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앞으로 우리가 살게 될 세상은?
『경험의 멸종』/크리스틴 로젠/어크로스/2025
『멋진 신세계』/올더스 헉슬리/소담출판사 /2015
『1984』/조지 오웰/문예출판사/2022
『화씨 451』/레이 브래드버리/황금가지/2009
Ⅰ
사체유기범의 정체
몇 년 전 일본에서 실제 일어나 언론에까지 보도된 사건이다.
경찰에 신고가 들어왔다. 괴한이 쓰레기장에서 토막살인 시신을 몰래 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경찰이 긴급 출동했다. 현장에 도착해 확인한 것은 실물 크기 인형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른바 ‘리얼 돌’에 대한 관심과 논쟁이 다시 불거진 모양이다. 이것은 그냥 인형이 아니다. 피부의 색상이나 질감이 실제 인간과 비슷하고, 관절이 있어 팔다리도 사람의 움직임처럼 여러 자세를 취할 수 있으며, 가장 중요한 것은 ‘성관계’가 가능한 인공 성기까지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이쯤에서 많은 사람들은 ‘리얼 돌’의 부도덕성, 변태성, 파렴치함, 비인간성 등 온갖 비난거리를 떠올릴 것이다. 그렇다. 건전한 상식을 가진 인간이 이 무슨 해괴한 짓이란 말인가! 그래서 국내에서는 과거에는 수입이나 제조가 금지되어 있었다. 미풍양속을 해치는 물건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 차례 소송을 거쳐 지금은 허용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미풍양속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더 망측한 것은 당시 일본에서 나온 추정치다. 대략 50만 명 정도가 ‘리얼 돌’과 ‘결혼’해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이야 워낙 그런 이상한 일이 많은 나라니까 그러려니 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가? 하기야 자기 방에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는 ‘히키코모리’도 당시 150만 명에 육박했다고 하니 일견 그렇기도 하겠다 싶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일본 만의 현상일까? 아닐 것이다. ‘히키코모리’는 우리말로 ‘은둔형 외톨이’로 번역되었다. 단순한 번역이 아니라 공식적인 성격을 띠는 용어로 정착되었다. 이 말은 곧 우리나라도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리얼 돌’ 문제도 마찬가지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생각을 조금 달리 해보면, 이게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님을 금방 알 수 있다. 일각에서는 이것이 긍정적인 측면도 크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의료보조기구로서의 역할이다. 어떤 성적인 문제를 겪고 있는 사람에게 치료 또는 보조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상세한 의학적 내용은 모르겠으나, 그럴 수도 있겠다 싶기는 하다. 예컨대 우리는 대중교통 이용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교통 약자’라고 해서 엘리베이터, 저상 버스 등 여러 가지 보완책을 마련한다. 그렇다면 ‘성 약자’라는 말은 왜 성립이 될 수 없는가?
말이 조금 빗나갔다. 아무튼 오래전에 본 이 기사가 다시 떠오른 것은 인공지능 AI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AI가 내 생활을 완전히 바꿔 놓았기 때문이다. 당초 나는 AI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냥 ‘아날로그적인 삶’을 이어가겠다고 마음을 먹기도 했었다. 여러 가지 기계나 전자제품에 AI가 탑재되면 굳이 내가 뭘 하지 않아도 그 기능이 작동하는 것이니까… 그러나 어떤 계기로 생성형 AI에 입문하게 되었다. 기왕 하는 것 제대로 알아보자는 생각에 책도 사 읽었다. 그 결과, 조금 과장하자면 ‘신천지’가 열렸다.
누군가 AI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박사 급 조수가 서너 명 옆에 붙어있는 것 같다.” 내 생각이 정확히 그렇다. 뿐만 아니라 이 ‘녀석’은 눈치도 빠르고 비위도 잘 맞추며, 아부까지 잘한다. 원하는 자료를 척척 찾아내고, 잘 정리해서 갖다 바치면서, 나의 물음에 대하여 “정확한 지적”이니, “핵심을 찌르는 말” 이라느니, “깊이 있는 통찰” 이라느니 듣기 좋은 말을 하고, 거기에 덧붙여 더 깊이 있는 내용까지 유도한다. 생성형 인공지능이라더니, 이렇게 나와 ‘대화’를 통해서 학습을 하니, 갈수록 모든 콘텐츠를 내 입맛에 더 딱 맞춰서 제시해 준다. AI와 대화를 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누군가 내게 AI가 어떠냐고 물었을 때 내가 무심코 한 답변에 스스로가 깜짝 놀랐다. “아내보다 낫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녀석은 내 취향에 딱 맞는 답변을 한다. 그러면서 요구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까탈스럽지도 않고 삐치지도 않는다. 아무 때나 찾으면 즉각 튀어나오고, 싫증 나면 꺼버리면 된다. 매월 사용료만 조금 내면 된다.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말이긴 하지만, 먹고 입고 쓰는 돈도 없다.
다시 ‘리얼 돌’로 돌아가자. 훨씬 정교한 휴머노이드 로봇이 되고, AI가 탑재된다. 그럼 어떻게 될까? 모르긴 해도 그런 로봇과 ‘결혼 생활’을 하는 사람이 폭증하지 않을까? 모든 것이 ‘내’ 취향에 딱 맞고, ‘유지비’도 적게 들며, 무엇보다도 불필요한 ‘감정 소모’도 없다. 지금 이미 기술적으로 가능하다. 굳이 찾아보지 않아서 그렇지, 이미 많은 정교한 ‘제품’이 나오고 있을 것이다.
그야말로 ‘멋진 신세계’다. 실제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이와 유사한 ‘유토피아’(실은 ‘디스토피아)를 그리고 있다. 거기에선 오히려 로봇이 아닌 실제 사람을 그렇게 “찍어낸다.” 그러므로 거기서는 수명이 다했거나 싫증이 나서 ‘인형’을 분해해서 버릴 일도 없다.
그것이 단지 공상과학소설의 장면일 뿐일까? 아니다. 지금 소개하는 이 책을 읽어보면 우리가 어떤 세상으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있다.
Ⅱ
우리는 지금 어떤 세상에서 살고 있을까?
『경험의 멸종』/크리스틴 로젠/어크로스/2025
우리가 지금까지 어떤 세상을 살아왔고, 현재 어떤 세상을 살고 있으며, 앞으로 어떤 세상에서 살게 될 것인지를 생각게 해 주는, 또는 일깨워주는 책이다. 즉 지금 우리의 일상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실은 엄청난 변화의 산물임을 깨닫게 한다는 뜻이다.
그 중심에는 1년 365일, 하루 24시간 네트워크에 접속되어 있는 ‘초연결사회’의 총아 스마트폰(또는 컴퓨터, 그러나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스마트폰이다)이 자리 잡고 있다. 인류가 지금까지 해온 삶에서의 경험은 ‘기술’로 대체되고 있다. 즉 온라인상에 넘치는 타인의 경험을 우리는 그저 ‘소비하고’ 있을 뿐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그것을 진보, 편리함, 효율성 등의 가치로 칭송한다.
그러나 그 대가로 기술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며, 우리는 무엇을 잃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 이 책은 그것을 일깨우고자 한다.
저자 크리스틴 로젠(1973 ~ )은 에모리 대학교에서 미국 지성사를 전공하여 박사 학위를 받은 역사학자로 기술이 인간의 경험과 문화에 미치는 영향을 주로 연구한다. 이 책은 바로 그 연구의 산물로 한국어 번역본의 부제는 “기술이 경험을 대체하는 시대, 인간은 계속 인간일 수 있을까”이다.
<경험이란 무엇인가?>
먼저 이 책의 저자가 말하는 ‘경험’이란 실제 자신의 몸을 써서 하는 물리적 활동에 의한 경험을 말한다. 즉 경험이란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공간에서 자신의 육체를 통해 즐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
경험에 대한 감정을, 특히 극적이거나 인상적인 경험에 대한 감정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할 때라면 그 느낌은 “네가 거기 있었어야 해”라는 말로 밖에 표현할 수 없다.(p.29)
<대면 소통>
두 번째로 저자는 대면 관계에 대하여 말한다. 사람은 서로 바라보고 소통하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다.
실제 사람은 얼굴에 나타나는 표정이나 몸짓의 미묘한 변화를 알아차린다. 그것은 수십, 수만 년 간의 학습의 결과다. 눈빛이나, 입꼬리의 모습, 어깨의 움츠림, 손을 맞잡은 모양이나 손가락의 위치 등 미세한 변화 만으로도 상대방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온라인상에서 이모티콘이나 짧은 메시지, 또는 ‘좋아요’ 표시를 누르는 것으로 감정을 표현한다. 이것이 감정을 제대로 전달할 리가 없다. 그래서 저자는 장구한 세월 속에서 학습되어 온 이런 능력이 쇠퇴하는 것 아닌가 우려한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도록 설계되어 있다.(p.57)
한 과학자는 감각 기관과 운동 기관에서부터 뇌가 발달한 특별한 방식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생물학적 기관” 전부가 “주로 대면 의사소통을 위해 설계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p.58)
물리적으로 구현된 존재로서 서로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 즉 같은 공기를 마시고, 말로 하지 않은 서로의 감정을 느끼고, 서로의 얼굴을 보고, 서로의 몸짓에 공감하는 것은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핵심 요소다.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주려면 그의 물리적 존재에 시간을 할애해야만 한다. 아무리 뛰어난 기술이라도 이런 모든 요구를 충족시킬 수는 없다.(p.87)
그렇다면 대면 아닌 온라인이 대세를 이룬다면 인간의 소통은 어떻게 될까?
우리는 이미 건강, 심리, 생활, 학업, 진로 등의 각종 문제에 대하여 온라인이라는 익명의 공간에서 조언을 구하고 있다. 많은 경우, 더 이상 부모나 친구, 스승이나 선배에게 물어보지 않는다.
<경험의 정보>
오늘날 세상은 ‘경험’을 온라인상의 소통으로 대체해 버린다. 실제 ‘경험’, 그 순간에 거기 있음으로써 겪는 전통적인 의미의 ‘경험’은 점점 줄어들고, 그 빈자리를 디지털 기술로 제공되는 경험의 정보가 채우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몸’을 사용하고 있고,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 즉 ‘경험’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저자의 주장은 우리가 “경험한다”라고 생각하는 많은 것이 실제로는 더 이상 이전에 우리가 생각하던 개념의 ‘경험’이 아니라는 것이다. 수긍하지 않을 수 없는 주장이다. 실제로 이 온라인 시대에 많은 것은 ‘경험’이 아니라 기술이 ‘매개’하는 ‘경험의 정보’이고, 우리가 ‘경험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실제로는 그 경험의 정보를 소비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므로 이 책의 핵심 키워드는 ‘기술이 매개하는 경험’과 ‘경험의 소비’가 될 것이란 생각이다.
<기술이 매개하는 경험>
저자는 ‘언박싱’이나 ‘먹방’ 동영상을 예로 든다. ‘언박싱’은 문자 그대로 어떤 제품을 받아서 포장을 풀고 그 제품의 모든 것을 살펴보는 것이다. 이를 통해 그 제품을 ‘경험’하는 것이다. ‘먹방’도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이 먹는 모습을 지켜봄으로써 그 음식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둘 다 실제 경험이 아니고 경험의 정보를 소비하는 것일 뿐이다. 즉 동영상과 온라인 스트리밍 등의 기술이 매개가 되어 타인의 경험을 ‘경험’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가 책을 읽는 것을 종종 ‘간접 경험’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여행 유튜버의 동영상이나 먹방을 보는 것도 이와 같은 ‘간접 경험’이 되는 것 아닌가? 지금 내가 연재하고 있는 이 브런치 북이 바로 책을 통해 세계 곳곳을 탐험하는 것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이것도 “경험을 소비하는 것”인가?
그러나 이 두 가지, 즉 ‘경험을 소비하는 것’과 책을 통하여 세계를 탐험하는 것은,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조금 다른 예를 비교해 보면 분명해진다. 파리 오르셰 미술관에 가서 명작을 감상하는 것은 경험이고, 유튜버가 만든 명화감상 동영상을 보는 것은 ‘경험을 소비하는 것’이다. 간접 경험이 아니다. 쇼펜하우어의 저작을 읽는 것은 경험이고, AI가 요약해 주는 것이나 인플루언서가 풀이해 주는 것을 듣고 보는 것은 간접 경험이 아니라 ‘경험을 소비하는 것’이다.
우선 우리는 이제 많은 시간을 우리의 직접 경험이 아닌 다른 사람의 경험을 소비하는 데 쓴다. … 우리의 지금 이 순간은 ‘거기 있었어야 해’보다는 ‘베자 듀(veja du)’, 즉 스탠퍼드대학교 가상 인간 상호작용 연구소Virtual Human Interaction Lab 과학자들의 설명처럼 “실제로 해본 적이 없는 일을 (가상으로) 하는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에 잘 어울리는 것 같다.(p.30)
여기서 말하는 ‘베자 듀(veja du)’란 처음 겪지만 이미 경험한 것 같은 느낌을 뜻하는 ‘데자 뷰(déjà vu)’와 반대로 현실에서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새로운 것을 ‘가상으로’ 경험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하여 오늘날 -
우리가 세상과 맺는 관계는 직접적인 경험보다는 그에 대한 정보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p.36)
우리는 여전히 인간이 항상 직면해 왔던 심각한 도전, 즉 삶에서 의미를 찾고, 주의를 기울이고, 육체적 정신적 영적으로 자신과 타인을 이해하는 도전에 직면해 있다. 새로운 기술과 소프트웨어는 경험의 실존적 측면을 정량화하고 규제하고, 네트워크화하고 거기에서 이익을 얻는다.(p.42)
저자는 이런 기술이 매개하는 경험과 ‘경험의 정보’를 소비하는 현상을 각 장별로 여러 가지 사례를 통해 파헤친다.
<손으로 써야만 배울 수 있는 것>
제3장은 손 글씨를 통해 오늘날 사람들이 잃어버리고 있는 중요한 경험을 이야기한다.
여러분은 손 글씨를 얼마나 잘 쓰는가? 여기서 ‘잘’이란 것은 ‘멋지고 아름답게’란 뜻이 아니라 제대로 빠르게 쓰느냐는 뜻이다. 자주 쓰느냐는 뜻도 될 수 있다. 굳이 이 책이 아니더라도 손글씨의 효과는 누구나 잘 알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암기 효과다. 그냥 외우는 것보다는 쓰면서 외우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읽기와 쓰기에 어려움을 겪는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실증적인 연구결과도 있다. 이 어린이들을 여러 그룹으로 나눠 각기 다른 방식으로 성적을 올리기 위한 활동을 하도록 했다. 그 결과 손 글씨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 그룹의 성적이 월등하게 향상되었다. 오늘날 교육에는 온갖 디지털 기기가 동원된다. 그러나 모든 최첨단 기기, 즉 기술이 ‘매개’한 ‘경험을 소비하는 것’이 손 글씨, 즉 실제 몸으로 ‘경험하는 것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것과 손으로 쓰는 것은 속도면에서, 타이핑 능력에 따라 다르겠지만, 3배 이상 차이가 난다. 이러한 속도의 차이는 생각의 차이를 만들어낸다. 머리로 생각하고, 팔과 손을 움직여 펜으로 종이에 쓰는 글과 키보드를 두드려 디지털 데이터로 기록되는 글은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다.
손글씨의 기능은 분명 퇴화하고 있다. 이것은 별로 중요치 않은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이것을 인간의 육체적 능력 퇴화를 잘 보여주는 한 단면으로 소개한다. 새로운 기술은 매혹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통적인 기능을 포기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기다림과 지루함의 기능>
현대 사회는 기다림과 지루함을 참지 못한다. 저자가 들고 있는 가장 극적인 사례는 온라인 쇼핑몰이다.
아마존은 페이지 로딩 시간을 100밀리 초 단축할 때마다 매출이 1퍼센트 증가한다고 주장한다. 밀리 초는 1000분의 1초다. … 대부분의 온라인 쇼핑객은 웹사이트가 느려지면 8초 안에 장바구니를 내던진다. (p.142, 143)
동영상 시청도 만만치 않다.
전 세계에서 총 2300만 개의 동영상을 시청한 670만 명의 시청 습관을 분석한 두 사람은 2초 안에 동영상이 재생되지 않으며 시청자는 시청을 포기한다는 것을 발견했다.(p.143)
다른 사람 돌아볼 것도 없다. 바로 ‘내’ 이야기다.
기다리지 못한다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는 지루함을 참지 못한다는 뜻이다. 단지 참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죄악시’하기까지 한다. 우리는 시간을 귀히 여기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일촌광음불가경(一寸光陰不可輕)” 단 한순간도 가벼이 여기지 말고 부지런히 공부하라는 이야기다. 오늘날 마침내 단 한순간도 가벼이 여기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우리는 밥을 떠서 입에 넣는 숟가락 질과 젓가락 질 사이의 짧은 순간도 허비하지 않고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본다.
물론 그에 대한 반작용도 있다. ‘멍 때리기’, ‘템플스테이’ 같은 것은 지루함을 모조리 없앤 삶의 부작용에 대한 반응이다. 가장 큰 부작용은 ‘백일몽의 약화’다. 즉 ‘딴생각’을 없애 버린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지하철에서 스마트폰으로 고스톱을 치느라 딴생각할 시간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학자들이 열거하는 딴생각의 긍정적 효과는 “자기 인식, 창의적 숙고, 즉흥성과 평가, 기억 강화, 과거를 기반으로 하는 미래 지향적 사고, 목표 지향적 사고, 미래 계획, 사적 이억의 인출, 사건과 경험의 의미에 대한 성찰, 다른 사람의 관점 모사, 자기 자신과 타인의 감정적 반응이 갖는 함의의 평가, 도덕적 추론, 성찰적 연민” 등이다.(p.153)
간단히 말해 기다림과 지루함의 경험을 상실하면 바보 멍텅구리가 된다는 뜻이다(?).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서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세상과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파악하려면 시간, 인내, 지루함, 백일몽, 발견에 대한 기대가 필요하다. 이것들이 없다면 우리는 그저 시간을 죽이고 있는 것이다.(p.160)
<감정 길들이기>
우리는 ‘나’의 상태를 온라인에 물어보는 데 익숙하다. 건강에 대해서라면 여러 가지 검사에 따른 수치가 상태를 말해줄 수 있다. 그러나 감정이라면? 나의 심리, 나의 사람됨이라면? 그것도 디지털 데이터가 말해준다. 요즘 유행하는 MBTI가 그런 것 아닌가. 여러 문항에 답변하면 그 데이터를 가지고 ‘너는 이러이러한 사람이야’라고 정의해 준다. 내가 누구인지를 왜 거기다 물어봐야 할까?
저자는 기술이 감정을 다룬다는 사실을 파헤친다. 온라인 쇼핑몰, SNS, 소셜미디어, 데이팅 앱 등은 물론 사실상 모든 산업이 감정을 다루고, 조작하고, 마케팅에 활용한다. 이런 상황이 무서운 것은 사람들의 온라인 활동이 늘어날수록 엄청난 정보가 쌓이고, 그것이 감정을 조작할 수 있는 데이터가 된다는 점이다.
저자가 지적하는 또 다른 문제점은 감정을 가벼이 여기고, 따라서 공감 능력이 쇠퇴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온라인에서 ‘좋아요’를 누르거나 이모티콘을 사용해 공감을 표시한다. 그러나 실은 그것이 대부분 진지한 공감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잘 안다.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많이 ‘공감’하지만, 실제 공감 능력은 계속 떨어지고 있다.
미시간대학교 사회연구소의 연구 결과, “오늘날 대학생의 공감 능력은 20~30년 전의 대학생보다 약 40퍼센트 낮으며, 가장 급격한 감소세는 스마트폰 보급과 추세가 일치한다.” 한 연구원은 “온라인에서는 ‘친구’를 쉽게 사귈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문제에 반응하고 싶지 않을 때 무시해 버릴 가능성이 높아지며, 이런 행동은 오프라인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라고 지적했다.(p.188)
폭력적인 게임을 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폭력적인 행동을 저지르는 것은 아니지만(사실 폭력적인 비디오게임을 하는 사람은 증가했지만 폭력 범죄율은 감소했다), 폭력적인 범죄보다 측정하기 어려운 결과, 즉 공감 능력의 저하는 나타난다는 것이다.(p.189)
기술은 인간의 여섯 번째 감각이 될 수 있다. 즉 기계 장치가 우리 대신 자신과 타인의 신호를 읽어 우리보다 더 능숙하게 대응할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이다.
팬틀랜드는 그의 책 <어니스트 시그널>에서 “인간의 행동을 지속적이고 보편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삶을 최적화할 능력을 선사할 것이다”라고 말했다.(p.198)
이에 대한 저자의 우려는 –
우리는 스스로를 이성적인 개인으로 생각하고 싶어 하지만, 실상 우리는 “사회적 네트워크 효과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다. 즉 우리는 비이성적이며 쉽게 속아 넘어가는 무리다.(p.198)
‘감성 컴퓨팅’이란 것이 실은 감성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이야기다. 기업들은 컴퓨터 사용 기록을 통해 직원들의 심리상태를 파악할 수 있다. 그것은 회사가 신체 건강뿐만 아니라 정신 건강까지 챙긴다는 메시지로 포장되지만, 실은 통제하고 업무효율을 높이는 수단이다. 존중 이해 사랑 같은 것은 “기술이 다룰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감정적 성찰을 아웃소싱하면 세상은 어떻게 변할까? 팬틀랜드에 따르면 이 세상은 “모든 것이 우리의 편의에 맞추어 정리된 합리적인”사회가 될 것이다. 데이트에 나갔다가 실망하는 비효율을 감당할 필요가 없다. …
그러나 이런 인식의 아웃소싱은 시간의 흐름과 그에 따른 신체적 질병과 같이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을 더 다루기 어렵게 한다. 우리의 상황은 화면의 이미지처럼 쉽게 통제되지 않는다. 감정을 알려주는 기술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되면서 우리는 집단적으로 감정적 기량을 잃을 수도 있다. 우리는 이미 페이스북에 우리의 기억을, 구글에 우리의 호기심을, 휴대전화에 내장된 GPS에 우리의 방향 감각을 아웃소싱하고 있다. 이제 이런 기술이 우리 자신에 대한 보다 합리적인 견해를 갖고 있다는 주장까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p.202, 203)
센서, 소프트웨어, 정교한 기술은 혼란스러운 인간의 감정이 보다 순조롭게 해결되는 세상을, 데이터가 주도하고 기술이 지원하는 ‘여섯 번째 감각’이 오랫동안 우리의 감정적 삶을 지배해 온 모호함과 자기기만을 말끔하게 제거하는 세상을, 감정에 대한 명확하고 즉각적이며 보편적인 표현을 찾을 수 있는 세상을 약속한다. 그러나 감정의 투명성을 보장하는 세상에는 대가가 따른다. 우리 삶의 깊이와 복잡성을 없애서 단조롭고 무미건조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 감정의 성가신 부분이다. 우리는 때로 뒤섞인 감정을 좋아한다.(p.215)
<기술로 매개된 쾌락>
여기서 말하는 쾌락은 의식주 등 삶의 전반에서 우리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모든 것을 말한다.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쾌락이 기술과 소프트웨어에 의해 여과되고 지배되며, 이드(원초적 자아)가 아닌 인정과 관심을 얻으려는 에고의 욕망에 의해 주도된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인스타그램에 최근 먹은 사진을 올리고, 핀터레스트(Pinterest)에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이 꿈꾸는 집의 사진을 올린다. 쾌락, 즉 자신과 타인의 쾌락은 대중 오락의 한 형태가 되었다.
또한 쾌락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었다. 목적은 우리의 데이터를 가장 높은 값을 부르는 곳에 판매하는 플랫폼과 ‘공유’하는 것이다. (p.224)
여행은 기록을 위한 것이 되었다. 다른 사람의 여행 기록과 후기, 평점을 보고 여행계획을 짜고 그 길을 답습한다. 열심히 사진을 찍어 올리고, ‘좋아요’ 수로 인정을 받는다. 그것이 목적이다.
나는 이 부분에서 좋은 안내 책자를 가지고 갔던 과거 일본 여행이 떠올랐다. 정말 안내 책자에 기록된 대로 지하철을 타고 안내된 정거장에 내려서 알려주는 출구로 나가서 책에 기록된 대로 얼마를 걸었더니, 목적지가 딱 나왔다. 그래서 바로 책을 버렸다. 여행이란 미지의 곳을 찾아 그 장소를 느끼는 것이다. 그런데 안내 책자대로 다닌다면 그건 그 책의 저자의 여행이지 나의 여행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안내 책자를 버리고, 사진 찍기를 그만둔 다음 진정한 여행의 맛을 느꼈다.
저자는 예술은 ‘픽셀화’되었다고 지적한다. 예컨대 미술 전시도 많은 사람들이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어 ‘올리는’ 데 정신이 팔려 있고, 정작 감상은 뒷전이라는 것이다. 과거에는 전시장에서의 사진 촬영은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스마트폰으로 작품 사진 찍는 것을 막는 전시회는, 내가 알기로는, 없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유명 미술관, 또는 유명 화가의 작품은 초고화질 사진으로 온라인을 통해 서비스된다. 3D투어도 있다.
2011년 화려하게 출범한 구글 아트 프로젝트Google Art Project에 대한 반응이 하나의 답을 제시한다.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이탈리아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을 비롯한 전 세계의 주요 미술관에 대한 구글 스트리트 뷰 수준의 투어를 제공하는 이 프로젝트는 “전 세계의 미술관을 탐험하고 수맥 점의 예술작품을 믿기 힘들 만큼 확대해 감상해 보세요!”라고 격려한다. … 구글 아트 프로젝트는 큐레이터의 눈과 전문성을 우리 자신의 눈과 전문성으로 대체한다.
…
하지만 예술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요구해야 한다. 우리 자신의 선호를 제쳐두고 다른 사람의 비전에 따르려는 자발성을 말이다. … 잠시 멈추어 이 선택의 결과를 생각해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기억 대신 수백만 장의 인스타그램 사진만 있는 사회, 즉각적인 복제만을 기대할 뿐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문화를 전달하는 힘든 일은 지속하지 않는 사회를 갖게 될 것이다.(p.247)
그다음은 섹스다. 이 역시 픽셀화, 디지털화되어간다. 포르노가 창궐하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 제기되는 문제는 다른 이야기다. “성적 접촉은 명백히 신체적이고 정서적인 활동”이다. 그런데 이것도 “디지털에 의해 매개”되었다는 것이다.(p.252) 그 결과 섹스도 가상현실과 실제 현실이 구분되지 않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한 20대 여성은 <GQ>에 포르노에서 본 성행위를 따라 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남성들에 대한 글을 썼다. … “과거 포르노는 가난한 사람들이 성관계를 대신하는 수단이었다. 지금은 포르노의 절반이라도 따라가기 위해 실제 성관계를 잔뜩 꾸며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여기에 인공지능 가상현실 등이 가세한다. 세계 유명 대도시에서는 “인간 매춘부보다 훨씬 저렴한 시간당 비용을 내고 정교한 기술로 구현된 섹스 인형을 대여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이제는 실제 성적 접촉을 혐오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고, 여성 로봇을 볼 때만 성적 자극을 받는 남성도 많다고 할 정도가 되었다.
섹스는 다른 사람과 연결하려는 충동을 시험하는 시험장이고, 때로는 그 충동이 좌절되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매개 기술과 소프트웨어를 수용함으로써 성생활뿐만 아니라 친밀감까지도 아웃소싱하고 있다. … 기술적으로 매개된 성적 쾌락을 경험하는 것이 현실에서 다른 인간과 쾌락을 추구하는 것보다 훨씬 간단하다. 이렇게 기술을 사용하는 것이 훨씬 더 편리하다는 이유로 실제 인간과의 관계를 피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p.256, 257)
섹스뿐만 아니다. 먹방, 쿡방은 어떤가? 사람들은 먹방을 통해 음식을 즐긴다. 요리 동영상을 보고는 실제 식사는 간편식으로 해결한다. 내가 실제 따라 만들지도 않을 것이면서도 목공 DIY 영상을 본다. 다른 사람의 경험을 경험하는 셈이다. 이름하여 “미식 없는 식사, 현장 없는 경기”다.
이렇게 경험은 사진과 영상으로 박제된다.
<소멸하는 장소, 개인화된 공간>
마지막 장은 장소place와 공간space에 대한 고찰이다. 무엇이 다른가? “공간은 정의와 의미를 얻을 때 장소가 된다.” 즉 공간이 “경계가 생기고 인적 요소가 가미될 때” 장소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이버 공간은 있어도 사이버 장소는 없다는 것이다.(p.278)
스마트폰은 ‘장소’ 이동을 가능케 하고, 어디에 있든지 ‘연결’을 유지한다. 그래서 공간은 개인화된다. 장소는 과거에는 우리를 정의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이제 우리를 정의하는 것은 태어난 장소가 아니라 온라인 프로필이다. 모바일은 장소 개념이 필요 없다. 그래서 우리는 장소 개념을 잃고 있다. 장소에 대한 감각은 균형감이고, 그것이 확장되면 방향 감각이 된다.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알아야 방향 감각이 생긴다. 장소를 잃음으로써 방향 감각을 잃고 방황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현재 우리는 장소에 대해 엄청난 혼란을 겪고 있다. 온라인에서 형성된 즉각적인 커뮤니티는 강력하고 고무적일 수 있지만, 많은 현대인을 괴롭히는 사회적 고립의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 지금 우리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은 온라인 공간, 엔지니어들의 영향이 크게 미친 공간이다. 외로움, 무례함, 정신없는 삶의 속도에 대한 불평이 너무나 흔한 요즘 이런 새로운 공간들은 매력적인 가상 세계로의 즉각적인 접근권을 주지만 우리가 삶의 균형을 찾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듯하다.(p.312, 313)
<이 혼란에 저항하라>
저자는 에필로그에 이런 제목을 붙였다. 어떻게 저항하란 말인가?
더 발전된 디지털세계에서는 “기억을 잃는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그런 세상에도 기억을 위한 공간이 있을까? 사진에서부터 편지와 책에 이르기까지 기억을 보존하는 물건들이 디지털 세계로 이동하면서 우리는 검색과 연결 같은 새로운 힘을(그리고 인공지능을 통한 기술로 새로운 창조의 힘을) 얻었다. 하지만 잃는 것들도 있다. 기억을 상기시키는 것들이 메타나 구글 같은 대기업 소유의 플랫폼에 있는 경우 우리는 그들에 대한 통제력을 잃는다. 조상이 만진 물건이나 다른 사람이 우리를 위해 만들 물건을 손에 쥐는 촉각적 경험을 잃는다. 기억의 많은 물리적 단서를 잃는다. 우리의 취약성과 한계에 대한 감각을 잃고, 그 결과 육신 있는 인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p.330)
그러면 저항의 방법은?
인간의 미덕을 되찾고 가장 뿌리 깊은 인간의 경험을 멸종의 위기에서 구하려면 기술 예찬론자들이 제안하는 극단적인 변혁 프로젝트에 기꺼이 한계를 두어야 한다. 혁신을 억압하는 수단으로써의 한계가 아니라 우리가 공유하는 인간성에 대한 헌신으로서의 한계 말이다. 그래야만 우리는 육신이 있는, 기발하고 모순적이며 회복력 있고 창의적인 인간의 모습 그대로 자유롭게 살 수 있다.(p.330, 331)
<우리는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가?>
마지막 장을 읽고 책을 덮으면 2가지 생각이 엇갈린다.
하나는 저자가 지나치게 보수적인 관점으로 접근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세상이 이미 디스토피아라는 생각이다.
피상적으로 보면 저자의 관점은 모든 혁신에 대한 불신이라고 할 만하다. 19세기 초 영국에서 방직기 등 기계화로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이 기계를 파괴하며 자본 착취에 맞서 투쟁했던 러다이트 운동의 21세기 버전처럼 생각될 수도 있다. 실제 그런 보수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은 일부 사실이기도 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책은 현재 우리의 일상에 침투해 있는 온라인, 디지털 기술은 우리의 인식을 훨씬 넘어서는 수준임을 일깨워준다. 실제 생활의 많은 부분을 소셜미디어가 지배하고 있고, 그것이 우리의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좌우한다. 가장 단순한 예로 맛집 줄 서기를 들 수 있다. 개인의 판단과 기호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줄을 서는 이유는 단 한 가지 “온라인에서 뜨는 곳”이기 때문이고, 목적 또한 대부분 동일하다. 인증숏 올리기.
모든 것이 유명 인플루언서 따라 하기로 귀결되고, 그렇게 하는 이유와 목적은 자신이 유명 인플루언서가 되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던 것이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였다. 많은 부분 디테일이 다르고, 방향이 다르고, 차원이 다르지만, 그런 달콤함과 편리함에 길들여져 가는 사회라는 측면에서는 이 책에서 지적한 현재의 모습은 헉슬리가 묘사한 사회를 닮아가고 있고, 조만간 그 수준에 도달하거나 능가할 것 같다. 인간이 자유를 잃고 완벽하게 통제되는 디스토피아가 현실화된다면, 이 책 『경험의 멸종』의 관점에서 보면 조지 오웰의 『1984』보다는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의 형태가 될 가능성이 더 높다는 생각이다.
Ⅲ
세뇌와 통제의 디스토피아
『멋진 신세계』/올더스 헉슬리/소담출판사 /2015
모든 것이 완벽하게 계획되어 조화를 이룬 사회를 그리고 있다. 그곳에서 모든 사람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에 걸맞은 일자리와 복지, 여가가 갖춰진, 한치도 흐트러지지 않은, 그래서 행복한 삶을 누린다. 그런 삶을 위하여 단 한 가지, 자유는 박탈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유가 박탈되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른다. 그들에게는 그 사회의 삶이 ‘자유’다. 다른 종류의 자유, 우리가 말하는 ‘진정한 자유’는 그 개념도 모른다. 그래서 디스토피아이지만 유토피아처럼 환하게 밝은 느낌이다.
올더스 헉슬리(1894 ~ 1963)는 영국의 소설가이자 비평가, 사상가로 폭넓은 지식, 예리한 지성, 냉소적인 유머 감각으로 유명하다. 할아버지와 형이 뛰어난 생물학자일 정도로 저명한 지식인 가문 출신으로 이튼 칼리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예리하고 유려한 필치, 냉소적이고 감각적인 유머로 때로는 오만하다는 비판도 받았다. 1932년 발표된 『멋진 신세계』는 그를 디스토피아 문학의 거장으로 올려놓은 작품이다. 말년에 내놓은 『섬』(1962)은 과학에 지배되지 않는 이상적인 유토피아 공동체를 그린 작품이어서 대조적이다.
작품의 무대는 런던이지만 시대는 A.F. 632년. A.F.는 ‘Anno Domini’(주후, 즉 기원후)를 패러디한 것으로 F는 헨리 포드를 가리킨다. 이 사회가 포드를 신(神)으로 모시기 때문이다. 헨리 포드는 컨베이어 벨트 자동화 시스템으로 자동차 공업, 나아가서는 현대 기계 공업을 일으킨 혁신가다. 작가가 다른 사람도 아닌 포드를 내세운 의도는 소설 첫머리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 사회는 모태 출산이 아니라 자동화 시스템에 의하여 아기를 생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느님 맙소사!”(Oh my God!) 같은 말도 “포드님 맙소사!”(Oh my Ford!)로 표현된다.
또 한 가지 독특한 것은 등장인물들의 이름이다. 이미 하느님 대신 포드님이 등장하지만, 다른 작중 인물들도 모두 유명인의 패러디다.
주인공 격인 인물은 버나드 마르크스다. 마르크스주의의 창시자 바로 그 마르크스다. 이름을 이렇게 붙인 다음 작가는 그를 마음껏 ‘조롱한다’. 버나드는 태아 시절 공장에서 혈액에 알코올이 잘못 주입되어 약간 이상해졌다. 최고 계급인 알파이지만, 평균적인 알파들에 비해 키가 훨씬 작고 초라하다. 외모로는 열등한 계급처럼 보인다. 그래서 반항적이고, 자기혐오와 열등감이 심하다. 거기에다 소심하고 꽤나 비열하기까지 하다.
여성으로는 레니나 크라운이 있다. 레니나 – 레닌의 여성형이다. 게다가 성은 크라운, ‘왕관’이다. “혁명이라더니 네가 왕관을 써?” 이런 뉘앙스로 레닌을 까 내리는 것이다. 세계국의 이 지역 최고위직인 ‘서부 유럽 주재 통제관’은 엉뚱하게도 무스타파 몬드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튀르키예 국부로 추앙받는 무스타파 케말과 영국의 산업자본가 알프레드 몬드의 합성이다. 즉 이 세계국이 군국주의적 근대화와 산업자본주의의 합성물이라고 풍자하는 것이다.
<사회 구조>
철저하게 계급 사회다. 아기들은 태어날 때부터 계급이 구분된다. 공장에서 난자에 정자가 주입되어 태아가 된 상태로 컨베이어벨트 상에서 각 주기별로 필요한 영양소 공급과 각종 처리가 진행되면서 성장한다. 이때 교육도 병행된다. 계급에 맞는 소양이 태아 때부터 갖춰지고, 그들은 모두 자기 계급의 상태에 만족하고 행복을 느끼도록 되어 있다.
알파 베타 등 상위 계급은 하나의 난자에서 태아 하나가 생성되지만, 하위 계급은 ‘보카노프스키 처리’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하나의 난자에서 복제되어 96명의 일란성쌍둥이가 태어난다. 그들은 같은 공장에서 같은 기계를 돌리는 직공으로 일하게 된다.
여성은 기본적으로 불임이다. 그러나 상위 계급 여성은 임신이 가능하지만, 필요시 외에는 철저하게 피임을 시행해야 한다.
사람들은 의학적 수단에 의하여 늙지 않는다. 죽을 때까지 젊음을 유지하다가 임종을 앞둔 사람들을 위한 병원에서 유쾌한 음악, 좋은 향기, 즐거운 TV 화면 등을 즐기면서 고통 없이 편안하게 죽는다. 그 주위에는 아이들이 뛰논다. 죽음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직접 보고 배우기 위하여(세뇌)…
<남녀관계와 사회생활>
생명이 모태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공장에서 ‘생산’되므로 결혼 제도는 없다. 성적으로 완전히 개방되어 남녀가 성관계를 맺는 것은 친구끼리 같이 영화를 보는 정도로 취급된다. 자유연애를 하고, 데이트로는 맛집을 찾거나 영화를 보고 운동이나 여흥을 즐기는 등 현대인과 비슷하다. 영화 같은 경우에는 영상과 소리뿐만 아니라 촉감까지 느낄 수 있다. 예컨대 키스하는 장면이라면, 입술에 그 감촉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직업은 타고난 계급에 따라 정해진다. 낮은 계급은 3D 직종에 종사하면서 서민의 삶을 살고, 높은 계급은 사무직이나 관리직을 차지하고 풍요롭고 안락한 삶을 산다.
원래 계급마다 자신의 삶에 만족하도록 태아에서부터 철저하게 세뇌가 되어 있으나, 생활에서 스트레스나 여러 가지 심리적인 불안을 겪을 수도 있다. 그래서 매일 ‘소마’라는 스트레스 해소제가 지급된다. 소마는 일종의 마약으로 볼 수 있다. 기분을 좋게 해 주고, 마음을 평화롭게 만들어 푹 자고 쉴 수 있게 해 준다. 스트레스가 심하면 소마 양을 늘리면 된다.
<사회의 특징>
그래서 이 사회는 고통이 ‘제거된 사회’다. 완벽하게 통제되는 전체주의 사회인 것이다. 그러나 다른 전체주의처럼 억압적이지 않다. 이미 태아에서부터 세뇌를 하기 때문이다. 수만 번, 수십만 번 되풀이해서 들었기 때문에 그것이 몸에 배어 있다. 누구도 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다. 조지 오웰의 『1984』에서는 감시체계가 갖춰져 누구도 감시의 눈초리를 벗어나지 못하게 되어있는 억압 체제이지만, 여기서는 감시가 필요 없는 자발적 복종 체제다. 한 단계 더 나아간, 진보된 체제라 할 수 있다.
물론 고통의 제거에는 대가가 따른다. 전쟁 질병 빈곤 갈등 불안 등은 없지만, 자유도 없다. 다만 구성원들은 당초 자유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을 ‘결핍’으로 인식하지 못한다. 그래서 『1984』 보다 무서운 사회다. 이것이 ‘유혹적인 디스토피아’라고 불리는 이유다.
여기서 본질적인 질문이 나온다.
“고통이 없는 세계에서, 자유가 ‘사라졌다는 사실’도 사라진다면, 우리는 그 세계를 나쁘다고 말할 수 있는가?”
<버나드 마르크스의 갈등>
버나드 마르크스는 불만이 가득한 사회부적응자다. 소설 전반부에서 그는 이 자유가 박탈된 사회, 그 박탈을 박탈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뭔가 새로운 것을 인식하고, 자유를 찾아 나설 것 같은 기대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럼요, 지금은 누구나 다 행복하고 말고요. 우린 다섯 살 때부터 아이들에게 그런 소리를 하죠. 하지만 당신은 다른 방법으로 행복해지는 자유를 누리고 싶지 않나요, 레니나? 예를 들면, 모든 사람의 방법이 아니라 당신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말이에요.”(p.152)
“일하는 시간 동안에만 그리고 지적으로만 어른이죠.” 그는 얘기를 계속했다. “감정과 욕망에 있어서는 아기들이지만요.”(p.156)
그러나 소설 후반부로 가면 그의 정체가 드러난다. 그가 반항적이었던 것은 단지 열등한 외모로 다른 사람들로부터 대우받지 못하고, 특히 매력적인 여성에게 어필하지 못한 것 때문이었음이 드러난다.
<원시인 존>
버나드 마르크스는 레니나 크라운과 함께 '야만인' 보호구역으로 관광을 떠난다.(작중 묘사는 미국의 인디언보호구역이다) 여기서 그는 ‘현대인’ 여성 린다를 만나다. 린다는 버나드의 상관인 국장과 함께 관광을 왔다가 사고로 떨어져 남게 된 사람이다. 국장은 그녀를 버리고 ‘현대 사회’로 돌아가 버렸다. 그녀는 현대의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고, ‘야만인’처럼 살아온 탓에 늙고 뚱뚱해졌다. 그리고 피임도 하지 못해 존이라는 아들을 낳았다.
존은 이미 성인이다. 그러나 인디언들과 피부색을 비롯해 모든 것이 달랐고, 어머니 린다가 ‘현대인’의 습성대로 여러 남자와 사귀었기 때문에 공동체에서 따돌림을 받는다. 그는 어머니로부터 글을 배웠고, 인디언 부족들이 보관하고 있던 낡은 고서 중에서 셰익스피어의 저작을 읽어 많은 시를 외우고 있다. 따라서 그의 사고방식과 행동도 ‘셰익스피어적’이다.
버나드 마르크스는 존과 린다를 현대 사회로 데리고 간다. 존은 일약 유명인이 된다. 모든 사람의 주목을 끈다. 과학적으로도 관심의 대상이다. 존의 어머니 린다는 힘겨운 삶에서 벗어나 ‘소마’의 약기운으로 편안하게 살다가 죽는다.
존은 이곳에서도, 당연히, 적응을 할 수 없다. 적어도 그는 자유인이다. 비록 어느 쪽에서도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고립무원의 처지지만, 자아가 살아있고, 스스로의 위치를 안다. 그에게 이곳의 낮은 계급 사람들은 지렁이나 벌레처럼 보인다. 그렇게 비참하게 느껴진다는 뜻이다.
버나드는 존의 ‘보호자’로서 파티를 열고 그를 데리고 나간다. 이 때문에 ‘원시인’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모든 사람들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버나드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한다. 매력적인 여자들도 줄을 섰다. 버나드의 불만은 완전히 해소되었다. 그는 더 이상 사회부적응자가 아니다.
그러나 어느 날 존은 버나드의 ‘원숭이’가 되기를 거부한다. 파티에도 나가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만나지도 않는다. 버나드는 순식간에 다시 나락으로 떨어지고, 존은 자기만의 공간을 찾아 이주한다. 그러나 거기서도 언론의 관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구경거리가 된 끝에 쓸쓸히 최후를 맞이한다.
<레니나 크라운>
아주 매력적인 여성이다. 버나드 마르크스와 함께 야만인 보호구역으로 여행을 다녀온다. 그녀는 너무 미남이고 매력적인 존에게 반해 사랑하게 된다. 그래서 존을 유혹하지만, 존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존은 옷을 벗고 본격적으로 유혹하는 그녀를 옛날 도덕군자의 사고방식으로 ‘헤픈 여자’, 부도덕한 인간으로 간주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
레이나는 철저하게 이 사회에 녹아 있는 인물이다. 모든 것을 세뇌된 가치관으로 판단하고, 사랑마저도 그렇게 추구하지만, 존의 벽에 가로막혀 좌절하고 만다.
<자발적인 복종의 사회>
조지 오웰의 『1984』는 완벽하게 통제하는 억압된 사회다. 공포가 지배하는 전체주의 사회다. 『멋진 신세계』의 세상은 그에 비하면 ‘지옥’은커녕 유토피아 같다. 고문도 굶주림도 공포도 없고 사람들은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며 진심으로 행복하다고 느낀다. 그렇다면 자유는 과연 행복의 필수 조건인가? 자유 없는 행복이 나쁜 것인가? 여러분은 불안한 자유를 선택할 것인가, 자유 없는 안정과 행복을 선택할 것인가?
존의 어머니 린다는 자유 없는 행복, 보다 정확히는 편안함을 선택했다. 그녀는 ‘현대 사회’로 복귀했고, ‘소마’에 의지해 여생을 몽롱하지만, 편안한 상태로 보냈다. 반면 존은 끝내 자유를 놓지 못했다. 그는 원래 자유를 알았기 때문에 세계국의 모든 사람들의 삶이 공허한 행복일 뿐임을 보았다. 그는 그런 행복을 잠시도 바라지 않았다. 그리고 쓸쓸하게 죽어갔다. 존은 자유로웠기 때문에 행복했을까?
여기서 헉슬리의 세계가 오웰의 세계보다 위험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앞서 소개한 『경험의 멸종』이 그리는 세계가 헉슬리의 세계와 너무나 닮아 있다는 점에서 놀라움을 느낀다. 헉슬리의 세계는 태아 시절부터 끝없이 반복된 세뇌의 결과다. 만약 그가 좀 더 후에 이 작품을 썼다면 유전자 조작이나 다른 방법을 생각해 냈을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러나 『경험의 멸종』 시대에는 그런 세뇌조차 필요가 없다. 온라인 연결과 알고리즘이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세뇌되도록 하기 때문이다. 자발적인 복종이다.
지금 우리는 스스로 데이터를 내어준다. 그러면 광고와 알고리즘, 그리고 엔터테인먼트는 우리의 주의력과 분노 행복 쾌락 등의 감정을 정밀하게 조절한다. 『멋진 신세계』의 스트레스 해소제 ‘소마’와 같은 효과다. 효과는 같지만 따로 먹을 필요도 없다. 뇌에 바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에서 우리는 온라인에서 가르쳐주는 대로, 제시하는 대로 따라가고 행동한다. 즉 자유를 잃는다. 그러나 잃었다고 느끼지 않는다. 이렇게 불편함, 불확실성, 불안 등을 피한다. 그것을 위하여 자발적으로 기술의 통제 하에 들어가는 것이다.
『1984』/조지 오웰/문예출판사 /2023
‘빅 브라더’가 지배하는, 철저한 감시와 억압으로 숨도 쉬지 못할 것 같은 전체주의 사회를 그린 작품. 전체적인 묘사는 스탈린과 소련을 모델로 하고 있다. 소련 예브게니 자먀친의 『우리들』(1924), 영국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1932)과 함께 세계 3대 디스토피아 소설로 꼽힌다. 이 작품은 1949년 발표한 것이다.
조지 오웰(1903~1950)은 당시 영국 식민지였던 인도 벵골에서 인도총독부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출생 직후 어머니와 함께 영국에 와서 이튼 칼리지에서 수학했으나 졸업 후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인도제국 경찰이 된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당시 인도제국의 일부였던 버마, 즉 현재의 미얀마에서 5년간 복무하면서 제국주의 식민통치에 혐오를 느껴 사직하고, 일용직 노동자, 교사 서점 점원 등을 전전하면서 글을 써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본명은 에릭 아서 블레어. 1934년 장편소설 『버마 시절』 발표해 문단의 인정을 받았다. 이 작품은 제국 경찰 근무 경험을 반영하여 당시 버마의 상황을 잘 그려냈다. 스페인 내전에도 자원 참전해 파시즘과 싸우다가 부상을 입은 바 있다. 스탈린주의를 비판한 우화소설 『동물농장』은 『1984』와 함께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1984』는 발표 당시 기준으로 보면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보다 훨씬 실현 가능성이 높은 디스토피아 소설이었다. 헉슬리가 그린 세계는 당시로서는 이뤄질 것 같지 않은 발전된 과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오웰의 세계는 실제 세계에서 자행되고 있는 억압, 감금, 고문 등을 기반으로 한 공포 사회다. 실제 모델도 존재했다.
『1984』의 오세아니아는 빅 브라더 1인 독재 전체주의 체제다. 세계는 오세아니아, 유라시아, 이스트아시아 등 3개 거대국가가 정립하고 있으며, 이들 중 한 나라는 늘 동맹을 맺은 나머지 두 나라와 전쟁 중이다. 체제는 철저한 감시로 유지된다. 텔레스크린이란 것이 모든 곳에 설치되어 있어서 집에서도 그 감시를 벗어나지 못한다. 일상을 감시할 뿐만 아니라 소식을 전하고, 세뇌 교육을 하고, 심지어 체조도 시킨다. 제대로 복종하지 않으면 바로 지적이 나와 시정해야 한다.
헉슬리의 세계가 고통을 말살시켜 버린 세계라면 오웰의 세계는 고통 그 자체다. 고통이 권력을 확인시키고 유지시키는 사회다. 이 사회에 있는 것이라고는 공포 고문 굶주림 감시뿐이다. 지도자들은 분명하게 말한다. “권력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다. 또한 권력은 다른 인간에게 무한한 고통을 가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
언어도 ‘신어’라고 해서 기존의 언어는 파괴된다. 권력의 목적에 맞는 언어로 개조되는 것이다. 사랑도 없고, 자아는 말살되며, 진리는 빅 브라더와 당의 요구에 합치하지 않는 것은 모조리 부정된다. 심지어 역사도 부정된다.
주목할 것은 ‘이중사고’다. 이런 억압 속에서 완전히 모순되는 두 사실을 완전히, 진심으로 믿고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이는 인간의 정신을 성공적으로 조종할 수 있게 될 때 가능해진다. 자아를 포기하고 당과 국가에 완전히 ‘속하게’ 되면 2 더하기 2가 5도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 ‘예속은 자유’가 된다.
이런 체제의 모순은 어떻게 드러날까? 체제에 충성하는 사람의 삶에서는 그 모순을 파헤치기 힘들다. 이단자가 나왔을 때라야 모순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여기서 그 이단자는 윈스턴 스미스다. 그의 집에는 우연히도 텔레스크린의 사각지대가 있다. 거기에서 글을 쓰는 것으로 그의 반역은 시작된다. 그러나 이런 거미줄 같은 감시와 억압체제에서 무사하기는 힘든 법. 그는 결국 온갖 고초를 겪는다. 마침내 그는 권력에 통합된다. 예속됨으로써 자유를 찾는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 인상적이다.
그는 거대한 얼굴을 응시했다. 저 검은 콧수염 아래에 어떤 미소가 숨어 있는지 배우는 데 40년이 걸렸다. 아, 잔인하고 쓸모없는 오해여! 아, 사랑이 가득한 품을 두고 제멋대로 고집을 부려 망명 생활을 하다니! 술 냄새가 나는 눈물 두 방울이 그의 코 양면을 타고 흘러내렸다. 하지만 괜찮았다. 모두 괜찮았다. 투쟁은 끝났다. 그는 자신에게 승리를 거뒀다. 그는 빅 브라더를 사랑했다.
『화씨 451』/레이 브래드버리/ 황금가지/2009
세계 3대 디스토피아 소설 중 예브게니 자먀친의 『우리들』 대신 나는 이 책을 선택했다.
저자 레이 브래드버리(1920~2012)는 미국의 유명한 SF 작가이다. 환상 소설, 공포 소설, 과학 소설 등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신문을 팔면서 도서관에서 독학으로 공부해 작가로 성공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SF 작가지만 뛰어난 작품성과 시적인 문체로 문학적인 완성도도 높이 평가를 받는다.
이 작품은 앞서 소개한 두 작품과는 조금 결이 다른 ‘미래 소설’이다. 인간의 생각을 통제한다는 면에서는 공통점이 있지만, 여기서는 세뇌보다는 책을 금지하는 사회를 그린다는 점이 다르다.
소설 제목인 화씨 451도는 종이가 타기 시작하는 온도를 뜻한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실제 섭씨로 환산하면 233도이므로 이는 책을 불태운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쓰였다고 볼 수 있겠다. 제목이 암시하듯, 이 소설이 그리는 사회는 책을 불태우는 사회다. 즉 다른 사상을 방지하기 위해 책 자체를 금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책이 발견되면 태워 없애는 ‘방화수’라는 직책이 존재한다. 불을 끄는 소방수가 반대로 불태우는 방화수가 되는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것이다.
주인공은 가이 몬태그라는 경력 10년의 방화수다. 그는 아무런 고민 없이 10년 간 책을 불태우는 자신의 소임을 잘 지켜왔다. 그러나 어느 날 자유로운 영혼의 소녀 클라리스를 만나 대화를 나누면서 자신의 영혼이 흔들리는 것을 느낀다. 게다가 책이 적발되어 불태워지게 된 할머니가 책을 지키려고 자신이 불에 타는 것도 불사하는 것을 보고 더욱 큰 회의를 느끼게 된다.
그렇게 해서 가이 몬태그는 책을 읽게 되고 이것이 그의 생활을 완전히 뒤바꿔 놓는다. 그는 결국 적발이 되고, 집이 불태워질 위기에 빠진다. 마침내 그 사회에서 더 이상 발 붙일 곳이 없어진 그는 강을 건너 도망친다. 체제 밖으로 뛰쳐나가는 것이다.
도시 밖에는 책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있다. 그들은 책의 암기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여러 사람이 모여 각자 자신이 암기하고 있는 부분을 합치면 책 한 권이 완성되는 것이다. 가이 몬태그는 그들의 공동체를 찾아 나선다. 그렇게 그에게는 새로운 삶이 열린다.
Ⅳ
생각을 훔치는 기술
생각을 통제하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상상하는 모든 종류의 디스토피아가 공통적으로 갖는 핵심적인 성격은 인간의 사고(思考)를 통제한다는 것이다. 다만 그 방법이 다를 뿐이다. 헉슬리의 세계에서는 태아 때부터 끊임없는 반복 교육으로 세뇌한다. 오웰의 세계에서는 억압 속에서 끊임없는 선전 선동으로 세뇌한다. 브래드버리의 세계는 다른 ‘위험한’ 생각을 하게 만드는 책을 모조리 불태워버린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책은 아무리 태워도 끊임없이 발견되고, 사람의 머릿속에도 책이 기억의 형태로 남아 있다. 가장 불완전하다. 강압적인 선전 선동은 통제는 할 수 있어도 모든 인간을 완전히 바꿔놓는 것은 힘들다. 체포 고문 처형이 끊임없이 이뤄져야 한다. 반면 끊임없는 반복 학습으로 인지 형성 단계에서부터 주입하는 세뇌는 고통을 없앨 수 있다면 모든 사람을 통제할 수 있다. 억압과 폭력도 필요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가장 위험한가? 그것은 세뇌 효과의 역순이다. 즉 헉슬리, 오웰, 브래드버리의 세계 순이다. 강압적인 체제는 언젠가 스스로 무너질 수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생각을 통제하는 체제는 무너지지 않는다. 그 구성원이 행복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자유는 박탈당했지만, 상실감이 없다. 그것이 무서운 것이다.
『경험의 멸종』이 그리는 세계는, 경우에 따라서는, 더 무섭다. 어떠한 강압도 없고, 누군가 나서서 생각을 통제하지도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고, 권력기관으로 느껴지지도 않는 기술이, 알고리즘이 우리 스스로 통제 속으로 들어가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생각을 훔치는 기술이다.
AI를 이용하면서 “아내 보다 낫다”라고 느낀다고 했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내가 조종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내 입맛에 맞는 콘텐츠를 계속 내놓으니 이 녀석을 무한 신뢰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시키는 대로’ 하게 된다. 게임 중독도 무섭지만, AI 중독은 더 무섭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첫째는 AI가 늘 옳지는 않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는 것이다. 실제 AI의 답변은 완벽하지 않다. 틀린 부분도 있고, 사실관계가 잘못된 부분도 있다. 그것을 제대로 평가해서 활용해야 한다.
둘째는 주도권을 쥐는 것이다. AI를 자료조사원 정도로 생각하고, 그렇게 취급하는 것이다. 즉 자료조사를 시키고, 추론한 것은 내가 ‘상사’의 입장에서 검토하고, 다음 진행 방향을 ‘내가’ 정하는 것이다. 자료조사만큼은 AI가 최고다. 그러나 그 자료를 취합하여 작품을 만드는 것은 ‘나’다.
기술은 인간이 그것을 이용하기 위해 개발된 것이다. 그러므로 기술이 인간을 조종하도록 놔두면 안 된다. 이 기본 명제만 잊지 않는다면 경험의 멸종은 오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