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 불평등, 폭력, 페미니즘

세상은 원래 그렇지 않았다?

by 제이슨


『모든 것의 새벽/데이비드 그레이버, 데이비드 웬그로/김영사/2025

『폭력의 유산』/캐럴라인 엘킨스 /상상스퀘어/2025

『다락방의 미친 여자』/샌드라 길버트 , 수전 구바/북하우스/2022


억압, 폭력, 불평등, 약탈


“문명의 발달은 억압과 무시, 폭력과 약탈의 결과다.”


이렇게 단언한다면 수긍할 것인가, 반박할 것인가?


우리는 ‘세계 4대 문명’이라는 틀로 문명사를 배웠다. 나일, 티그리스-유프라테스, 인더스, 황하 등 4대 강 유역의 문명이 세계로 번져 나갔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는 여전히 통용되지만, 학술적으로는 이 개념은 폐기된 지 오래다. 지구상의 다른 여러 지역에서도 독자적으로 문명이 발생하고 발달하였으며,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특정 문명이 낮은 곳으로 흘러간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책을 통하여 여행한 세계는 거칠었다. 사랑이 넘치는 아름다운 세상이 아니라 억압과 폭력, 불평등과 약탈 착취가 횡행하는 거친 세상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도달한 곳은 디스토피아였다.(제27화 「경험이 멸종된 멋진 신세계」) 물론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제28화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이 여정은 우연이었을까? 단지 내가 고른 책, 나의 독서 경향이 비관적이었기 때문일까?

그래서 새해에 읽을 책을 정했다.


<한국이 받은 작은 선물>


FIC

한국의 산업화를 이끌어 오늘날의 선진국으로 도약시킨 숨은 공신 중 하나로 ‘한국정밀기기센터’(Fine Instrument Centre/FIC)란 기관이 있었다. 1961년 한국 정부와 유엔특별기금(UNSF)이 체결한 ‘유엔특별기금 원조에 관한 협정’에 따라 한국 정부와 유네스코가 공동사업의 형태로 1966년 설립한 기관이다. FIC는 정밀기기 관련 인력 양성, 정밀기기 수리 기술 지도, 원형 생산 등을 통해 정밀기기공업 수준을 끌어올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간단히 말해 유엔이 자금과 전문 인력을 지원해 기술을 가르쳐 공업발전에 상당 부분 기여했다는 것이다.


FIC는 한국기계금속연구소, 한국기계연구소, 한국생산기술연구원 등으로 변신 또는 통합을 거친 끝에 오늘날 한국산업기술시험원과 경기과학기술대학교로 발전했다. 오늘날 한국이 ICT, 정보통신기술 강국이 된 것은 이런 FIC와 그 후신 기관들이 뿌린 씨앗이 발아해 크게 자라난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FIC2.jpg FIC 자료 사진(유네스코 한국위원회)

느닷없이 잘 알지도 못하는 이런 이야기를 꺼낸 것은 80년대 말 ~ 90년대 초 어느 기간 중에 FIC의 역사를 정리하는 작업에 참여한 적이 있어서다. 나는 기술에 관한 한 문외한이라 전혀 사전지식이 없었던 터라 그 역사 자료를 정리하면서 전혀 몰랐던 사실을 많이 알게 되었고, 그래서 큰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최빈국에서 선진국으로

20세기의 60년대만 해도 우리나라는 먹고살기 힘든 나라였다. 전쟁의 폐허 위에서 힘겹게 ‘재건하던 시기였다. ‘재건복’이란 옷도 있었고, ‘재건 데이트’란 우스개 섞인 유행어도 있었다. ‘재건 데이트’란 연인들이 돈이 없어서 하염없이 걸어 다니기만 하는 데이트다. 어린이들은 학교에서 단체로 구충제를 복용하고 화장실을 들여다보고 회충이 나왔는지 알아봐야 했으며, 쥐 잡는 날은 잡은 쥐꼬리를 모아서 학교에 제출해야 했다. 쌀이 부족해서 의무 혼·분식이 시행되었고, 그 일환으로 학교에서는 도시락 검사가 일상이었다.


특별한 자원도 없고, 기술도 없었다. ‘수출입국(輸出立國)’이란 슬로건을 내세웠으나 수출할 상품이 없어 가발이 주요 수출품이 되었다. 여성들이 머리를 길러 잘라 팔면, 그것이 가발이 되어 수출되는 것이다. 매일 동네에는 머리칼을 산다는 ‘달비 장수’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달비’는 ‘여자의 머리숱이 많아 보이게 하기 위하여 덧넣는 땋은 머리를 뜻하는 ‘다리’의 영남지방 사투리다. 한때는 소변에서 무슨 성분을 추출해서 약품을 만들어 수출한다고, 공중 화장실마다 ‘들통’ 소변기가 놓여있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밀기기 기술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소중한 ‘먹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FIC에서 배출된 기능공과 기술자들이 처음에는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생산해 수출했다. 물론 그것은 주요 부품을 수입, 조립한 제품이었다. 우리나라는 그렇게 전자산업에 첫발을 내디뎠고, 그것이 가전을 거쳐 ICT, 반도체로 발전해 온 것이다. 이 초창기 한국 전자산업의 기수가 바로 FIC였다.


지금도 매년 열리는 한국전자전은 2026년에는 57회를 맞이하며, 10월 코엑스에서 열린다. 그 역사는 1969년 세운상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8년 세운상가가 완공되었다. 당시 그 일대는 무허가 판자촌으로 윤락업소가 즐비했다. 이것을 모두 철거하고 ‘현대적 전자상가’로 개발한 것이다. 완공 이듬해 제1회 한국전자전이 바로 이곳에서 열린다. 아직 상가 전체가 본격 가동하기 전이라 넓은 전시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찌는 듯한 더운 날씨였다고 한다. 에어컨도 없이 창문을 들어내고 대형 선풍기로 더위를 식혔다. 대통령이 방문한다는 소식에 그 대형 선풍기 뒤에 얼음을 매달았다는 전설적인 이야기도 전해져 온다.


바로 이 세운상가가 종합전자상가 겸 공장으로 한국 전자산업의 인큐베이터 역할을 했다. 세운상가는 1970년대까지는 전자산업의 메카로, 또 그 이후로는 종합전자상가로 전성기를 구가하다가 1980년대 말 용산전자상가 개발로 쇠락하고 재개발의 운명을 맞는다.


돌이켜보면 그리 긴 세월도 아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풍요롭고 발전된 삶에는 이런 역사가 깔려 있다. FIC가 설립된 1966년 한국의 1인당 GDP는 120달러 내외였다. 1960년 79달러로 아프리카의 가나, 수단 등과 비슷했던 데 비하면 크게 발전한 것이었지만, 여전히 세계 최빈국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그 당시의 시선으로 보면 오늘날 국민소득 3만 달러 이상의 선진국이란 현실이 믿을 수 없을 정도다.


문명화 서사

이런 FIC 중심의 스토리를 극단적으로 단순화하면, 일종의 ‘문명화’ 서사가 만들어진다. 문명국이 인적 물적으로 저개발국을 지원하여 발전시키고, 잘 살게 만들어준다는 스토리다. 물론 한 나라, 또는 한 민족이 저개발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과정은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니다. 국제사회의 지원이라는 것도 늘 건설적이고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한국이 저개발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과정이라는 큰 강에 흐름을 보태는 작은 한 지류일 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단순한 서사’를 꺼내는 것은 그와는 다른 서사와의 대조를 위함이다.


<상실의 문명사>


지엽적인 사실일 수도 있는 사례를 세계 문명사라는 거대 서사와 비교하는 것은 체급이 다른 선수들 간의 복싱 경기와도 같다. 그러나 오히려 그래서 더 비교가 효과적일 수 있다.


선천적으로 지능이 낮아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있다. 무시하고 구박하며 때리고 빼앗는 것이 옳은가, 도와주고 돌봐 주는 것이 옳은가? 어리석은 질문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직업교육도 하고 일자리도 만들어준다. 단지 도와주는 차원이 아니라, 자립 능력까지 길러주는 것이다. 앞서 소개한 FIC 일화가, 다소 무리하게 대입하면, 바로 그런 스토리다.


이것을 확장하면 집단 간, 지역 간, 민족 간, 국가 간에도 당연히 그래야 한다. 실제로 오늘날 국제사회는, 또는 선진국들은, 저개발국들에 원조도 하고 교육, 기술, 의료 등의 지원을 열심히 한다. 그렇다면 선진 문명이,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처럼, 후진 사회로 흘러가 발전시킬 것이다.


정반대의 문명사

그러나 인류 역사는 그렇게 진행되어 오지 않았다. 오히려 거의 정확히 그 반대다.

세계사의 영웅은 대부분 정복자다. 세계 어느 나라를 가도 동상으로 우뚝 서 있는 사람은 십중팔구 ‘위대한’ 정복 군주나 장군이다. 이들이 위대하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간단히 말하면 사람을 많이 죽였다는 뜻이다. 알렉산더 대왕, 율리우스 카이사르, 칭기즈칸… 정복은 한 나라 또는 한 민족이 다른 나라나 민족을 복종시키고 지배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들 위대한 정복자들은 자신들의 문명을 ‘전파한’ 사람이기도 하다.


인류 문명은, 그 발상지가 아프리카이건, 메소포타미아이건 아무튼, 장구한 세월 ‘발전해’ 왔다. 세계 4대 문명이란 틀에서 본다면 그 발전은 앞선 문명이 정복이든, 전파이든, 어떤 형태로든 낮은 데로 흘러가고, 그래서 그 문명을 ‘끌어올렸다는’ 뜻이 될 수 있다. 이것을 근대 제국주의 시대로 가져오면, 예컨대, 영국의 식민지배가 인도에 민주주의를 심었다는 식의 서사가 만들어질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2가지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첫째 인류 문명은 과연 발전해 왔는가? 둘째 발전해 왔다면 앞선 문명이 뒤떨어진 문명을 끌어올리거나, 전파되었는가? 의문을 제기한다는 것은 당연히 그렇지 않다는 주장을 내세운다는 뜻이다.


인류 문명은 과연 발전해 왔는가?

그렇다면 첫째 의문에 대한 답변은 발전만 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가 배운 대로 간단하게 정리하면 인류는 수렵 채집하면서 떠돌아다니다가 농경 생활을 하면서 정착하고, 마을과 도시로 성장하면서 씨족, 부족 공동체로 성장한 끝에 부족국가 민족국가로 발전했다고 한다. 거기서 사유재산이 생기고, 계급이 만들어지고 국가 체제가 다듬어졌다. 그리하여 오늘날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에 이르렀다. 그 사이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의 실험도 있었다.


다시 말하면, 현재 우리는 가장 발전된 체제, 가장 앞선 공동체 문화를 누리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온갖 편리한 도구를 사용해 삶이 편해졌고, 의학 발달로 더 건강하게 더 오래 살며, 교육 수준이 높아져 더 질 좋은 문화생활을 누리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유일한 대안이며, 발전된 삶인가?


실제 현대인의 삶은 힘겹고 피곤하다. 우선 불평등은 날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국가 간, 계층 간, 개개인간의 불평등은 아마도 인류 역사상 최악의 상태이며, 날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누릴 수 있는 것은 많아졌다. 그러나 불평등의 심화로 재화나 서비스가 좋은 것일수록 가격이 천정부지로 올라 서민들은 쳐다보기도 어렵다. 대다수 사람들이 누리지 못하는 ‘좋은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트럼프 대통령은 전용기를 타고 다니지만, 가난한 나라의 서민들은 버스 비가 없어서 가족도 자주 보지 못한다. 개인의 능력에 따른 것이라고 하지만, 이처럼 거대한 격차가 왜 필요하단 말인가? 이런 ‘초격차’의 환경 때문에 현대인은 온갖 스트레스에 시달리면서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느라 심신이 피곤하다.

구석기시대 동굴 벽화

고대 수렵 채집인들이 현대인보다 훨씬 여유롭게 삶을 즐기면서 살았다는 연구도 있다. 실제 상식적으로 상상만 해 보더라도 짐작할 수 있다. 인구는 많지 않고, 동물과 열매는 많다. 간단히 말해 먹을 것이 널려 있는 것이다. 수렵 채집인들이 일주일에 하루만 ‘일’을 하면 되었다고 하는 연구 결과를 어딘가에서 읽은 적도 있다. 실제 1만여 년 전 고대인들이 남긴 동굴벽화는 놀랍도록 섬세하다. 거기서 이들이 여유가 많아서 ‘그림이나 그리고’ 놀았다고 유추할 수 있다.


현대인은 오래 산다고? 그것도 사실은 오해가 많다. 과거 평균 수명이 40세였다고 해서 대다수가 40세가 되면 늙어 죽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난센스다. 그것은 평균일 뿐이다. 워낙 유아사망률이 높아서 그렇지, 유아기를 넘기기만 하면 60세, 70세를 산 사람도 많았다는 이야기다.


민주주의란 것이 과연 인류가 발명한 가장 좋은 제도인가도 따져볼 필요가 있다. 지금 그보다 나은 대안을 찾지 못하는 것일 뿐, 그것이 최후의 최고 제도는 아니다. 가장 민주적인 선거로 히틀러가 집권했고, 오늘날 세계가 극단적인 포퓰리즘으로 나라마다 정치 양극화로 으르렁거리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도 민주주의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류 문명이 발전해 온 것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 않느냐는 반론이 가능하다. 바로 그것이 2번째 의문이 제기되는 이유다.


'대안 제거'의 역사

인류 역사에서 손꼽히는 위인 중 단연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정복자다. 즉 문명은 퍼져 나가고 낮은 문명 수준을 높인 것이 아니라 다른 문명을 말살시켰다는 것이다.


고전적인 문명사관은 이렇다. 문명은 특정 중심에서 발생하여(세계 4대 문명 등) 뒤쳐진 상태에 있는 주변으로 퍼져 나간다. 기술 문자 국가제도 등이 확산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주변부도 중심부처럼 문명의 수준이 높아져 간다.


그러나 역사를 살펴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정복자의 논리가 있기 때문이다. 대개는 ‘더 높은’ 수준의 문명국이 주변을 정복하면, 주변의 문명은 말살되거나, 좀 더 나은 결말이라면 동화, 흡수된다. 남아 생존한다고 하더라도 ‘주변화’된다. 즉 ‘야만’으로 낙인찍혀 쇠락해 간다.


이때 문명의 우열, 또는 생존 여부를 가름하는 것은 ‘폭력’이다. 예컨대 더 폭력적이고 더 조직적인 문명은 항상 덜 폭력적이고 덜 조직적인 문명을 늘 이기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서구 문명이 아프리카나 아메리카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예외 없이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유럽이 인도와 동남아시아를 지배한 과정을 들 수 있다. 오늘날의 인도와 인도차이나반도, 인도네시아 등의 지역에 유럽이 진출할 당시, 이곳은 교역이 매우 활발한 선진 사회였다. 여기에 처음 유럽 세력은 상거래 단위로 진출했다. 즉 여러 나라 상인들이 모여드는 ‘시장’에 한 ‘플레이어’로 진입한 것이다. 현지 세력은 포르투갈이든, 네덜란드이든 영국이든 그냥 ‘상인’으로 포용하여 거래했다. 이렇게 발판을 마련한 이들은 한 현지 세력과 결탁해 다른 세력을 무너뜨려 나가는 방식으로 시장을 장악하고 나아가서는 무력으로 권력을 탈취하기까지 한 것이다. ‘동인도회사’란 것이 그렇게 작동했다.


그렇게 인도를, 또는 인도네시아를 장악한 다음에는 자국 문명을 강제로 이식했다. 이 과정에서 약탈과 폭력이 난무했고, 그 바탕이 된 것은 ‘불평등’, 즉 ‘차별’이었다. 현지인을 열등한 인종으로 간주해 온갖 비인간적인 학대를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서 당연히 현지 문명은 열등한 야만으로 배척되었다. 간단히 말해 식민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차이는 처음부터 조직적인 무력을 갖추고 그것을 사용할 의지를 가지고 있었는지 여부였다. 유럽인들은 그러했고, 아시아 인들은 폭력이 아닌 포용으로 상대방을 맞았기 때문이다.


문명의 수준이 아니라 폭력의 수준이 문명의 존립을 결정하는 핵심 요소였다는 것이다. 그것은 쉽게 말해 군사력이다. 물론 폭력적이라고 해서 그 문명 자체가 폭력적이라 거나 폭력만 있는 문명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 문명 속에 폭력적인 요소가 더 강하고 조직적이라는 뜻이다. 당시 인도나 인도네시아에도 무력과 폭력이 당연히 있었다. 그러나 그 강도나 조직력이 유럽에 비해 현저히 약했다는 뜻이다.


이는 다른 각도에서 본다면 가능한 대안 문명이 사라져 갔다는 뜻이 된다. 즉 당시 인도나 인근 나라들의 문명과 유럽의 문명은 분명 달랐고, 거기서 유럽과는 다른 국가나 지배 형태 또는 경제의 메커니즘이 다른 어떤 대안이 있었을 수 있지만, 유럽 문명이 강제로 이식되면서 그것이 말살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이어진 인류의 문명사는 단선적인 발전이 아니라 대안 제거의 역사이며 그 대안들이 사라진 것은 “열등해서”가 아니라 군사적·조직적 경쟁에서 패배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더 평화로운 사회가 더 폭력적인 사회를 장기적으로 이긴 사례는 거의 없다. 그래서 폭력을 덜 쓰는 문명이 아니라 폭력을 더 효율적으로 동원하고 관리한 문명이 살아남았고, 그것이 오늘날 세계의 모습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글 제27화에서 소개한 디스토피아 소설이 우리에게 주는 경고의 의미는 너무나 무겁고, 제28화에서 강조한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으며”,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것은 사랑”이라는 메시지는 너무나 소중하다.


불평등, 폭력, 페미니즘


여기서 불평등, 폭력, 페미니즘 등 3가지 키워드를 선택했고 그것이 2026년 제일 먼저 읽을 책을 선택하는 기준이 되었다.


불평등

불평등은 오늘날 세계 모든 문제의 근원이다. 이상향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모두가 잘 사는 사회”가 될 것이다. 말은 간단하지만, 이것을 정의하는 것은 복잡하다. ‘모두’란 어떤 범위의 사람들을 말하는 것인지,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등은 한 마디로 정의할 수도 없고, 그 기준을 설정할 수도 없다. 불평등이란 평등하지 않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평등이란 무엇을 말하는지도 정의할 수 없다. 모두 똑같은 음식을 먹는 것이 평등이라고 한다면, 그런 평등은 아무도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평등보다는 평등하지 않음을 논하는 것이 조금은 더 쉬울 듯하다.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사실 하나는 오늘날 세계의 불평등이 너무 심각하고 갈수록 더 심각해지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폭력

폭력은 앞서 거론한 것처럼 불평등을 포함한 오늘날 세계를 이렇게 만든 최대 요인이다. 여기서 말하는 폭력이란 주로 국가적 폭력이다. 토마스 홉스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란 명제에서 폭력을 막기 위해 국가가 폭력을 독점하는 사회가 만들어졌다. 그것이 오늘날 국가 개념의 핵심 중 하나다.


페미니즘

페미니즘은 인류의 절반인 여성의 오랜 고난에서 나온 ‘저항’이다. ‘평등’이란 개념 자체가 모호하고 논쟁의 소지가 많고, ‘성 평등’은 더욱 논쟁적인 문제다. 이 주제는 제5화 「페르시아의 여인」에서 이슬람권의 여성 차별을 중심으로 다룬 바 있다. ‘선진 문명’을 자처하는 유럽(미국 포함)에서도 여성 참정권이 실현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1920년 전후) 그렇다면 인류 역사는 여성 차별의 역사인가? 어쩌면 배제된 대안 문명에서는 그렇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불평등>


『모든 것의 새벽/데이비드 그레이버, 데이비드 웬그로/김영사/2025


장 자크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화두로 시작해 문명사의 통념을 뒤엎는 연구서다. 앞서 제기한 문명사의 발전에 대한 2가지 의문에 대한 생각 중에 발견한, 바로 그 주제를 다루는 책이다.


저자 중 한 사람인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인류학자로 2020년 5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사람이다. 출판사의 저자 소개문을 한 구절 인용하면 “인류학적 근거를 통해 수천 년간 구성되어 온 사회구조를 드러내고, 현대의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병폐를 비판하고, 우리가 다르게 만들어나갈 수 있는 세상을 상상하는 데 앞장선” ‘행동하는 지성인’이다.

또 다른 저자 데이비드 웬그로는 영국에서 공부한 고고학자로 농경과 문자의 기원, 고대 예술, 초기 도시와 국가의 출현 등에 대하여 연구하고 글을 많이 쓴 사람이다.

이 책은 이들 두 사람이 오랫동안 대화하면서 서로의 연구를 나눈 결과물이다. 인류학자와 고고학자의 일종의 ‘공동 연구’라면 어떤 것이 기대되는가? 어쩌면 오늘날 세계의 불평등에 대하여 말하기에 적합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다. 그러나 문명사가 정복에 의한 ‘대안 문명 말살’의 역사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 사라진, 또는 파묻힌 ‘대안’을 발굴하는 데는 이들 인류학자와 고고학자가 적임자 아닌가?

이 책은 본문만 700쪽이 넘고, 빽빽하고 상세한 각주가 100쪽 넘게 달려 있는 ‘학술’ 서적이다. 고고학은 완전 문외한이고, 인류학은 곁다리로 조금 공부한 입문자 수준인 나로서는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닌 것 같지만, 주제가 워낙 매력적이어서 도전해 본다. 앞부분을 좀 읽었지만, 역시 속도가 잘 나지 않는 데다 내용이 워낙 세밀해서 한번 읽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부터 든다. 흥미는 있지만 작심하고 공부하는 마음으로 달려들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1/5 정도 읽은 수준에서 보면, 인류학적 방법론이 적용된 부분이 많아서 그 방면으로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왜 이런 이야기를 할까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예컨대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생활과 사고방식을 상세하게 묘사하는 민속지 같은 기록이 많이 나온다. 거기에 고고학적 발굴로 나타난 여러 가지 생활이나 제도 등에 대한 분석도 곁들여져 있다. 이것은 그런 전통과 문화, 예컨대 수렵 채집인의 모습을 통해 고대의 사라진 문명을 복원하는 과정이다. 여기에 고고학 연구의 성과가 더해지니까 그 결과는 더욱 입체적이고 신빙성이 있다.

저자들은 인류가 수렵채집에서 농경생활로, 거기서 사유재산이 발생하고 계급이 분화되어 도시로 국가로 발전했다는 기존 문명사를 부정한다. 그렇게 일률적이고 단선적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라는 고고학적 증거가 넘쳐난다는 것이다. 이는 인류학적으로 입증된다. 즉 수렵채집인이 반드시 농경인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농경 생활을 버린 수렵채집인도 있고, 두 가지를 병행한 역사도 있으며, 반대로 가는 역사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말한다. 인류는 왕이 있는 사회에서도, 왕이 없는 사회에서도 살아봤다고.

또 한 가지 놀라운 주장은 서구의 계몽주의는 아메리카에 진출한 유럽인들이 그곳 선주민들에게 듣고 배운 결과 만들어진 사상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서구 제국주의의 자기 합리화 서사는 완전히 망가지고, 인류 문명사는 뒤집어진다.

그냥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고고학, 인류학적 증거를 바탕으로 한 이런 획기적인 주장이 가득 차 있으니, 끝까지 정독하지 않을 수 없다.



『폭력의 유산』/캐럴라인 엘킨스 /상상스퀘어/2025


‘신사의 나라’라는 대영제국이 얼마나 엄청난 폭력으로 식민지를 다스리고 착취했는지를 낱낱이 밝혀내는 책이다. 오늘날 국제사회의 분쟁은 그 원인을 파고들면 십중팔구 영국이 등장한다. 영국이 제국주의시대 식민지에 뿌려 놓은 분쟁의 씨앗이 곪아 터지는 것이다. 그만큼 영국의 제국주의는 세계 곳곳에 남겨놓은 상흔이 많고 크고 깊다. 그것이 새로운 것이 아니기에 굳이 이 책을 다시 읽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래도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사고방식과 실제 폭력의 전모를 알 필요가 있겠다 싶어 집어 들었다.


저자는 캐럴라인 엘킨스는 역사학자로 아프리카 식민지 관련 연구의 권위자다. 첫 저서인 『제국의 심판(Imperial Reckoning)』으로 퓰리처상을 받았고, 『폭력의 유산』은 그 후속작이다.


이 책은 1100쪽이 넘는 이른바 ‘벽돌 책’이다. 무거워서 들고는 읽을 수 없을 것 같다. 서문과 목차, 그리고 앞부분을 대략 훑어봤더니, 분량은 많지만, 읽어 나가는 데는 어려움이 없을 것 같았다. 앞서 소개한 『모든 것의 새벽』에 비하면 인류학이나 고고학이 아니어서 내용이나 용어가 평이한 편이다. 앞부분에서 눈에 띄는 제목은 ‘자유제국주의’였다. 제국주의면 제국주의이고, 자유주의면 자유주의이지 자유제국주의는 또 무엇일까 싶어서 좀 읽어봤지만 정확한 개념이 잡히지는 않았다. 아마 ‘문명화’란 명분으로 자유주의를 내세워 폭력과 지배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말인 것 같다. 실제 영국 제국주의의 폭력은 ‘법치’로 포장된다.

앞서 문명사에서 핵심 변수가 되었던 폭력이 실제 제국주의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작동하였는지를 살펴본다면 더 깊고 입체적인 그림이 그려지지 않을까 기대된다.


『다락방의 미친 여자』/샌드라 길버트 , 수전 구바/북하우스/2022


제목이 너무 자극적이다. 그러나 사실은 “19세기 영문학을 여성의 시선에서 재독해한 고전적 페미니즘 문학비평서”라고 한다. 알고 보니 고전에 속할 정도로 유명한 책인데 나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도서관에서 책을 고르다가 우연히 눈에 띄어 집어 들었더니 꼭 봐야 할 것 같아서 2026년 읽을 3번째 책으로 선정했다.


저자 샌드라 길버트와 수전 구바는 둘 다 미국의 영문학자다. 이들 두 여성은 학문적 동지라 할 수 있겠다. 출판사 소개를 인용하면 이들 두 사람은 “1973년 인디애나대학에서 처음 만나 영미 여성문학을 함께 가르쳤고, 공동 강의와 연구를 바탕으로 『다락방의 미친 여자』 『남자의 것이 아닌 땅』(3부작) 등을 함께 저술하는 한편, 『셰익스피어의 여동생』 『노턴 앤솔러지: 여성문학』 『여성의 상상력과 모더니즘 미학』 등을 편집하며 페미니즘 비평의 문을 열었다.”


나는 솔직히 페미니즘을 깊이 알지 못한다. 오히려 약간의 편견이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성 평등은 적극 지지하지만, 화장이나 여성 속옷을 거부하는 등의 ‘과격한 입장’에는 거부감이 있다.

이 책에서 다루는 여성 작가들은 제인 오스틴, 메리 셸리, 샬럿 브론테, 에밀리 브론테, 에밀리 디킨슨 등이다. 가히 기라성 같은 여류작가들이 등장한다고 할 만하다. 이들 작가의 작품을 읽을 때 늘 이해할 수 없는 ‘그 무엇’이 늘 공감을 방해했던 기억이 있다. 여주인공들이 대개 히스테리컬 했다는 기억이 강하게 남아있다. 그래서 ‘다락방의 미친 여자’인가… 이 제목에 그 기억, 그 의문의 해답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 ‘다락방의 미친 여자’는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에 나오는 버사 메이슨에서 따온 것이다. 그러므로 ‘다락방’은 “가부장제 문학 질서의 변두리”, ‘미친 여자’는 “말도 할 수 없었던 여성의 자아”의 은유라는 설명이다. 그러고 보니 19세기 여성 작가들이 그런 작품을 써낸 것이 경이롭고, 결국 그 작가들이 ‘다락방의 미친 여자’라는 풀이도 가능할 것 같다.

학창 시절 이들의 책을 읽을 때 이해할 수 없었던 ‘그 무엇’의 장벽을 지금이라면 넘어갈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을 읽지 않고서도 말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나면 뭔가 더 환하게 눈이 열리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은 미국에서는 1979년에 출간되었으니, 이제는 고전이라 할 만하다. 영문학을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몰랐다고 하는 것은 변명 밖에 되지 않을 터.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꼭 읽어 봐야 할 것이다. 이 책을 읽은 후에는 수많은 작품이 꼬리를 물 터이다. 지난해 탄생 250주년을 맞은 제인 오스틴을 시작으로…


<에필로그>


책, 주로 소설을 통하여 세계와 문명을 탐험하는 1차 여정은 여기서 막을 내린다.


서두에 밝힌 대로 나의 책 읽기는 극심한 편식이었다. 세계정세와 문명이라는 보기에 따라서는 ‘거대 담론’에만 매달려 인간성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편향이 심했다.


인간성이란 무엇인가? 우리의 삶은 어떠하고, 우리의 사랑은 어떠하며, 우리의 마음은 어떠한가? 나를 지키고, 나를 건강하게 하고, 우리를 지키고, 우리를 건강하게 하고, 그리하여 아름다운 관계 속에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가!


그러나 그 소중한 모든 것은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 팔레스타인의 가자 지구나 우크라이나를 보라. 그 단란하고 가지런했던 삶은 단 한순간에 무너지고 사람들은 거친 운명의 회오리에 내동댕이쳐진다. 그들에게 일상적인 ‘마음 챙김’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 순간부터 전혀 엉뚱한, 상상도 못 한 일상이 펼쳐지고, 그것이 뉴 노멀이 되고, ‘뉴 노멀’이 다시 ‘노멀’이 된다.


지구가 빙하기로 접어드는 것을 우리는 막을 수 없다. 배기가스를 줄이고, 플라스틱을 줄인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물론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작은 실천으로 의미가 크기는 하다. 그러나 우주적인, 지구적인 차원의 변화는 우리 의지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인류는 그저 환경에 적응하거나, 그렇지 못해서 최악의 경우, 멸종할 따름이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멈추거나, 반대로 돌릴 수는 없다. 사람이 하는 일이지만, 우주적인 변화와 유사하다. 더 폭력적인 문명이 덜 폭력적인 문명을 이기고 살아남았다. 미래도 그렇지 않겠는가? 중국이 저렇게 맹렬하게 군비를 확장하는 것은 다른 문명은 죽어도 저는 살아남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것이 방어 수단이라고? 천만의 말씀이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때가 되면 남을 죽이고 나는 살겠다는 뜻이다.


덜 폭력적이 되자고 외쳐봤자 별로 될 일은 없다. 모두가 덜 폭력적이 되어도 단 한 사람이 더 폭력적이면 연쇄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더 폭력적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지금과 같은 세계가 되었고, 점점 더 불평등하고 폭력적이 되어가고 있다. 이렇게 계속된다면 유토피아보다는 디스토피아가 가까울 수 있다.


그러나 인류는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동물로서 인류는 지구를 지배할 수 있는 힘이 없었다. 더 강한 동물이 수두룩했다. 그러나 공동체를 이룸으로써 살아남았고, 지구를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많은 것을 경험했다. 사유재산, 권력, 국가, 폭력 등이 있는 사회도 있었고, 없는 사회도 있었다. 현재의 세계가 우리의 최선의 선택이 아니었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세상은 달라질지도 모른다.


세상 사는 모습을 두루 살펴보는 책 읽기는 그래서 나름의 의미가 있다.

keyword
이전 28화"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