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혹감 뒤에 숨겨진 진실
ADHD를 가진 사람은 집중력과 정보를 잠시 기억하는 데 어려움을 겪어 일상생활이나 공부에서 자주 힘든 상황을 경험한다
수능 언어영역은 내게 가장 어려운 과목이었다. 지문은 복잡하지 않았지만, 한 문장을 두세 번씩 다시 읽어야만 이해할 수 있었다. 100분이 주어졌지만, 절반도 풀지 못한 채 시험이 끝났다. 나는 그 이유가 책을 많이 읽지 않아서 연습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비슷한 어려움은 계속되었다.
일상에서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책을 읽으면 모르는 단어는 없었지만 페이지를 넘기면 앞장의 내용이 기억나지 않았다. 한 장을 넘길 때마다 다시 읽어야만 겨우 흐름을 따라갈 수 있었다. ‘기록한 자료에 기반해 연구를 펼친다’ 같은 문장을 읽으면 ‘연구를 한다면 어떤 방식일까?’ 같은 엉뚱한 생각으로 빠져들곤 했다. 다시 책에 집중하려면 큰 노력이 필요했다. 혹시 문해력이 부족한 걸까? 주변에 물어보면 “나도 그래”라는 답이 돌아왔지만 그 말은 오히려 내 불안을 키웠다. 정말로 나만 이렇게 힘든 걸까?
성경처럼 비유가 많은 책은 더 어려웠다. 한 문장조차 이해되지 않아 답답했고 ‘누가 이런 책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쉬운 동화책부터 다시 읽어보려 했지만 책 읽기는 여전히 버거웠다. 그때는 몰랐다. 이 모든 것이 내 머릿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복잡한 전쟁 때문이라는 것을.
어느 날, 영화를 보고 상영관을 나서는 순간 머릿속이 텅 비어버렸다. 상영 중에는 영화에 완전히 몰입해 웃기도 하고 긴장하기도 했는데, 막상 동료들이 의견을 나누기 시작하자 내 머릿속은 하얘졌다. ‘도대체 무슨 내용이었지?’ 스스로에게 묻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동료가 물었다. "영화 어땠어요?" 나는 잠시 멈칫하다 습관적으로 대답했다. "재미있었어요." 그러나 동료들은 자신이 느낀 감정과 얻은 메시지를 깊이 있게 나누기 시작했고 나는 그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과 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느껴졌다. 같은 영화를 보고도 왜 나만 이렇게 다를까?
그때는 몰랐다. 영화를 보는 순간에는 나도 그들처럼 몰입할 수 있었지만 끝나면 기억이 텅 비어버리는 이유가 ADHD 때문이라는 사실을.
그러다 ADHD 진단을 받았다. 진단을 받고 콘서타를 복용하면서 내 삶은 놀랍게 변화했다. 마치 안개가 걷힌 듯 머릿속이 맑아졌고 책이 더 이상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문장을 되돌아가 읽을 필요가 없었고, 다른 생각으로 빠져드는 일도 줄어들었다. 성경조차도 더 이상 나를 힘들게 하지 않았다.
그제야 알았다. 내가 평생 힘들어했던 이유는 ADHD 때문이었다. ADHD는 단순히 집중력을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다. 나의 ‘작업 기억’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작업 기억이란, 짧은 시간 동안 정보를 저장하고 조작하는 뇌의 능력이다. 이 능력이 앞의 내용과 같은 일들이 벌어 진다.
그러나 약물을 복용하면서 처음으로 깨달았다. 내 문제가 단순한 집중력 부족이 아니라는 것을. 약을 먹고 나니 한 번 읽은 문장이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더 이상 책을 읽다 중간에 멈춰서 다시 읽지 않아도 되었고, 영화를 보고 나서도 머릿속이 비지 않았다. 내 작업 기억이 개선되면서, 나는 처음으로 나 자신을 제대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친한 형과 대화를 나누던 중 그 역시 ADHD를 앓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학창 시절, 5분 이상 집중해 본 적이 없었어”라는 그의 말에 나는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의사가 된 거예요?” 형은 웃으며 말했다. “나는 5분 동안 벼락치기를 했거든.” 그 말은 나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다. 집중력이 부족해도 그 나름대로 방법이 있다는 것, 그리고 모든 사람이 같은 방식으로 성공할 필요는 없다는 것.
나는 이제 과거의 나를 후회하지 않는다. 그때의 나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었고, 그것은 ADHD라는 특성 안에서의 최선이었다. 나를 괴롭히던 질문, ‘나만 이렇게 힘든 걸까?’는 이제 사라졌다. 나는 나를 이해했고, 나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책을 읽는 것이 즐겁다. 일주일에 한두 권을 읽으며, 과거에 좌절했던 ‘총, 균, 쇠’ 같은 책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성경조차도 더 이상 어렵지 않다. 나는 더 이상 ‘도대체 무슨 내용이야?’라는 질문에 괴로워하지 않는다. 내가 잃어버렸던 기억과 집중력의 퍼즐 조각들이 이제는 맞춰지기 시작했다.
나는 더 이상 남들과 비교하지 않는다. 나만의 방식으로, 나의 속도로 나아가고 있다. 그것이 충분히 괜찮다는 사실을 이제는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