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 가장 완벽한 '최종'
퇴근길 전철 창문에 비친 얼굴은 늘 퀭했다. 환한 형광등 아래서 종일 시달린 눈은 초점이 흐릿했고, 어깨엔 내려놓지 못한 피로가 곰처럼 육중하게 매달려 있었다. 덜컹거리는 열차의 진동에 몸을 맡긴 채 창밖의 어둠을 멍하니 응시하다 보면, 내가 지금 집으로 가는 건지 아니면 또 다른 일터로 끌려가는 건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디자이너의 삶은 화려한 결과물과는 거리가 멀었다. 낮 동안은 클라이언트의 갑작스러운 부르심에 회의실을 뛰어다니고, 수정 사항이 적힌 포스트잇을 모니터 가득 붙여나가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들이 칼같이 퇴근한 저녁, 사무실에 고요한 정적이 내려앉으면 우리는 비로소 책상에 다시 앉아 '진짜 작업'을 시작했다. 낮의 소란함이 걷힌 뒤에야 찾아오는 그 고독한 몰입의 시간은, 사실 젊음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유혹적인 늪이었다.
사무실 불이 어두운 도시를 외롭게 밝히는 늦은 밤, 책상 위엔 식어버린 커피와 반쯤 먹다 만 삼각김밥 포장지가 뒤섞여 있었다. 먼지 낀 공기 속에서 누군가 맥주 캔을 따는 “칙-”, “탁-.” 소리가 들려오면, 그것은 마치 새로운 2부 리그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처럼 울렸다. 우리는 매번 "이게 사람 사는 거냐"며 야근을 불평하면서도, 결국 자석에 이끌리듯 다시 모니터 앞에 앉았다.
그리고는 ‘중요 파일_최종_final_진짜최종_찐최종.psd’라는 이름의 파일들과 밤새 씨름했다. 픽셀 하나를 옆으로 1포인트 옮기고, 폰트 크기를 미세하게 조정하며 마우스를 클릭하던 그 시절. 어쩌면 우리는 젊음이라는 연료를 태워 사무실의 밤을 밝히고, 그 대가로 이름 뒤에 붙는 '최종'이라는 안도감을 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안도감은 늘 신기루 같았다. 내일이면 또 다른 수정 사항이 메일함을 가득 채울 것이 뻔했으니까.
전화벨이 울릴 때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터무니없는 요구사항에도 내 입은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아, 그건 좀 어렵습니다만... 일정 다시 조정해 보죠. 말씀하신 수정 방향으로 다시 작업해서 보내겠습니다.”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결국 가슴속 깊은 곳으로 꿀꺽 삼켜냈다. 꾹 누른 화는 수화기를 내려놓는 손끝에 실려 ‘쾅’ 하는 작은 파열음으로만 터져 나왔다. 그 작은 소음이 내가 세상에 낼 수 있는 유일한 반항이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모니터 배경화면을 보며 마음을 달랬다. 망망대해 한가운데 떠 있는 이름 모를 섬. 에메랄드빛 바다와 새하얀 모래사장, 그리고 비현실적으로 서 있는 야자수 한 그루. 모니터 속 파란 바다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으면, 텁텁했던 사무실 공기가 아주 잠깐은 시원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다음 작업 파일을 여는 순간, 파란 바다는 회색빛 포토샵 레이어 밑으로 사라지고 다시 잔인한 현실이 눈앞을 가득 채웠다.
‘그래, 돈 벌어서 꼭 여기 가자.’ 그것은 다짐이라기보다 주문이었고, 무너지지 않기 위해 스스로 만들어낸 작은 환기구였다. 나는 그 야자수 아래 누워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하며, 1포인트의 그리드에 갇힌 숨 막히는 일상을 견뎌냈다.
그러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나는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일을 잘하고 싶은 걸까, 그저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걸까. 아니면 그저 남들처럼 '잘' 살아보고 싶은 걸까. 모니터 속의 '최종'은 계속해서 늘어만 가는데, 정작 내 인생의 '최종 목적지'는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내 인생도 누군가의 수정 사항에 맞춰 시시각각 변하는 디자인 시안처럼 느껴졌다. 정작 '나'라는 원본은 어디에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서랍 속에 무심코 던져두었던 야근 택시 영수증 무더기가 쏟아져 나왔다. 날짜와 시간이 빼곡히 적힌 그 종이 쪼가리들이 마치 내 청춘을 깎아 먹고 받은 영수증처럼 보여 마음이 철렁했다. 새벽 2시, 3시... 그 시간들에 나는 한강을 건너며 무슨 생각을 했던가.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바라본 한강의 야경이 유난히 낯설게 느껴지던 밤, 내 안에서 이상한 결심이 안개처럼 스며들었다.
'떠나야겠다. 지금이 아니면 영영 이 굴레를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아.'
거창한 목표도, 대단한 계획도 필요 없었다. 학생도 회사원도 아닌, 아무 소속도 없는 ‘그냥 나’로 살아볼 수 있는 시간을 단 일주일만이라도 갖고 싶었다. 완벽한 비율과 정돈된 색상표가 지배하는 세상 말고, 조금은 무질서하고 땀 냄새가 나더라도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사람들은 퇴사 후에 유럽을 꿈꾸곤 한다. 나 역시 디자이너로서 정교한 그리드로 짜인 유럽의 미학을 동경했다. 하지만 그날 밤, 내 마음이 기울어지는 곳은 전혀 다른 방향이었다. 모니터 배경화면 속 그 무책임하게 푸른 바다, 끈적이는 공기, 그리고 계획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 뻗어 있는 야자수. 나는 내가 그동안 쌓아온 모든 '최종'들을 한꺼번에 지워버리고 싶어졌다.
나는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것은 내 컴퓨터 속에 쌓인 수많은 '최종_찐최종_진자 마지막.psd' 파일들과 진짜 작별을 고하는,
내 생애 가장 완벽한 '최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