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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골 Feb 11. 2024

회고] 돈으로 시간을 사는 걸 여전히 두려워하는 나

과거를 상기하고 꾸준히 반면교사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나는 초등 5학년~중학교 시절에 RPG게임 <바람의나라> 폐인으로 살며 공부는 내팽개치고 살았다. 내 부모는 집안 사정이 빠듯하기도 하고 특히 부친이 공부는 본인 의지로 해야 한다는 교육관이 투철했고, 내 형도 나랑 비슷하게 중3까지 아무 생각 없이 살다가 부친이 실업계고에 보냈다. 형은 늦깎이로 공부해서 재수 끝에 수능을 망치고 부산대 최상위과에 갔다. 16년이 지난 지금도 서울 주요대학에 못간 게 형의 한으로 보인다.


 나는 형보다 6개월 일찍 정신을 차려서, 부산 실업계에서 폭력 학생들에게 시달리는 미래만은 피하기 위해 3-2 기말고사에서 온힘을 다했다. 고교입시에 반영이 안되는 시험이어서 다들 손을 놓은 와중에 나는 중상위권에서 단번에 36명 중 6등 정도로 치고올라갔다. 대단한 성과는 아니지만 Grit, 즉 <이기는 습관>을 처음 경험한 순간이다.

 부친은 내게 국립대 성적 안될 거면 대학 갈 생각도 마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때만 해도 3년 후 부산대 하향지원하기 싫어서 울부짖은 끝에 재수를 할 줄은 상상을 못했다.


 2011년 경상도 일반고에선 여전히 야간'타'율학습이 있었다. 나는 야자의 최대 수혜자로, 남이 강제로 조성한 환경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공부에 특화된 수동적 인재였다. 소위 x반고로 묶이는 고교에서 나는 교사와 급우들이 남달리 취급하는 다크호스로 나날이 부상했다. 1학년땐 키가 171이었는데, 남자들 사이에서 사회성이 떨어지고 서열이 낮아도 공부를 잘하면 받는 그 특별한 취급이 달콤했다.


 x반고에서 나를 제외한 모범생들은 찐따 취급을 안 받으려고 공부에 도움 안되는 데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학구열 떨어지는 학교를 걸러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폴 그레이엄 <해커와 화가> 1장에 실태가 적나라하게 나온다. 한국이 미국 공교육보단 낫다.

Y combinator 폴 그레이엄이 쓴 <해커와 화가>

 그러나 지금이 70년대도 아니고 사람이 아무리 주어진 환경에서 노력해도 스타트라인과 환경에 의한 상한선을 뚫기는 어렵다. 그래서 고3때 나는 그간 회피한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부친과 갈등했다. 사립대는 안된다는 거다. 부친은 국가장학금이 '빚'이 아니라는 사실을 도무지 받아들이질 못했다.

 그리고 나는 글 전반에서 묘사한 것처럼 내 힘으로 돈 벌 준비가 전혀 안된 샌님이었다.


 또다른 현실적인 문제가 당시 서울대에 지원하려면 응시해야 하는 '투과목'이, 실제 실력보다 대학 한 급간 이상 떨어뜨리는 강력한 디버프라는 사실이다. 즉 서울대 가보려다가 수능에서 박살나는 친구들이 많았다. 9평에서 급하게 화2를 응시하고 그간 친분이 있던 교사에게 조언을 구했는데, 나름 현실 인식을 시켜준답시고 내게 투과목을 포기하라고 으름장을 놓았고 나는 포기했다.

 그 교사에게 진작 내 특수한 상황을 털어놓았다면 어땠을까.  나는 남의 지혜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본 경험이 거의 없었기도 하고, 모친이 어디 가서 자신이나 집안의 치부를 말하지 마라고 신신당부를 해서 그러지 못했다.


 수능으로 성대 갈 정도는 나왔고 고대 상향지원, 부산대 하향지원해서 부산대 4년 전장+ 학기당 50만원 생활비 조건을 제의받았다. 부친은 내가 부산대 등록취소하는 순간까지 갈등하는 티가 났다. 내가 재수를 시작하자 내 걱정, 학비 걱정에 밤에 끙끙 앓더라고 모친이 전해줬다.


 15수능은 역대급 물수능이었고 서울대의 실질적 인풋이 근 몇 년 중 단연 최강이었던 연도이다. 재수학원 친한 친구, 고교동창들 절대다수가 원래 실력보다 못한 곳에 갔다. 특히 앞서 말한 투과목을 쳐서 망했으면 국수영으로 어떻게 만회해볼 여지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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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대는 나같은 Time poor 하류층 아비투스가 몸에 배인 친구들이 체감상 3할은 되었던 것 같다. 9~10분위가 5할 가량이고 수도권 주요지역 출신도 5할 정도니까 나머지는 나랑 비슷한 거지근성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시간으로 돈을 삼으로써 소비의 공포를 잠재웠다.


 나는 내가 여자에게 인기가 꽤 많은 걸 실감한 지 한 2년 됐는데, 돌이켜보면 학과공부를 완전히 내팽개치고 알바를 해서 사회성과 돈을 얻었으면 진작 연애든 커리어든 난놈이 됐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이 학교 이공계 특유의 수험생 마인드라고 해야 하나.. 과탑부터 중하위권까지 전공을 내려놓아서 정량스펙이 떨어지면 끝이라는 괴상한 공포심리에 갇혀 다들 부질없는 전공공부를 붙잡는 학풍이다.

 비상경 문과들은 명문 로스쿨이나 상경 복전 각(즉, 3점대 후반 이상 학점) 안 나오면 바로 학회나 시험으로 전향하는 전략적 안목을 갖춘 반면에 이과는 그냥 답이 없는 레밍의 행진이었다.


 나 역시 좁은 시야로 깨어나는 데 오래 걸렸다. 개발자 시작하고 나서 지출이 커지면서 돈으로 경험을 구매할 수 있었다. 외모지상주의가 노골적이게 되면서 사람을 대하는 게 서툴었던 내게 유리한 환경이었다.


 그런데 지금도 내가 원하는 경험과 통찰력이 있는 사람과 프로그램에 찾아가는 데 푼돈 수십만원 쓰는 걸 벌벌 떠는 본성이 있다. 새로운 경험으로 내가 알지 못했던 세계를 접하면 전반적인 능력이 향상해서 지수함수적 성장을 이룰 수 있다는 교훈을 체화하기까진 못했다.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어서 현재의 지름길을 찾는 걸 여전히 잘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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