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이라는 이름의 마법

by 몽쉐르

여행지에서 지켜낸 일상의 무게

여행 중이었지만, 우리는 매일 아침 수학 공부라는 약속된 일과를 잊지 않았다. 낯선 여행지에서도 공부해야 한다는 사실에 아이들은 그 어떤 불평도 없이 담담히 책상 앞에 앉았다. 여행지에서의 45분은 집이나 학교에서의 몇 시간보다 훨씬 더 밀도 높고 값진 시간이었다. 나는 아이들이 단순히 수학 문제를 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의 일상을 스스로 지켜내고 관리하는 소중한 경험이다. 노는 시간과 해야 할 일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법을 배우는 것, 그것이야말로 삶을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근간이 아니겠는가. 지금 할 일을 마쳐야 나중에 더 홀가분하고 즐겁게 놀 수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받아들인 아이들의 모습에서 부쩍 자라난 성숙함이 느껴졌다. 익숙한 안방이 아닌 낯선 타국까지 자신의 일상을 가져온 그 책임감과 성실함에 아빠로서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낯선 땅에서도 변치 않는 자신만의 리듬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세상 어디든 내 집처럼 누빌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생존 기술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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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이라는 이름의 마법

“아! 이게 뭐야? 엄마, 내 머리에 뭐가 묻었어!”

길 위에서 예온이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머리에 떨어진 이물감에 아이는 소스라치게 놀란 표정이었다. 확인해 보니 하늘을 가로지르던 새 한 마리가 예온이의 머리 위로 ‘실례’를 하고 간 것이었다. 찰나의 순간에 벌어진 황당한 사건에 예온이는 울상을 짓는 대신, 오히려 헛웃음을 지으며 상황을 받아들였다. “에헤헤, 머리에 똥 맞았대요! 이거 완전 재수 없는 거 아냐?” 옆에서 지켜보던 예준이의 짓궂은 장난기가 발동되었다. 혹여 예온이가 마음 상해하거나 오늘 여행의 기분을 망칠까 걱정된 아내와 나는 서둘러 방어막을 쳤다. “예준아, 너도 어렸을 때 엄마랑 같이 새똥 맞은 적 있어.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생기는 거야.” 하지만 정작 소동의 주인공인 예온이는 담담했다. 아니, 오히려 우리보다 훨씬 어른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뭐, 이것도 다 추억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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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짧은 한마디에 나는 머리를 한 대 얻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우리는 살면서 예기치 못한 불운을 마주하면 너무도 쉽게 운명을 탓하고 불길한 징조를 떠올리곤 한다. 부정적인 감정의 늪에 빠져, 그 순간이 가진 유일무이한 가치를 놓쳐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예온이는 불쾌할 수 있는 우연을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소중한 기억’으로 치환해 버리는 근사한 마법을 부렸다.

아이를 달래주려던 어른들은 오히려 아이의 넓은 마음 앞에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 삶에 몰아치는 비바람조차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넉넉히 품을 줄 아는 아이의 시선. 오늘 나는 예온이에게서 인생의 굴곡을 유연하게 넘어서는 가장 아름다운 태도를 배웠다. 삶이라는 무대에서 예상치 못한 비를 맞더라도 그마저 연출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예온이의 모습이 어른인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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