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을 빠져나가다
(3화)
호치민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경량 패딩을 벗고 반팔로 변신했다. 따뜻한 바람이 공항 출입구를 통해 들어와 피부에 스쳤고, 순간 아, 내가 정말 베트남에 왔구나 하는 실감이 났다. 공항 내부는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입국 심사를 기다리는 긴 줄로 북적였다. 약 2만 원 정도의 비용을 지불하면 패스트트랙으로 빠르게 입국할 수 있었지만, 굳이 서두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이 기다림의 순간이 베트남 땅에 첫발을 내딛은 흥분과 기대를 가장 선명히 느낄 수 있는 시간이 아닐까 싶었다. 물론 속으로는 조금이라도 빨리 입국 심사를 끝내고 싶다는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입국 심사관들은 줄이 아무리 길어도 조급해하지 않고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해나갔다. 그들의 느긋한 태도는 답답하게 느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했다. 나 같았으면 쌓인 일의 압박에 마음이 조급해지고 긴장하며 실수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마치 시간이 자신들의 친구라도 되는 듯, 편안하게 움직였다. 베트남 특유의 느림의 미학이 이런 모습에서 느껴졌다. 그들의 여유로움 속에서 나도 조금씩 동화되는 기분이 들었다.
공항 내부는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다. 날씨는 섭씨 30도를 훌쩍 넘었다. 입국 심사를 마치고 수하물 찾는 곳으로 갔을 때, 내 캐리어는 이미 혼자서 컨베이어 벨트를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한 시간을 기다린 끝에 드디어 공항 밖으로 나왔다. 그곳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화장실로 가 옷을 갈아입혔다. 반팔과 반바지를 입힌 아이들의 얼굴에는 다시 활기가 도는 것 같았다. 전광판을 보니 우리보다 한 시간 20분 늦게 출발한 부모님의 비행기가 막 도착했음을 알 수 있었다.
부모님을 공항입구에서 기다렸다. 앉을 의자가 없어 한적한 공간에 자리를 잡았다. 더운 날씨 탓에 몸이 피곤했지만, 가족들과 함께 있다는 안도감이 마음 한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 긴 비행으로 지친 아이들과 아내는 배고프다고 말했다. 점심시간이 한참 지난 탓에 모두 허기가 져 있었다. 나는 간단한 먹을거리를 찾으러 공항 안팎을 돌아다녔다. 공항 물가는 예상대로 비쌌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작년에 환전해둔 돈이 있었지만, 부족할 것 같아 ATM을 찾아다니기로 했다. 아이들과 아내의 지친 모습이 마음에 걸려 서둘렀다. 빠르게 걷다 보니 이마와 등이 땀으로 흥건해졌다. 무더운 호치민 날씨는 나를 더더욱 지치게 했지만, 지친 아이들을 생각하니 발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그러다 공항 한편에서 뚜레쥬르 간판을 발견하고 안도했다. 빵과 음료를 샀고, 아이들은 허겁지겁 빵을 먹으며 그제야 웃음을 되찾았다.
나는 뛰어다닌 탓에 배는 고팠지만, 입맛은 없었다. 대신 차가운 음료로 목을 축이며 다시 ATM을 찾아 나섰다. 이번 여행에서는 달러 대신 토스뱅크 카드를 이용해보기로 했다.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ATM 목록을 확인하며 공항 근처를 돌아다녔지만, 찾는 일이 쉽지 않았다. 국내선 앞에서 간신히 ATM을 발견해 돈을 인출했지만, 수수료가 무료라는 기대와는 달리 20만 동이 빠져나갔다. 확인을 제대로 하지 않은 내 잘못이었지만, 순간 짜증이 치밀었다. 그래도 아이들과 아내가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에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발걸음을 돌렸다.
처음부터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내 모습을 보며 문득 생각했다. "천천히 사는 법을 배우러 온 여행인데, 시작부터 이게 뭐람." 이 모습을 18일 동안 천천히 털어내고, 느림의 미학을 경험하며 진정으로 여유롭게 살아가는 나로 변해보고 싶다는 다짐이 들었다.
기다리던 중 중요한 사실이 떠올랐다. 서울에서 부모님께 유심을 드려야 했는데 깜빡 잊어버렸다. 덕분에 부모님과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어느 게이트로 나오실지 몰라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이 나오는 출구 앞에서 조바심을 안고 기다렸다. 아시아나 항공 수하물을 든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낼 때쯤, 부모님도 곧 나오시겠지 하고 기대했지만,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마음이 조금씩 초조해졌다. 무이네로 가는 기사님이 오래 기다리고 계실 거란 생각에 조급함이 더해졌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아빠가 공항 와이파이를 연결해 전화를 주신 것이었다. 너무 반가운 나머지 "아빠!" 하고 큰 소리로 불렀다. 공항 안에서 헤어진 것도 아닌데, 오래 못 뵌 사람처럼 기쁨이 북받쳤다. 부모님을 만나니 모든 긴장과 불안이 눈 녹듯 사라졌다. 이제야 가족이 모두 모였다. 앞으로의 여정이 더욱 기대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