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몽쉐르 Oct 23. 2024

과몰입

균형을 찾아가는 길

대학 시절 교수님께서 한 달의 기한을 주며 원서를 번역하라는 과제를 내주셨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기한이 가까워질 때쯤 벼락치기를 하거나 하루에 일정량씩 나누어 과제를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르게 행동했다. 과제가 주어진 순간부터 나는 책상에 앉아 사흘 밤낮을 과제에 매달렸다. 먹고 자는 것 외에는 모든 것을 제쳐두고 오로지 번역에 몰입했다. 그때의 나는 멈출 수 없었다. 이 일을 빨리 끝내지 않으면 다른 것에 집중할 수 없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처음 부동산 계약을 하게 됐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계약을 완벽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렇게 나는 공인중개사 시험과목인 부동산개론과 민법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단지 계약 하나를 제대로 해내기 위해서였다. 시간이 갈수록 부동산 시장의 흐름을 분석하기 시작했고, 서울 및 전국의 대장주 아파트 가격까지 외우며 밤을 새워 공부했다. 몇 달간의 노력은 몇 번의 부동산 계약에서 큰 도움이 되었고 사람들은 내게 유튜브 강사급 지식이라고 칭찬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내 관심은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매번 이렇게 끝이 보이지 않는 몰입의 연속이었다. 스스로 그만두기 전까지는 멈출 수가 없었다. 과몰입은 언제나 갑작스럽게 시작되고 또 갑작스럽게 식었다.


주변 사람들은 나에게 왜 그렇게 힘들게 사느냐고 물었다. 그들이 답답해 보였다. 나는 몰입을 통해 열심히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고 내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성실하다고 여겼다. 해야 할 일이 머릿속에 떠오르면, 그것을 끝내지 않으면 도저히 다른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지쳐갔고, 결국 깊은 우울감과 함께 죽음 같은 감정에 빠졌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은 내가 겪은 과몰입이 단순한 성향의 문제가 아니었다. 뇌의 신경전달 물질 불균형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도파민과 노르에피네프린의 활동이 부족할 때 집중이나 동기 유지에 어려움을 겪는다. 그러나 특정 자극에 대해서는 순간적으로 도파민 분비가 높아져 과몰입을 일으킬 수 있다. 또한 세로토닌 기능의 저하로 인해 감정 조절이 어려워지며 ‘이걸 반드시 끝내야 한다’, ‘완벽하게 해내야 한다’는 강박이 과몰입을 심화시킨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지금은 약물 치료를 통해 과몰입이 많이 줄었다. 예전 같았으면 글을 쓰기 시작하면 끝을 볼 때까지 손을 놓지 않았겠지만, 이제는 중간에 잠시 쉬기도 하고, 글을 쓰고 싶지 않으면 편안하게 다른 일을 하기도 한다. 배우고 싶은 것이나 해야 할 일이 생겨도 더 이상 그 일에만 매달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는다.


균형을 찾아가는 길

과몰입에서 벗어난 뒤 나는 삶의 균형을 조금씩 되찾아가고 있다. 예전에는 몰입하고 있는 순간이야말로 내가 가장 열심히 살고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의 방식이 꼭 옳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나친 몰입은 나를 지치게 했고 오히려 내 주변의 소중한 것들을 놓치게 만들었다. 이제는 내가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균형 잡힌 삶을 살고 있는지가 더 중요해졌다. 배움에 대한 열정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그것이 나를 집어삼키지 않도록 의식적으로 조절한다.


관계 속의 나

과몰입에 빠져 있을 때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건 사람들과의 관계였다. 나 스스로는 내 선택이 옳다고 믿었지만, 사실 가족과 친구들은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너무 무리한다고 말했지만, 그때의 나는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제는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하면서 그들이 느꼈던 걱정과 진심을 이해하게 되었다. 과몰입에 빠져있던 시절 나는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보다 내 일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사회적 맥락과 과몰입

한국 사회에서는 열심히 사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진다. 나 또한 그런 가치관을 내면화하면서 스스로를 끊임없이 몰아붙였다. 하지만 과연 그렇게 사는 것이 바람직한가? 과몰입이 반드시 성공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때로는 오히려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을 지치게 만들었고, 행복보다 부담을 더 크게 가져왔다. 이제 나는 ‘열심히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시 생각해 본다. 무엇이 진정한 성취감을 주는지,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더 의미 있는 삶인지에 대해 더 깊이 고민하게 되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