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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골 Jan 19. 2024

지정헌혈이 차라리 미지정헌혈보다 부질 있는 이유

고령화는 혈액보급도 파괴하고 있다


 나는 미지정 헌혈만 20여 회 했고 지정헌혈은 한 번도 해본 적 없다. 그러나 인터넷에 환자 가족이 지정헌혈 호소문을 올리는 게 '새치기'여서 도의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의견에는 반대한다. 그리고 한국이 더욱 고령화하면 미지정 헌혈의 씨가 마르고 지정헌혈만 존속할 것이고, 외국에서 혈액을 수입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비관적인 생각을 한다.

 헌혈을 할 수 있고 실제로 하는 계층은 대부분 젊은 남성층에 쏠려 있고, 피를 받는 집단은 노인 비율이 높다. 별로 알려지지 않은 이 사실을 내게 알려준 건 메이저의대 출신 바이탈 의사이다. 그런데 한국은 전세계에서 출산율 최하위권 국가이고 평균수명은 최상위권이니 헌혈을 할 수 있는 층이 갈수록 얇아지고 있다.

 거시적으로 밑 빠진 독 구조를 뻔히 보고도 내가 여태껏 미지정 헌혈을 해온 건 무슨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보는 거창한 정신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지정헌혈을 하기 귀찮기도 하고 미지정 헌혈이 내 머릿속 디폴트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그리고 사회가 어떻게 되건 말건 영화티켓 가격이 15000원 정도로 오른 이후로 그걸 2장씩이나 주는 게 달콤하다. 또한 위에 언급한 것처럼 헌혈은 선택받은 자들만 할 수 있다. 누구는 문란해서 못하고, 혈압이 높아서 못하고, 누구는 혈압이 낮아서 못하고, 누구는 하혈이 심해서 철분수치가 낮으니까 못하고, 누구는 해외여행을 갔다 와서 못하고, 누구는 불치병 고위험군이어서 못한다. 헌혈을 종종 한다는 사실 자체가 남들에게 꽤 강한 시그널링을 하거니와 스스로 어깨를 으쓱하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자기만족이 아니라 사회를 위해 공헌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다면 차라리 지정헌혈을 하는 게 부질 있는 사회가 곧 도래할 거라고 본다. 먹고 사는 문제가 망가진 사회에서 고상한 가치가 지켜질 리가 없다는 걸 상기해야 한다. 고령화는 근미래에 찾아올 정말 지독하고 잔인한 현실의 연속이 될 것이다. 혈액보급이 위태로워지는 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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