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神)이 없는 땅의 황제

신은 당에 소속되어 있고 당은 세월의 흐름에서 비켜서 있다

by 제이슨

『새로운 황제들』/해리슨 솔즈베리/다섯수레/1993(2013년 개정판)

『불멸의 지도자 등소평』/등용/김영사/2001(절판)

『젊은 인민의 초상』/피터 헤슬러/글항아리/2024

『개구리』/모옌/민음사/2021

『공산』/아라이/위즈덤하우스(예담)/2017(절판)


‘죽의 장막’이 열리다


솔직히 나는 중국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지금은.

그러나 원래 중국은 내게 일찍부터 나라 밖을 내다보고 싶은 열망을 불러일으킨 나라였다. 늘 궁금하고, 꼭 한번 가보고 싶어 했다는 점에서, 본래의 뜻과는 약간 다르지만, ‘선망’이란 표현을 쓸 수도 있겠다. 앞서 ‘제2화 「다락방 서재」 편에서 밝혔듯이 문화혁명과 홍위병, 티베트의 달라이라마 등이 어린 시절 나의 호기심과 상상력을 크게 자극했고, 그것이 중국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 것이다.


내가 처음 해외에 나가본 것이 1982년이었다. 유학생 외교관 상사주재원 아니면 해외여행이란 꿈도 못 꾸던 시절이었으니 시쳇말로 제법 일찍 ‘출세’한 셈이었다. 당시 오며 가며 홍콩을 경유했는데, 귀국 길에 이틀 정도 머물면서 관광을 했다. 말하자면 홍콩에서 간접적으로 중국을 처음 느껴 본 것이다.


이듬해인 1983년 대사건이 터졌다. 중국 민항기가 납치돼 춘천의 주한미군 기지인 캠프 페이지에 불시착한 것이다. 한중관계는 1949년 중국에 공산당 정권이 수립된 후 완전히 단절돼 있었다. 그래서 중국은 그야말로 금단의 땅이었다. 게다가 우리는 철저한 반공교육을 받았기에 북한 중국 소련 등 공산 국가는 머리에 뿔 달린 승냥이들이 사는 곳으로 생각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런데 갑자기 중국 비행기 한 대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춘천에 나타났으니 그 충격은 말할 수 없었다.

중국 민항기 납치 사건 호외.jpg 중국 민항기 납치사건을 보도한 1983년 당시 호외

납치범들은 공산체제를 탈출하려는 중국인들이었다.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중국 정부 관리들이 협상단으로 국내에 들어왔다. 사상 처음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이 정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만난 것이다. 결국 기체 반환과 승객 귀환 문제가 협상을 통해 해결되고, 납치범 6명은 대한민국 법률에 따라 재판 후 처벌받고 제3 국으로 추방되었다. 중국 당국이 인도를 요구했으나, 당사자들은 자유세계 망명을 희망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운명은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희망대로 제3 국에서 자유를 찾은 것으로 알고 있다.


이 사건은 나에게는 참으로 뜻깊은 일이었다. 중국이란 금단의 땅이 열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양국 간에 스포츠 문화 등 민간 부문 교류가 조금씩 확대되고, 그것이 경제 분야로, 그리고 마침내 1992년 수교로 이어졌다. 민항기 사건으로부터 채 10년이 걸리지 않은 것이다.

물론 그 사이 많은 일이 있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이 열렸고, 이듬해 중국에서는 천안문사태가 일어났다. ‘페레스트로이카’로 소련의 개혁 개방과 동유럽 공산권 해체도 진행되었다. 이런 격변 속에서 나도 덩달아 바쁘게 돌아다녔다. 중국으로, 동유럽으로, 소련으로…

그리하여 ‘다락방 서재’에서 홍위병 관련 스토리를 읽은 후 대략 25년 만인 1990년 마침내 중국 땅을 밟게 되었다.


중국에서는 꽤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당시 중국은 천안문 사태로 인하여 국제사회에서 고립된 상태였다. 우리는 중국의 한 유명 신문사의 초청으로 방문했고, 그래서 꽤 귀한 외국 손님으로 대우를 받은 것이다.

이 방문에서 기억에 남는 2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하나는 계급사회의 특권이다. 당시 중국은 한국 항공사에 베이징까지는 개방하지 않아서 톈진에 내렸다. 공항에 초청 측이 마중을 나왔다. 우리 일행은 3 사람이었는데, 고급 승용차 3대가 나왔다. 그렇게 행렬을 지어 베이징으로 이동하는데,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이들 차에는 경광 등이 장착되어 있었고, 심지어 마이크와 스피커도 있었다. 차가 밀리면 경광 등을 켜고 체증을 빠져나갔다. 거기까지는 이해한다 치자. 베이징 시내에 접어들어 일부 구간에서 교통 체증에 걸리자, 경광 등을 켜고 중앙선을 넘어 역주행을 하기 시작했다. 마이크를 잡고 비키라고 방송까지 하면서.


두 번째는, 지금은 사라진, 인민공사다. 인민공사란 ‘집단농장’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상상한 ‘농장’이 아니었다. 베이징 인근의 한 인민공사를 방문했다. 일행은 나와 안내원 단 둘. 먼저 사장의 영접이 있었다. 커다란 회의실에 마주 앉았다. 양쪽 벽을 따라 의자가 나란히 놓여 있고, 각 의자 옆에는 키가 큰 보온병과 침을 뱉는 타구가 좌우에 놓여 있었다. 거기에서 마치 무슨 정상회담이라도 하는 양, 한쪽에 사장이, 맞은편에 내가, 10미터는 족히 될 듯한 거리를 두고 마주 앉아서 대화를 하는 것이다.

인민공사는 그냥 농사만 짓는 곳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학교, 병원 등은 물론 공장과 사업체도 여럿 있어 수출 품목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농업과 제조업, 그리고 주민 생활의 복합체라고 할까… 사장은 그곳에서 문자 그대로 왕과 같은 위세를 떨치는 사람이었다. 식사에는 공사 내 가장 손맛이 좋은 여성들을 동원해 그야말로 산해진미를 차려냈다. 한 접시에 한 점도 채 먹지 못할 정도로 요리는 다양했다.

그 사장과 내가 식사 중 거의 싸우다시피 충돌하고 말았다는 것도 덧붙여야겠다. 6.25 전쟁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이다. 그는 ‘항미원조’ 전쟁에서 희생된 중국인들을 이야기하고, 나는 중공군이 불법 침략에 개입한 것이고 그 총탄에 내 아버지가 중상을 입었다고 맞서면서 말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3 황제’의 땅


이 첫 중국 여행에서 나는 3종류의 황제를 느꼈다.


첫째는 ‘새로운 황제’다.

퓰리처상 수상자인 ‘뉴욕타임스’ 기자 해리슨 솔즈베리는 1970년대 중국을 취재한 경험을 『새로운 황제들』이란 책으로 묶어냈다. 나는 이 책을 에드거 스노우의 『중국의 붉은 별』 후속으로, 또는 그것을 능가하는 걸작으로 여긴다. 그는 이 책 서두에 마오쩌둥이 국민당과의 내전에서 승리한 후 베이징에 곧바로 입성하지 않고 향산에 꽤 오래 머물렀던 사실을 기록하면서 당시 가지고 간 책이 중국 고대 황제들의 통치를 기록한 ‘사기’와 ‘자치통감’이었다고 밝힌다. 이후 베이징에 입성, 중난하이(中南海)의 ‘국향서옥(菊香書屋)’에 자리를 잡았을 때에도 역사책인 ‘24사’를 탐독했다고 서술한다. 그러면서 초기 국향서옥의 서재에는 마르크스 앵겔스 레닌 스탈린 등의 저작물은 한 권도 없었다고 했다. 즉 마오는 공산주의 지도자가 아니라 과거 중국 황제의 전통을 이어받는 ‘새로운 황제’라는 것이다. 이것이 『새로운 황제들』을 관통하는 기본 골격이다. 제목부터 그렇지 않은가. 바로 그 황제의 보이지 않는 손길이 베이징, 아니 중국 전역을 움켜쥐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저마다의 황제’다.

바로 내가 만난 인민공사 사장과 같은 사람들이다. 각 행정구역, 사업체 등 모든 단위에 이들 ‘저마다의 황제’가 군림한다. 마치 중세의 영주처럼 이들은 위로는 ‘황제’에게 충성하면서 자기의 영역에서는 절대적인 권력을 휘둘러 ‘중화인민공화국’이란 거대한 체제가 굴러갈 수 있도록 한다. 지금은, 인민공사는 폐지되고 대규모 민간 기업이 활동하고 있어 많이 달라졌지만, 당이 지배하는 시스템에서는 여전히 같은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셋째는 '소황제'다.

1979년 중국은 인구 증가를 억제하기 위하여 1 가구 1자녀 정책을 시행한다. 그래서 80년대 태어난 아이들은 모두 독자이고, 이들이 집안에서 황제처럼 군림한다는 뜻에서 ‘소황제(小皇帝/샤오황디)’ 란 말이 생겨났다. 80년 이후 출생아라는 뜻에서 ‘바링허우(八零後)’라고도 한다. 자기밖에 모르고 버르장머리도 없다는 통념이 있다.(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반론도 있다) 내가 처음 중국을 방문했을 당시 이들 ‘소황제’들은 유치원이나 소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그래서 할아버지 할머니나 부모들이 이들을 떠받들고 다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소황제를 낳았던 한 자녀 정책, 이른바 ‘계획생육정책’은 2016년 1월 1일을 기해 공식적으로 폐지되고 2자녀 정책으로 전환되었다. 이어 2021년 모든 산아제한이 철폐되었다. 그러나 이들 ‘소황제’는 공산주의식 평등체제가 자본주의적 경쟁체제로 바뀐 세상에서 살게 되면서 많은 문제를 겪게 된다. 부양 부담도 크다. 부부가 외동이므로 양가 부모 4명을 부양해야 하고, 여기에 자신들의 자녀까지 양육해야 한다.


‘새로운 황제’, ‘저마다의 황제’, ‘소황제’ 등 3 황제는 모두 중국이 풀어야 할 난제다.


또 하나, 다른 차원에서, 느낀 것은 ‘압도적인 힘’이다.

어느 날 아침 일찍 호텔에서 나와 산책을 하다가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자전거 행렬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건너편 건물에 붙은 플래카드의 글귀가 눈에 띄었다.

“廣大的領土 神妙的人民”

“광대한 영토에 신묘한 인민”이라니… 하긴 누군가 우스개로 이런 말을 한 것이 기억났다.

“인구가 10억이 넘으니, 잘 찾아보면 날아다니는 녀석도 있지 않겠어?”

문득 이 광대하고 엄청난 인구의 나라의 잠재력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지금은 이렇게 낙후되어 있지만, 언젠가는 이 힘이 강력한 구심력으로 작용할 수 있을 터이고, 그때 우리나라가 그 힘에 그냥 끌려들어 갈 위험도 있겠구나’ 하는 느낌이다. 그리고 30여 년이 지난 지금, 그 느낌이 현실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새로운 황제들』/해리슨 솔즈베리/다섯수레/1993(2013년 개정판)


저자 해리슨 솔즈베리는 1949~1954년 ‘뉴욕타임스’ 모스크바 특파원을 지냈고, 70년대부터는 20여 년간 중국을 취재했다. 1984년에는 30년대 마오쩌둥과 홍군이 치러낸 대장정의 노정을 따라 여행하고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의 가족, 최측근 등을 인터뷰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냉전시대 공산권 전문 기자였다. 이 책은 이런 그의 중국 취재를 집대성한 기록이다.

원본은 1992년, 번역본은 1993년에 초판이 나왔고, 2013년 개정판이 나왔다. 개정판에는 1992년 이후부터 시진핑의 등장까지 스토리를 국내 전문가의 글로 추가한 것으로 나와있다.


저자는 물 흐르듯 유려한 필치로 복잡한 역사를 대하소설처럼 매끄럽게 그려 나간다. 여기서 말하는 ‘황제들’은 물론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이다. 서술은 주로 이 두 ‘황제’를 중심으로 이뤄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지도급 인사들의 움직임도 놓치지 않는다. 그러면서 사건 중심의 딱딱한 기술이 아니라 주변 정황이나 심리 상태 등을 세밀하게 묘사한다. 이것은 단지 작가의 상상력이 아니라 깊고 폭넓은 취재와 주요 인물들의 심층 인터뷰 등을 바탕으로 한 것이어서 신빙성이 높다.


혁명에 대한 열정과 열린 마음으로 군과 당 지도부를 이끌어 내전을 승리로 이끌고 마침내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마오쩌둥. 그러나 그는 점차 고집불통의 독재자로 변해 가면서 옛 동지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절대 권력자의 불안 증후군이라고 할까… 대약진운동, 문화혁명 등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고, 나라를 수십 년 후퇴시키면서 수천 년 문화유산을 잿더미로 만든 터무니없는 과오를 저지른 것은 이런 편집증적인 불안증세가 큰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특히 저자가 혐오를 감추지 않는 사람도 있어서 눈길을 끈다. 그는 바로 마오쩌둥 ‘타락’(?)의 원인 중 하나를 제공한 사람으로, 말하자면 비밀경찰 총수 격인 캉셩(康生)이다. 그는 보안을 담당하면서 무자비하게 숙청하고, 마오에게는 ‘섹스’를 제공하는 ‘채홍사’ 역할을 함으로써, 이를테면 ‘총명을 흐리게 만든’ 악덕 인물로 묘사된다. 캉셩은 다음에 소개할 『불멸의 지도자 등소평』에서도 사악한 인물로 언급된다.


반면 이런 광풍 속에서 오뚝이처럼 살아남은 덩샤오핑, 명민하고 세련된 지성 저우언라이 등에 대해서 저자는 찬탄해 마지않는다. 그러나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에 몇 개월 앞서 세상을 떠나고, 덩샤오핑은 천안문사태 유혈진압이라는 오점을 남긴다.


요약하면 이 책의 저자는 공산당과 홍군(후에 인민해방군)이 엄정한 기율과 군기, 그리고 마오쩌둥의 열린 리더십으로 부패하고 타락한 국민당군을 물리치고 대륙을 장악할 수 있었다고 본다. 그리고 마오는 중국을 ‘다스리기’ 위하여 고전을 섭렵하면서 고대 황제들의 통치술을 연구했고, 그렇게 해서 새로운 황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황제가 타락하면서 나라는 나락으로 떨어졌고,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저우언라이는 꿈을 펼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으며, 덩샤오핑은 살아남아 개혁개방을 이끌게 된다. 그러나 저자는 천안문사태에서 멈춘다. 앞길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 놓였기 때문이다.


찾아보니 1993년판 책이 아직도 잘 보관돼 있어 다시 읽어보았다. 나는 책을 읽을 때, 절대 여백에 메모를 하거나 본문에 밑줄을 긋지 않는다. 어디까지 읽었는지 표시하려고 책장 모서리를 접지도 않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이 책을 다시 읽다 보니, 군데군데 밑줄이 그어져 있고, 메모가 여기저기 많다. 그리고 책 표지에는 등장인물들의 이름 중국어 발음과 한자 표기를 목록으로 만들어 끼워 놓은 것도 그대로 있다. 다만 나중에 지울 요량으로 메모나 밑줄에는 연필을 사용한 것이 웃음을 자아낸다.

지금 중국은 또 다른 중국이다. 시진핑은 마오쩌둥 덩샤오핑에 이은 세 번째 황제다. 이 책을 통하여 덩샤오핑 시대까지 머릿속에 정리가 되면, 시진핑 시대를 이해하는 좋은 토대가 될 것이다.


『불멸의 지도자 등소평』/등용/김영사/2001(절판)


등소평(덩샤오핑)의 막내딸 등용이 쓴 평전이다. 딸이 아버지의 생애를 기록한 것이니 다른 작가들과는 차별된 그 무엇이 있을 것이다. 그의 내밀한 부분, 외부로 드러나지 않은 생각 등이 새롭게 드러나는 부분이 많다.

단지 아버지 이야기만을 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 덩샤오핑이 상대한 수많은 사람들, 특히 지도급 인사들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가 포함된다. 국가 지도부 인사들이 모여 사는 ‘중난하이(中南海)’의 모습, 난무하는 권모술수 속에서 벌어지는 여러 인물들의 흥망성쇠가 세밀하게 펼쳐진다.


이 책은 덩샤오핑의 생애 중에서도 특히 문화혁명 10년 간의 기록에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그만큼 고난을 겪었을 뿐만 아니라 덩샤오핑과 중국의 운명에 중요한 기로였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는 단지 자신이 겪은 일을 그냥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문헌자료를 통해 사실을 확인하고 보완하고 있다.

솔즈베리의 『새로운 황제들』과 함께 보완적으로 읽으면 더욱 유익하고 흥미도 더해지는 책이다.


『새로운 황제들』은 700쪽, 『불멸의 지도자 등소평』 600쪽이 넘는, 그래서 꽤 인내심을 갖고 읽어야 하는 이른바 ‘벽돌 책’이다. 내용이 워낙 방대하고 복잡해서 여기서 요약 소개하기도 어렵다. 이미 오래된 책이라 지금 구해 읽기도 쉽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중국에 관심이 있다면 꼭 한 번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은 책이다.


지금도 천안문 광장에는 거대한 마오쩌둥의 초상이 걸려있다. 많은 중국인들이 그를 존경한다. 대약진운동과 문화 대혁명이라는 희대의 역사적 과오를 생각하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중국인들은 과거를 모르는가? 아니면 과거를 잊었는가? 아니면 판단능력이 없는 것인가? 그러나 앞서 소개한 바 있는 『중국의 붉은 별』에서 『새로운 황제들』과 『불멸의 지도자 등소평』에 이르면 그것을 일면 이해는 할 수 있다. 중국인들은 그의 과오보다는 근대의 혼란에 종지부를 찍고 이른바 ‘신 중국’을 건설한 업적을 더 높이 평가한다는 뜻이다. 물론 우리는 국외자로서 여기에 동의하기 어렵다. 이들 책을 읽음으로써 오히려 그의 과오를 더 깊이 알게 되기 때문이다.


덩샤오핑에 이은 3대 황제는 시진핑이다. 덩 사후 장쩌민과 후진타오가 권좌를 이어받았지만, 그들은 ‘황제’가 아니라 현대 사회의 일반적인 선출직 지도자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새로운 황제들』은 끝난 것이 아니라 아직 진행형이다.


‘소황제’, ‘소분홍’, ‘중뽕’… 그것뿐일까?


‘중뽕’.

중국인들이 자국에 대한 ‘터무니없는’ 자부심을 드러내는 것을 조롱하는 말이다. 요즘 유튜브에서 조회수를 올리는데 가장 효과적인 콘텐츠로 들 수 있는 것 중 하나는 ‘중뽕’ 조롱이다. 외국에서 관광객들이 교양 없는 행동으로 비난을 받는다든가, 가짜 뉴스로 한국을 폄하하려 다가 “참 교육”을 당한다든가, 아무리 해도 축구는 3류, 4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든가, 황당한 가짜 먹거리를 만들어 팔아먹는다든가… 한번 보면 유튜브 알고리즘이 계속 비슷한 영상을 추천해서 자꾸 보게 된다. 꽤 재미있고 우습기도 하다.


‘중뽕’의 주력 집단은 ‘소분홍(小粉紅/샤오펀훙)’이다. 이는 인터넷에서 활동하는 ‘젊은 중국 배타주의적 민족주의자’를 지칭하는 말이다. 영어로는 ‘Little Pink’라고 한다. 나는 붉을 홍(紅) 자가 들어 있어 홍위병과 관련된 어떤 의미가 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이들이 처음 활동을 시작한 온라인 문학 웹사이트 '진강문학성(晋江文学城)'의 배경화면이 분홍색이었던 것에서 유래했다는 설명이다. 마침 분홍색은 당과 국가, 지도자를 사랑한다는 뜻도 있다고 한다.

소분홍의 세대는 1990년대 생인 ‘주링허우(九零后)'와 2000년대에 출생한 '링링허우(零零后)다. 즉 ‘소황제’들이다. 이들은 시진핑 체제에서 강화된 애국주의 교육을 받고 성장한 이른바 '시진핑 키즈'다. 이들에게는 중국이 최고이고, 공산주의가 최고이며, 공산당이 최고다.


‘국뽕’이란 ‘국가’의 ‘국’과 ‘히로뽕(필로폰)’의 ‘뽕’을 딴 신조어다. AI는 이것을 “국가에 대한 자부심이 과도하여, 마치 약에 취한 것처럼 비이성적이고 맹목적인 상태에 빠진 태도를 비판적 또는 희화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정의해 준다. 꽤 선명한 설명이다. 내 나라, 내 민족에 대한 자부심을 갖는 것을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그러나 ‘국뽕’이란 말은 그것이 이성적이 아니라 맹목적이고 과대망상적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게 문제다.

‘중뽕’ 조롱은 ‘국뽕’의 또 다른 표현법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내 나라, 내 민족의 자부심을 드높인다는 것이다. 그러면 중국의 국수주의 네티즌, 이른바 ‘소분홍’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이들이 올리는 영상은, ‘중뽕 조롱’ 영상이 우리 국내에서 그러한 것처럼, 중국에서 조회 수 올리는데 특효약이 된다. 그렇게 주고받으면서 서로에게 오물을 끼얹는 것이다.


‘국뽕’은 배제의 논리다. ‘우리’의 자부심을 드높임으로써 결속을 다진다. 그것은 곧 ‘그들’을 배제하는 것이다. 심리적으로는 ‘집단 나르시시즘’이다. 그래서 객관적인 사실에는 눈을 감고, 믿고 싶은 것만 믿으며, 사소한 비판에도 과도한 공격적인 태도를 보인다. 공동체의 안녕과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현상이 한국이나 중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넘쳐난다는데 있다. 트럼프의 ‘마가(MAGA/Make America Great Again), 중국의 ‘중국몽(中國夢)’과 전랑외교(战狼外交), 러시아의 '강한 러시아', 터키의 '네오-오스만주의', 인도의 힌두 민족주의(Hindutva) 등은 모두가 결국은 ‘국뽕’ 포퓰리즘 정치다. 일본의 "일본 대단해(日本すごい)" 신드롬, 헝가리의 오르반화(化)(Orbanization) 등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저마다 위대하다고 떠들다 보면 충돌이 일어나고, 그것이 세계를 어지럽힌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이스라엘과 이란, 인도와 파키스탄 등이 전쟁을 벌이고 있거나 으르렁거리고 있다. 심지어 캄보디아와 태국, 베네수엘라와 가이아나 등도 일촉즉발이다. 평화는 멀고 주먹은 가깝다.


이야기가 빗나갔다. ‘국뽕’이 위험한 것은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객관적인 사실을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중뽕’ 조롱하기에 중독이 되면, 정말 중국이, 중국인이 형편없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중국 축구가 지리멸렬, 계속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탈락한다고 그들이 언제까지나 그럴 것이라고 생각되는가? 중국 경제가 어려워서 청년들이 취업을 못하고, 조악한 복제품만 만든다고 중국 산업 전체가 형편없는 수준이라고 생각되는가? 조금만 생각해 보면 절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금방 깨달을 수 있다. 여기서 구체적인 통계수치나 다른 증거를 들이댈 필요도 없다.


다른 한편으로는 또 중국의 MZ세대는 ‘소분홍’이고 모두 맹목적인 애국주의에 매몰되어 세상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란 생각에도 의문을 가져봐야 한다. 중국 젊은이들이 모두 그렇게 ‘멍청할까? 역시 조금만 생각해 봐도 당연히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터이다.


지금 소개할 바로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새삼스럽게 이런 사실을 되새겼다. 그들도 우리와 똑같이 고민하고, 노력하고, 분투한다. 능력이나 지능의 차이가 있을까? 아니다. 비슷하다. 다만 처한 환경이 다를 뿐이다. 그렇다면 미래는 누가 더 현실을 직시하고 그것을 타개하려고 더 진지하게 노력하느냐에 달려있다.


‘중뽕’ 조롱은 재미있고, ‘국뽕’은 기분이 좋지만, 돌아서면 아무것도 아니다.


『젊은 인민의 초상』/피터 헤슬러/글항아리/2024


이 책은 25년, 한 세대 터울로 두 시대의 ‘속살’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무한한 가치를 가진다. ‘속살’이라 함은 해당 시대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사람들의 생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것은 현 시진핑 체제 하의 중국이며, 권력자나 체제가 아니라 보통 사람, 여기서는 특히 대학생의 일상에서 표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완전히 새로운 관점에서 중국 사회를 들여다보게 되는 것이다.

저자 피터 헤슬러는 미국의 언론인으로 논픽션 작가다. 그는 1996년부터 2년간 평화봉사단의 일원으로 쓰촨 성의 푸링사범대학이란 곳에서 영어와 문학을 가르쳤고, 25년 후인 2019년부터 2021년까지 다시 쓰촨대학 교수를 지냈다. 그 사이에 프리랜서 기자로 일을 했고, 중국 특파원, 카이로 특파원 등을 지냈다. 아내는 중국계 미국인이다. 중국에 대해서는 2001년 『리버타운』을 시작으로 『갑골문자』, 『컨트리 드라이빙』까지 3부작을 내놓았고, 이후 그 후속작이라 할 수 있는 이 책, 『젊은 인민의 초상』을 2024년 펴냈다.


내가 이 책을 고른 것은 중국의 비교적 젊은 2세대를 비교해 본다는 점이 흥미롭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즉 2019년 쓰촨대학에 갔을 때, 그가 가르치게 된 학생들이 바로 1990년대 푸링사업대학에서 가르친 제자들의 자녀에 해당하는 세대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외국인의 눈에 비친 이 두 세대 차이는 바로 중국사회의 변화의 단면을 가장 잘 보여주는 지표가 될 것이다. 즉 1930년대 『중국의 붉은 별』에서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의 『새로운 황제들』 시대를 거쳐 이 책으로 2020년대 초입의 신세대에 이르는 근 100년간의 중국 사회의 대서사(大敍事)가 완성되는 셈이다.

저자는 특히 단지 2년씩 두 번의 교사 경험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 ‘제자들’과 꾸준히 메일을 주고받으면서 그들의 삶을 ‘추적’했다.(나쁜 의미의 추적이 아니라, 꾸준한 소통을 의미한다) 때로는 설문조사도 실시한다. 그러므로 이 책은 25년간의 중국 2개 세대의 사고와 세태의 변화를 기록한 작품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새로운 황제들』과 『불멸의 지도자 등소평』은 둘 다 본문이 600 ~ 700쪽이 넘는 대작이다. 그런데 이 책도 600쪽에 육박하는 만만찮은 분량을 자랑한다. 중국이 커서 할 이야기도 많은가 보다. 앞의 두 책은 오래된 과거이고, 이 책은 현재이며, 앞의 두 책은 ‘위’를, 이 책은 ‘아래’를 각각 이야기한다.


저자가 평화봉사단원 자격으로 푸링사범대학에서 가르쳤던 학생들은 치링허우(七零后), 즉 70년대 생이다. 이들은 한자녀정책 전의 마지막 세대다. 즉 대개 가족의 막내들이다. 부모는 대부분 농민 문맹이고, 가문 또는 마을에서 처음 대학에 들어온 청년들이다. 이들 대부분은 형이나 누나들의 ‘희생’에 힘입어 대학에 다닌다. 즉 형이나 누나들이 돈을 벌어 학비와 생활비를 보태고 있다. 이것은 이들에게 평생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부담이 된다.


반면 25년 후 쓰촨대학에서 가르친 학생들은 2000년대에 출생한 ‘링링허우(零零后)’로 바로 치링허우의 자녀들이다. 즉 개혁개방의 혜택을 입어 대학을 졸업하고 물질적 풍요를 처음으로 누려보는 세대의 아들 딸인 것이다. 그러므로 부모세대보다 훨씬 ‘세련된’ 세대라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키워드처럼 되풀이되는 말이 몇 가지 있다. “모든 것이 변했으나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식자들의 묵인’, ‘체제의 정신분열적 특징’ 등이 그것이다. ,


모든 것이 변했으나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변화는 크다. 예를 들어 농구 팬인 경우, 90년대에는 싸구려 짝퉁 시카고 불스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면, 2020년에는 에어조던 정품 운동화를 신고 있다. 그러나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예컨대 정치적으로 민감한, 즉 당의 취향에 맞지 않는 말은 해서는 안 된다.

즉 저자의 제자들은 젊은이답게 자유분방하다. 예컨대 문학 작품을 재해석하는 연극 같은 데서는 저자가 깜짝 놀랄 정도로 창의적으로 번득이는 아이디어가 분출한다. 그러나 그것이 정치적으로 민감한 선을 넘지 않도록 스스로 제어한다. 그래서 저자는 쓰촨대학의 제자들을 ‘애늙은이’라고 표현한다.

그들은 체제의 한계를 알고 있고, 그 속박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시스템을 바꾸기보다는 ‘적응’하는 편을 선택한다. 변화에 도전하기에는 그 벽이 너무나 강고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또 다른 특징은 부모에게 순응하고, 자신의 진로를 자기 취향이 아닌 실용적인 성공 가능성에 따른 것이다.


무엇을 공부할지 부모가 정해주는 경우가 많았다. … 한편으로는 교육 및 경제적 기회가 늘어나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적 공간이 줄어드는 이 체제의 정신분열적 특징은 본인들 스스로가 모순의 본보기인 젊은이들을 만들어냈다. 중국의 테크놀로지를 꿈꾸는 조지 오웰 팬이라든지, 자동차 엔지니어링에서 일하고 싶어 하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식 마술적 사실주의자처럼. (p.114)


985대학

저자가 일했던 쓰촨대학은 베이징대학이나 칭화대학 같은 초일류는 아니지만 중국의 이른바 985대학, 211대학에 속하는 명문이다. 985대학이란 1998년 5월 당시 장쩌민 국가주석이 중국 내 일류대학을 세계적인 대학으로 키우자며 시작한 지원 프로젝트로 39개 대학이 들어갔고, 211대학이란 21세기 100개 명문대 육성 프로젝트에 속하는 대학을 말하는 것으로 985대학은 모두 여기에 속한다. 지금은 이들 두 프로젝트 모두 폐기되었지만, 이들 명칭은 그대로 남아있다. 특히 985 대학은 대입수험생의 98.5%가 못 들어간다는 뜻이라고도 한다.(과장이 좀 섞인듯하다)

즉 저자의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중국 내에서도 매우 우수한 그룹에 속한다는 뜻이다. 게다가 그곳은 쓰촨대학 내에서도 미국의 피츠버그 대학과 함께 운영하는 스쿠피(SCUPI쓰촨대학-피츠버그학원 Sichuan University-Pittsbourg Imstitute)란 곳으로 강의는 영어로 진행되며, 저자의 수업은 영어로 논픽션 등 글쓰기다. 저자는 학생들이 주제를 선택해 스스로 취재하여 글을 쓰도록 한다. 즉 최소한 중국 상위 5% 정도에 드는 학생들로 하여금 정치 경제 사회 등의 문제에 대한 ‘논쟁적인’ 글쓰기를 하는 수업이다. 그래서 서두에 이 책의 내용이 ‘해당 시대의 표상’이라고 한 것이다.


학생들은 인터넷에 금지된 내용을 올렸다가 경찰 조사를 받았던 이야기에서 한 자녀 정책 속에서 자신들의 어머니가 낙태한 사연, 언론과 사상의 자유, 심지어 동성애 문제에 이르기까지 온갖 이슈에 대하여 자신들의 생각을 풀어낸다. 그들의 사고와 글쓰기는 놀랄 만큼 자유분방하고 수준이 높다. 중국이 미래에 무섭게 발전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러나 ‘정신분열적 특징’이 발목을 잡는다. 관련해서 2가지 에피소드가 기억에 남는다.


쥐바오

하나는 ‘쥐바오’ 에피소드다. ‘쥐바오’는 한자로 ‘거보(擧報)’, 우리말로는 ‘제보’에 해당한다. 그러나 뉘앙스는 일종의 ‘밀고’ 행위를 가리킨다. 즉 “학생이 교수의 정치적 잘못’을 신고하는 것’이다. 저자는 어떤 이유로 ‘쥐바오 당한 것 같다’. 그러나 그 전말은 끝내 밝혀지지 않는다. 그리고 실제 공식적으로 신고가 접수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온라인상에서 한참 시끌시끌하다가 잦아들었다. 그러나 저자는 임기를 마치고 재계약을 희망했으나 거부당한다. 결국 저자에 대한 ‘쥐바오’는 당장은 성립되지 않았으나, 문제 있는 사람을 계속 쓰는 모험을 할 필요가 없다는 ‘보신주의’로 막을 내리게 되는 셈이다.


이 에피소드는 첫째, 정치적으로는 공식, 비공식적인 감시체제가 철저히 작동되고 있으며, 둘째 실제 문제가 없다고 하더라도 사실관계나 책임소재는 밝혀지지 않으며, 셋째 문제가 있건 없건 당사자는 불이익을 받게 된다는 결말을 보여준다. 즉 중국 사회는 그런 시스템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학생들이 시스템을 변화시키려고 하기보다는 적응하는 편을 선택하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것이다.


판창

‘판창’(翻牆)은 몰래 담을 넘어간다는 뜻이다. 이 말은 만리방화벽과 관련이 있다. 알다시피 중국은 만리방화벽을 통해 자유로운 인터넷 검색을 차단한다. 이것은 특히 학자들에게는 손발을 묶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대학은 교수들에게 VPN, 즉 가상사설망을 제공해 만리방화벽을 피해 갈 수 있도록 한다. 학생들도 당연히 VPN을 이용해 ‘담을 넘어간다’.

당이 이런 현실을 모를 리 없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두고, 혹은 묵인하면서, 언제나 당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함으로써 ‘알아서 기도록’ 하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코로나19 봉쇄 시기에 기숙사에 ‘갇힌’ 학생들이 실제로 몰래 담 넘어 외출하기도 하고, 외부 배달음식을 받는 등 현실 세계에서도 ‘판창’이 유행했다는 점이다. 결국 중국은 ‘판창’ 사회인 셈이다.


식자들의 묵인

그런 정신분열적 특징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유지되는 요인으로 가장 중요하게 꼽은 것은 ‘식자(識者)들의 묵인’이다. 저자는 하버드의 중국학자 엘리자베스 J. 페리를 인용하면서 이것을 과거제도와 연관 짓는다. 과거제도는 관리의 등용문이다. 따라서 과거제도 하에서는 학문이 시험 합격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따라서 학자는 왕조에 순응적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버드대학의 역사학자인 엘리자베스 J. 페리는 고대 중국의 제도가 ‘식자들의 묵인’을 만들어내는 데 효과적이었다고 설명했다. 중국 정치 체제 내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은 체제에 반대할 가능성이 적었고, 이것이 중국 왕조의 안정에 기여했다는 것이 페리의 견해였다. (p.160)


이것은 현대 중국에서도 작동한다. 특히 공산당 체제에서 더 그러한 것 같다. 그러나 ‘식자들의 묵인’이 지속될지는 의문이다.


중국인들은 사회, 경제, 교육에서 그토록 많은 변화를 주도해 왔는데 정치에서는 왜 그렇게 하지 못할까? 그러나 다른 한쪽의 논리도 만만치 않다. 많은 중국인, 특히 지방에 있는 사람들은 이 모든 변화를 위해서는 정치적 안정성이 필요했다고 믿었다.
하지만 젊은이들의 생각은 달라 보였다. 쓰촨대학의 학생들은 봉쇄정책에 대해 훨씬 더 분개했고, 그로 인해 근본적으로 관점이 바뀌었다고들 했다. 때로 나는 전통적인 ‘식자들의 묵인’이 이들 세대에도 계속될 수 있을지 궁금했다.(p.561)


케니 지의 ‘고잉 홈’과 ‘유 아 마이 선샤인’

이 두 미국적인 곡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저자는 중국에서 모든 종류의 행사나 영업이 끝날 때 케니 지의 ‘고잉 홈’ 연주 음악을 트는 것에 놀란다. 또 거리에 청소차가 물을 뿜으며 지나갈 때는 ‘유 아 마이 선샤인’이 흘러나온다. 이 곡은 미국 루이지애나 주가(州歌)다.


‘고잉 홈’은 1990년대에 어마어마한 인기를 누렸고, 세월이 흐르며 공식행사를 마칠 때 이 곡을 트는 것이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이 또한 파블로프의 개를 연상케 한다. 지구상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가 놀랍도록 짧은 세월 안에 10억 명이 넘는 국민을 케니 지의 곡을 듣는 순간 질서 있게 퇴장하도록 훈련시킨 것이다.(p.94)


시진핑

시진핑에 대하여 저자는 ‘인민과 괴리된 지도자’로 평가한다. 중국인들이 마오쩌둥이나 덩샤오핑에 대하여는 마치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사람에 대하여 이야기하듯 하지만, 시진핑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학생들도 존경하는 지도자로 20명 이상이 각각 마오나 덩을 꼽을 때 시를 꼽은 경우는 단 한 명이었다는 것이다. 또 에세이에 마오나 덩을 언급하는 경우는 많았어도 시를 언급한 경우는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시는 ‘황제’에서 ‘신’의 자리로 올랐다. 그 이유를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반면 시는 마오보다 홍위병의 망령에 더 큰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길거리 시위와 조직된 단체를 두려워했고, 권력을 공고히 해야 한다고 믿었다. …. 시는 모든 권력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그의 얼굴과 그의 말은 도처에 존재했고, 인민들은 제아무리 애매한 연설이나 지시에도 능숙하게 대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정서적 유대는 없었다.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 그랬다.(p.515~516)


국가의 방향이 신과도 같은 지도자 개인에 의해 결정될 순 있지만 그 지도자가 특정 시대나 연령층을 대표하지 않는다. 신은 당에 소속되어 있고 당은 세월의 흐름에서 비켜서 있다. … 일반 시민의 정치 참여라는 측면에서 보면 빈센트 세대와 부모 세대 사이에, 즉 링링허우와 치링허우 사이에 실질적인 차이가 없다. 권위주의 체제의 한 가지 특징은 모든 사람을 어린이처럼 대한다는 것이다. (p.124)


‘저항적 순응’의 모순


『젊은 인민의 초상』에서 저자가 묘사하는 중국은 『새로운 황제들』이나 『불멸의 지도자 등소평』에서의 중국과는 판이하다. 그것은 시대의 차이도 있지만, ‘위’와 ‘아래’의 시각 차이가 크다. 이로써 실제 중국의 모습을 더욱 깊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저자가 접한 대학생들이 중국의 모든 젊은이를 대표한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최소한 젊은이들의 많은 특징을 잘 보여준다고는 할 수 있다. 또 25년 전에 가르쳤던 제자들의 인생행로는 개혁개방기 중국 사회의 단면이기도 하다. 어떤 이들은 고향을 떠나 널린 사업기회를 잘 잡아서 큰돈을 벌었고, 어떤 이들은 좋은 교사로서 훌륭한 삶을 살고 있다. 어떤 이들은 이혼을 했고, 대부분은 부부간의 여러 가지 문제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가족관을 고수하면서 그럭저럭 봉합해서 잘 살고 있다.


이렇게 이 책에서는 중국 사회의 시스템이 여러 가지 모순에도 불구하고 잘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코로나19 봉쇄 시기에 이 모순적인 시스템은 그 강력한 통제 기능이 전염병을 세계 다른 여러 나라보다 효과적으로 막아내는 역설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곳곳에 체제가 봉착한 한계를 보여준다. 젊은이들은 ‘정신분열적’이고 모순적인 가치관과 행동양식을 가지고 있으며, 사회는 이들을 제대로 수용하지 못하고 있다. 체제 순응적이고, 저항보다는 포기를 선택하는 ‘식자들의 묵인’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한마디로 중국은 지속가능성과 붕괴가능성을 동시에 지닌 모순적인 체제인 것처럼 보인다.


또한 앞서 살펴보았던 세계의 다른 부분과도 다른 점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인도의 양면성, 러시아의 극단성, 아프리카의 복잡성 또는 비정형성, 아랍세계의 정체성(停滯性) 등과는 완전히 다른 안정 속의 다면성이라고 할까, 또는 잠재적 폭발성이라고 할까, 아니면 저항적 순응이라고 할까…


두 갈래 길(물론 책으로)이 보인다. 하나는 세계의 다른 지역을 더 탐험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중국의 또 다른 면모를 살펴보는 것이다.

중국보다 훨씬 모순적인 면모를 보이는 곳으로 대조적인 지역은 아마 라틴아메리카일 것이다. 얼마나 모순적이고, 혼란스러웠으면 마술적 사실주의란 것이 탄생했을까?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 불가능해서 온갖 환상적인 요소가 뒤섞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실주의보다 더 사실적이라는 역설이다. 쿠바 작가 알레호 카르펜티에르가 ‘경이로운 현실’이라고 표현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라틴아메리카의 ‘경이로운 현실’은 다음 화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여기서는 중국 이야기를 더 다양하게 살펴볼 수 있는 두 작품으로 모옌의 『개구리』와 아라이의 『공산』을 골랐다.


『개구리』/모옌/민음사/2021


『개구리』는 중국의 한 자녀 정책인 ‘계획생육정책’이 빚어낸 사회문제와 갖가지 비극을 정면으로 파헤치는 작품이다. 권력이 짓밟아버리는 인간을 그린 것으로 읽을 수도 있고, 닥쳐온 ‘재난’을 헤쳐 나가는 민초들의 투쟁을 그린 것으로 읽을 수도 있다. 거기에는 또한 물질만능주의에 물들어가는 모습, 돈이 권력이 되어 약자를 ‘착취하는 모습도 보인다. 한 마디로 ‘계획생육’을 모티브로 새로운 시대의 혼돈에 맞서는 가치관을 모색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 모옌은 2012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다. 1988년 베를린 영화제 황금곰상을 받은 장이머우 감독의 「붉은 수수밭」의 원작자이기도 하다. 본명은 관모예(管謨業). 필명 ‘모옌(莫言)’은 ‘글로만 쓸 뿐 말로 하지 않는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1955년 중국 산둥성 가오미현에서 태어나 소학교 5학년 때 문화 대혁명이 일어나 학업을 중단하고 귀향하여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76년 인민해방군에 입대했고, 해방군 예술학원 문학과에서 본격적인 문학 수업을 받았다. 이후 베이징사범대학, 루쉰문학원 등을 거쳤다.


『개구리』는 2009년 작품으로 중국 작가 협회에서 제정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 중 하나인 마오둔 문학상을 수상작이기도 하다.

‘개구리’는 알을 많이 낳기 때문에 많은 문화권에서 다산, 행운, 부활 등의 상징으로 꼽힌다. 이 작품의 제목 또한 바로 그 때문이며, 작품 속 불법 위장 대리모 사업의 상징으로도 사용된다.


‘계획생육’은 중국이 인구폭발에 대응하기 위해 실시한 산아제한 정책이다. 도시에서는 한 자녀만 허용하고 농촌 지역에서는 첫 아이가 아들이 아닐 경우, 출산 8년 후 둘째 아이를 허용하는 내용이다.


문제는 강압적이라는 데 있다. 우리나라도 ‘가족계획’ 등의 이름으로 산아제한 정책을 시행한 바 있다. 그러나 다자녀 출산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혜택’에서 불이익을 주는 정책이었다. 즉 일부 불이익을 감수한다면 자유롭게 출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국은 강압적 금지였다. 다자녀 출산이 ‘범죄’가 된 것이다. 당연히 극심한 반발이 있었고, 숱한 사회문제를 만들어냈다. 대표적인 것이 딸을 낳으면 아예 출생 신고를 하지 않아 무적자가 양산된 것이다. 이는 중국, 특히 농촌지역의 강한 남아선호사상 때문이다.


『개구리』에서는 이런 갖가지 문제점이 적나라하게 묘사된다. 작품은 주인공이 일본의 스기타니 요시토 선생에게 ‘희곡’을 쓰고 있다면서 그 진척 내용을 알려주는 편지 형식으로 돼 있다. 수신자인 스기타니 요시토 선생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그렇게 스토리가 진행되고, 마지막에는 완성된 극본이 첨부되어 있다. 매우 독특한 형식의 소설이다.


주인공은 화자의 고모인 산부인과 의사다. 그녀는 그 일대에 사는 사람 모두를 ‘받아냈다’. 그러나 ‘계획생육’ 정책이 시행되면서 상황은 완전히 뒤집어진다. 그녀는 출산을 돕는 것이 아니라 막는 선봉장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생명의 화신에서 사망의 화신이 되어버린 것이다. 몰래 출산하다가, 또는 낙태 수술을 받다가 목숨을 잃기도 하고, 임신한 가정에 문을 부수고 들어가 임부를 잡아들이기도 한다.

이런 와중에 돈과 권력을 이용해 자녀를 얻는 불법도 성행한다. 심지어 대리모 사업으로 돈을 버는 사람도 등장하고, 대리모로 전락하는 불우한 여성의 스토리도 안타깝다.


작가는 『개구리』를 통해 ‘계획생육정책’의 민 낯을 고발하고, 개혁개방기 중국사회에 만연한 돈과 권력 만능주의를 개탄한다. 그러면서 여러 갈래로 엇갈리는 인간의 운명을 씨줄 날줄 삼아 커다란 인간 드라마의 ‘벽화’를 완성한다. 말하자면 ‘신중국 인간 드라마’인 셈이다.


『공산』/아라이/위즈덤하우스(예담)/2017(절판)


『개구리』가 「계획생육정책」으로 그리는 ‘신중국 인간 드라마’라면 이 작품은 ‘티베트인의 삶으로 그린 중국 현대사’다. 저자와 주인공, 그리고 다른 주요 등장인물들 모두 티베트 사람이고, 무대도 티베트 인들의 고장이다. 티베트의 시각으로 중국을 ‘살아내고’, ‘본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하고, 그래서 의미가 더 큰 작품이다. 그래서 국내 번역본이 절판 상태라는 사실이 더욱 안타깝다.


저자 아라이(阿來)는 1959년 중국 쓰촨 성 서북부의 티베트족 자치구에서 태어난 티베트인으로 중국 문단의 대표적 작가로 꼽힌다. 2000년, 장편소설 『색에 물들다(塵埃落定)』로 중국의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인 마오둔상을 받았다. 역대 최연소 수상자였고, 앞서 소개한 모옌보다도 앞선 수상이었다. 2007년 저명한 중국 평론가 열 명이 꼽은 ‘실력파 중국 작가 순위’에서 모옌을 뒤이어 2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소수민족 출신이면서도 중국 문단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구축한 실력파 작가라는 이야기다.


『공산』은 쓰촨 성 서부의 첩첩산중 마을인 지촌을 배경으로 20세기 후반 50여 년의 세월을 관통하는 이야기다. 국내 번역본은 3권의 별책으로 돼 있다. 실제 작품은 제1권부터 제6권까지 모두 6권으로 구성돼 있으며 각 권은 하나의 본편 스토리에 한 가지 사물 중심의 이야기인 ‘사물 필기’, 한 사람의 스토리를 풀어나가는 ‘인물 소묘’ 등 2편이 첨부돼 있다. 그러므로 전체적으로 보면 마치 18편의 단편 모음집처럼 되어 있다. 스토리 자체는 일관성이 없다. 그러면서도 이들 각각의 이야기가 모여 하나의 작품을 이루고 있다. 18개의 단편으로, 6권의 소설로, 또는 전체로서 하나의 대하소설로 읽어도 되는 일종의 옴니버스 소설이다.


작품의 무대가 되는 ‘지촌’은 작가가 창조한 가상의 공간이다. 그곳은 티베트 농촌 마을의 원형이며 자연이 살아있고, 신화가 숨 쉬며, 원시성이 꿈틀대는 매혹적인 공간이다. 아람들이 고목이 숲을 이루고, 협곡 깊숙한 높은 곳에는 신성한 호수가 있어 함부로 범접할 수 없다. 그러나 중국이, 사회주의가, 현대화가, 산업화가, 도시화가 슬금슬금 밀려 올라온다. 멀리 베이징과 상하이, 충칭 등의 변화가 ‘지촌’까지 시차를 두고 서서히 갉아먹어 들어오는 것이다.

문명과 이념과 돈을 위해 나무가 베어지고, 산이 깎여 나간다. 자연은 점점 헐벗고, 신화는 질식해 나가며, 원시성은 소멸된다. 바람을 부리고 불을 통제하는 무사, 거목 위에 집을 짓고 백과사전을 읽으며 질문만 던지는 기인, 아름다운 목소리의 여인과 그녀를 사랑하는 마지막 사냥꾼, 신비의 고대 왕국의 후손 등 티베트의 영혼을 간직한 사람들도 하나 둘 사라진다. 주민들은 세파에 물들어가고, 돈을 벌기 위해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서며, 그중 ‘용감한 사람’들은 도시로 나간다. 그렇게 자연과 사람은 모든 신비를 잃고 사회주의와 물질문명 속의 한 톱니바퀴가 되며, 새들과 물고기들이 떠난 신비의 호수는 그저 필요한 물을 구하는 용도로 전락하고 만다.


나는 이 소설의 첫 에피소드 사생아와 ‘영원한 팜므파탈’ 엄마의 스토리에 매혹되어 3권을 모두 읽게 되었다. 사생아는 엄마를 돌보지만, 그는 자신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책을 읽는 나도 인식하지 못했다. 그리고 뒤이어 등장하는 여러 티베트인의 전형 또한 매혹적이었다. 산이 점점 ‘비어 가는’(그래서 제목이 ‘공산(空山)’이다) 것과 함께 사람도 함께 ‘비어 가는’ 모습은 비감했다. 도시에 나가 큰 성공을 거둔 것처럼 행세하는 이는 가짜 휴대폰으로 중요한 통화를 하는 척하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과시한다. 그것이 바로 ‘공산’, 사실은 '비어있음'이다. 그렇게 지촌은 ‘비어’ 버리고, 관광단지로만 남아 아무 연고도 없는 중국인들이 한때 스쳐 지나가는 곳이 된다.



티베트 기행(紀行)으로 가장 유명한 책을 꼽으라면 프랑스 여성 알렉산드라 다비드 넬의 『영혼의 도시 라싸로 가는 길』이 있다. 1927년 발표된 이 책은 중국 윈난성에서 3천 km를 걸어서 티베트의 수도 라싸에 들어가는 데 성공하고, 거기서 2달을 체류한 기록이다. 그녀는 양아들인 티베트 승려 용덴 라마와 함께 순례하는 무식한 시골 아낙네 노릇을 하며 별다른 장비도 없이 험준한 티베트의 고산을 여행했다. 이 책 역시 국내 번역본은 절판되었지만, 지금도 가끔 들춰보는 나의 애장서다. 이 책에서 보는 티베트의 모습에, 『공산』에 나오는 티베트인들의 숨결이 더해지니, 완벽한 ‘티베트 여행’이 된다. 『공산』의 번역자는 이렇게 말한다. “진정한 티베트를 알고 싶다면 포탈라궁이 있는 라싸를 여행할 것이 아니라 이 소설을 읽어야 한다.”

그러나 책을 덮으면, 티베트는 감추어지고, 중국이 그 자리에 선 것을 보게 된다.



신이 없는 땅의 황제


이 글의 제목 “신(神)이 없는 땅의 황제”는 공산당의 무신론에 대한 것이 아니다.


이 글을 쓰는 과정에서 문득 세계 주요 문명 중에서 유독 중국만은 “신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흔히 세계 4대 문명이라고 부르는 곳에는 모두 절대자-신이 있다. 또는 있었다.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는 문명도 서구에는 기독교의 하나님(또는 하느님), 이슬람권의 알라 등의 절대자-신이 존재한다. 그러나 중국은 ‘천명’을 이야기하지만 절대자-신은 없다.


믿음, 신앙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문명은 절대자-신을 숭배함으로써 세속 권력이 적절하게 제어된다. 이것은 종교 권력이 세속 권력을 지배한다는 뜻이 아니다. 신의 존재를 인정함으로써 그런 유무형의 관계가 형성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중국은 그렇지 않았고, 지금도 그렇지 않다. ‘천명’은 절대자-신이 부여하는 것이 아니다. 황제가 ‘가지는’ 것이다. 정치를 잘하거나 전쟁을 잘해서 승리하면 ‘천명’을 얻고, 그렇지 못하면 잃는다.


그리하여 현대 중국에서 신은 당에 흡수되었다. 그랬던 것이 이제 시진핑이 ‘황제’처럼 군림하면서 ‘천명’을 거머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앞서 『젊은 인민의 초상』에서 인용한 다음 문장이 예사롭지 않게 보인 것이다. 이 책의 저자도 은연중에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것인지도 모른다.


신은 당에 소속되어 있고 당은 세월의 흐름에서 비켜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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