 나가, 무사라는 세 친구가 등장한다. 다스와 나가는 부유한, 상위 카스트 출신으로 역사를, 무사와 틸로는 건축을 전공하는 대학생이다. 1984년 그들은 “노먼, 당신이야?”란 연극을 함께 연습했다. 그러나 공연 임박해서 인디라 간디 총리가 암살 당하고, 반시크교 폭동이 일어나면서 개막이 연기되었다. 한달 후에는 다시 보팔 참사가 터졌다. 보팔에 있는 유니언카바이드 농약 공장에서 치명적인 가스 누출로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영구 장애를 입은 사람 숫자는 그보다 훨씬 많다. 결국 연극은 무산되었다.


틸로는 알 수 없는 매력의 소유자다. 그녀는 세상사에 무관심한 듯, 초연한 듯 보인다. 세 남자 모두 연정을 품고 있지만, 그 ‘색깔’은 모두 다르다. 다스는 저명한 의사의 아들로 브라만이다. 그는 틸로의 매력에 끌리지만, 출신이 불분명한 그녀와 맺어질 수 없다는 현실을 잘 알고, 자신의 지위와 카스트에 어울리는 여성과 결혼한다. 나가는 플레이보이 기질이 있다. 그는 대사를 역임한 외교관의 아들로 많은 여성이 따르는 매력을 가지고 남자다. 그는 틸로에게 그리 집착하지는 않은 듯하다. 반면 무사는 전혀 결이 다른 사람이다. 그는 카슈미르 출신으로 진실로 틸로를 사랑한다. 틸로 역시 그를 사랑한다.


그렇다면 틸로는 누구인가? 그녀 출생의 비밀 또한 인도 사회의 한 단면을 잘 보여준다. 그녀의 어머니는 남부 소국의 왕족이거나 고귀한 집안 출신이다.(인도에는 수많은 소국이 있고, 거기에는 각각의 군주가 있다) 그녀는 어울리지 않는 상대의 아이를 가졌고, 그래서 몰래 출산해 아기를 고아원에 버리고, 다시 그 아기를 입양했다. 그러니 그녀는 친어머니이면서, 양어머니인 것이다. 그 아기가 틸로다. 앞서 내가 틸로를 정신적, 영적 히즈라라고 했던 것은 이것으로 설명된다. 왜 이런 복잡한 과정이 필요했을까? 말할 필요도 없이 다른 카스트와의 금지된 사랑의 흔적은 지우면서 자신의 아이도 지키는 편법이다.


무사의 스토리는 카슈미르 분쟁의 이해를 위한 좋은 에피소드다. 무사의 아버지는 건설업자로 인도군이 발주하는 공사를 주로 해서 돈을 벌었다. 당연히 카슈미르 분리주의자가 볼 때는 ‘배신자’다. 무사가 건축을 전공한 것은 사업을 이어받도록 하려는 아버지의 선택이었다. 그러나 무사는 이런 아버지에게 반감이 있다. 무사는 대학 졸업 후 카슈미르로 돌아가 결혼하지만, 우발적인 사태가 발생해 인도군의 발포로 베란다에서 구경하던 아내와 3살 난 딸을 잃고 반군 지도자가 된다.


틸로는 무사의 초청을 받아 카슈미르를 여행한다. 이때 다스는 정보국 카슈미르 지부 부지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반군 지도자 무사를 추적하는 핵심 지휘관이 다스인 셈이다. 틸로는 무사의 비밀 조직 요원들의 안내로 곳곳을 여행하면서 카슈미르의 현실을 목격한다. 그리고 관광지로 유명한 달 호수의 수상 가옥에서 두 사람은 같이 하룻밤을 보낸다.

달 호수 보트.jpg 스리나가르의 달 호수. 히말라야 산록의 아름다운 호수로 유명한 휴양관광지다.

무사가 위장된 보트를 타고 떠난 직후 인도군이 덮쳐 보트를 지키던 무사의 부하는 사망하고 틸로는 체포된다. 악명 높은 고문자 암리크 싱의 손아귀에 들어간 틸로는 진술서를 쓰라고 준 종이에 다스의 이름인 비플람 다스굽타에게 연락해 달라는 말과 함께 대한 연극 연습 당시 극중 이름 ‘가슨 호바트’를 암호처럼 쓴다. 마침 멀리 떨어진 곳에 있던 다스는 취재를 위해 스리나가르에 있던 나가에게 틸로를 부탁하고 나가는 군 부대로 가서 틸로를 데리고 나온다. 그 후 인도로 돌아가 나가와 틸로는 결혼한다. 틸로로서는 일종의 위장인 셈이고, 나가는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틸로를 받아들인다. 외교단지에 있는 시아버지 집에서 사는 것만큼 안전한 방법은 없을 테니까.

무사는 여전히 살아서 활동 중이고, 틸로는 가끔 무사를 만난다. 그리고 결국 집을 나간다. 그렇게 자리를 잡은 곳이 다스의 집 3층이다. 한편 다스는 현실에 지치고, 카슈미르에서의 활동에 환멸을 느껴 심신이 망가진 채 정보국에서도 쫓겨난다.


나가는 사실 다스에 의해 정보국의 앞잡이가 되어 있는 상태였다. 충동적으로 결혼한 첫 아내가 마약에 연루되어 체포되었을 때 다스가 힘을 써준 것이 계기였다. 나가는 카슈미르에서의 인도군의 ‘만행’에 대하여 실상을 폭로하기도 해 신망을 얻고 있었다. 정보국은 그런 점을 이용해 기사거리를 흘려주면서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공작을 진행한다. ‘윈-윈’인 셈이다. 다스의 정보국은 또한 카슈미르 반군 조직들 사이의 반목을 이용해 상호 갈등을 부추기는 전략을 쓰기도 한다.


카슈미르 여행에서 무사의 아내와 딸 사연을 알게 된 틸로는 잔타르 만타르의 소동 중에 버려진 아기를 데리고 온다. 모성의 발로이기도 하고, 무사의 딸에 대한 부채 의식 같은 것도 작용한 것 같다. 사실 카슈미르 여행에서 돌아온 틸로는 자신이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고, 그 아기를 지운 전력이 있다. 그렇게 정신적-영적 히즈라로 방황하던 그녀는 안줌의 잔나트 게스트하우스에 받아들여져 그곳에 정착한다. 사실 그 아기는 안줌이 먼저 관심을 가졌고, 잔나트의 식구들이 추적해서 틸로의 거처를 알아둔 것이었다. 훗날 무사는 결국 죽지만, 그 전에 잔나트 게스트하우스에서 며칠을 틸로와 함께 보내기도 한다.

아기는 미스 제빈 2세라고 불렸다. 미스 제빈은 무사의 죽은 딸이다. 그러나 어느 날 아기의 친모가 죽은 후에 그녀의 편지가 전달된다. 그녀는 공산주의 운동가로 자신이 체포되었을 때 경관들에게 윤간을 당하고, 그때 임신해서 낳은 아이라고 밝힌다. 그래서 아기의 이름은 친모가 지은 이름을 덧붙여 미스 우다야 제빈이 된다.


다스와 무사도 만난다. 다스는 말한다. “자네들이 옳을지도 모르지만, 결코 이길 수는 없을거야.” 이에 무사가 말한다. “결국 우리가 틀린 것으로 판명될지도 모르지만, 우린 벌써 이겼어.” 내게 다스는 물리적 점령을 이야기하고 무사는 존엄성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들렸다.


파라다이스

이렇게 잔나트 게스트하우스는 배제되고 억압받던, 그리고 어디에도 속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아무런 차별없이 서로를 보듬으며 행복하게 지내는 ‘파라다이스’가 되었다. 힌두교도, 이슬람교도, 남자, 여자, 그리고 히즈라, 공산주의자, 달리트, 음악가, 거기에 말과 염소, 강아지, 앵무새… 뿐만 아니라 어디에도 묻힐 수 없었던 사람들의 시신, 시신이 없으면 그를 기리는 어떤 물건까지 이곳에 묻혔다.

작지만 완벽한 파라다이스. 하지만 내게는, 그래서 오히려 지나치게 몽상적으로 느껴진다.


더럽고 신성한 나라


책 두권으로 인도를 이해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이해의 단초는 있다.

남녀 양성의 ‘히즈라’의 고통,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끝없는 갈등, 카스트의 굴레, 그리하여 인도는 양면성이 아니라 수십 수백가지 경우의 수가 충돌하는 나라다.

그러므로 똥, 탄트라, 중간자는 유용한 키워드가 될 수 있다. 보는 이에 따라 수많은 다른 키워드를 찾아낼 수 있을 것임은 물론이다.


캘커타 공항의 똥 누는 사람들은(대변이라는 점잖은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몸의 진실을 숨기지 않는 문화’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더러움이 아니라 삶의 순환이다. 서구식 현대식 위생관념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또는 이미 사라져버린 관념이다. 물론 길거리에 똥 무더기가 널려 있으면 더럽다. 더럽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용인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것 아닐까? 인구 과잉도 한 합리적인 요인이 될 수 있을 터이다.


이것은 탄트라와 이어진다. 탄트라는 욕망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보면서 그 속에서 신성을 찾는다. 인간의 쾌락, 성행위를 통해 우주의 합일을 이룩하고 법열의 세계로 들어간다면 똑 같은 원초적 배설이 더러움으로만 치부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하여 탄트라는 더러움 속의 성스러움이고, “똥”과 “신성” 사이의 통로일 수 있다.


히즈라는 이런 사유 체계에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히즈라는 ‘신적인 존재’로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역으로 ‘불가촉’이다. 앞서 아프리카에서 살펴보았던 ‘오수’와도 그런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오수’는 신이 선택한 사람, 신에게 바쳐진 사람이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범접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신성이 기피성이 되고, 천민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괴롭히거나 화나게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신의 분노를 불러일으킬 것이기 때문이다. 『델리』의 바그마티나, 『지복의 성자』의 안줌과 그의 히즈라 집단이 ‘험한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는 힘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결혼식이나 다른 잔치에서 히즈라들이 초대되어 노래와 춤으로 축복하는 까닭도 마찬가지다. 천함과 신성이 이렇게 상통하는 셈이다. 그렇게 해서 탄트라는 부정과 긍정, 오염과 정결, 성과 초월을 동시에 품는 것이다.


‘중간자’라는 사회적 현상도 마찬가지다. 식민지, 특히 아프리카에서 인도인들은 제국주의의 ‘중간층’, 즉 관리 상인 통역자 회계사 등으로 식민지배의 ‘중간’ 역할을 했다. 그래서 백인 대신 인도인들이 아프리카인들의 분노의 대상이 되는 ‘욕받이’가 되었다. 제국주의의 희생자이면서 동시에 억압자였던 것이다. 인도 자체가 히즈라인 셈이다.


이 구조는 인도 내부에서도 반복된다. 카스트 사회에서 브라만이 신과 인간의 중재자였고, 히즈라는 남성과 여성, 인간과 신 사이의 성적·사회적 중간자다. 이것이 인도의 비극이다. 그러나 비극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다시 재생력의 원천으로 작용한다. 모순 덩어리이지만, 그 모순이 크고 심각한만큼 그것을 견디는 힘도 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도 문명은 ‘중간자’의 문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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