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ero to one 초반부에서 피터 틸이 이런 취지의 말을 한다. "맨땅에 벤처기업을 일구어 내려면 세상 모두가 no라고 생각하지만 자신만은 yes라고 생각하는 쟁점 한 가지는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생각을 세상 모두에게 알리려 들면 오히려 십자가에 매달릴 위험이 있다. 회사의 비전을 진심으로 믿는 초기 멤버들과 공유하는 수준으로도 충분하다."
오늘날에도 평균적인 사람들이 얼마나 불관용적인지를 피터 틸도 체감함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만큼 타인의 통념을 깨는 일에 많은 에너지가 든다. 너무 전문적으로 파고들면 배경지식 격차 때문에 읽지도 않을 거고, 함의 위주로 간소화하면 어떻게든 꼬투리 잡을 건덕지들이 생긴다. 자칫 전파 과정에서 빈정이라도 상하게 하면 더욱 닫힌 태도를 초래하기 십상이다.
고학력자들 중에는 자기계발서가 컴팩트하지 못한 특성을 경멸하는 사람이 많다. 나는 전형적인 한국 고학력 루트를 밟았기 때문에 고교 졸업 후 고학력자들과 주로 부대끼는 환경에 있어서 그러한 정서에 익숙하고 나도 그들과 동류이다.
그리고 이러한 고학력자들은 대부분 살아가면서 아쉬운 소리를 안 해도 되는 안전 지대-즉 진입장벽이 낮은 서비스업과 거리가 먼 진로-를 지향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 생각이 다른 누군가를 설득하는 데 골몰해볼 유인이 당연히 약하고, 그렇게 틀에 박히고 불확실성이 낮은 고임금 노동자가 되어 routine하게 산다.
zero to one(피터 틸)
반면에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오픈룰 경쟁에서 사업을 일구어낸 기업가 치고 자기계발서를 완전히 쓸모 없게 여기는 사람은 별로 보지 못했다. 요컨대 하루하루를 불확실의 바다 속에서 헤쳐나가는 사람들은 정작 자기계발서에서 영감을 얻거나 심지를 굳히는 계기를 발견하곤 하거늘, 대담한 도전을 해 본 적도 없는 고임금 노동자들이 지적 허세를 떠는 용도로 자기계발서 무용론을 떠들어대는 걸로 보인다. 배경지식 격차를 허물고 불특정 다수를 설득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아예 모르고 있던 세상을 스토리텔링-흥미 위주로나마 접하는 게 독자의 삶을 얼마나 많이 바꿀 수 있는지, 그리고 도전 과정에서 의지가 꺾이지 않는 게 고작 논리적 정합성 따위보다 훨씬 중요함을 이해하지 못하니까 고전을 읽으라느니 할배같은 소리나 해댈 수 있다는 말이다.
이 생각에 다다르고 보니까 정재계 고위직에 종교나 사이비 종교를 믿는 자들이 숱한 게 이해가 갈 지경이다. 기성종교는 사이비종교보다야 덜하지만 기본적으로 일종의 선민의식을 유도하는 경향이 있다고 본다. 믿기 때문에 선택받을 거라는 맹신이다, 논리실증은 둘째치고. 그 나이브한 믿음조차도 없는 인간들은 조금 시도해 보다가 시련을 겪으면 나가떨어져서 온실에 박히는 와중에 자신이 선택받았다는 믿음이 있는 자들이 장거리 레이스에서 페이스를 잃지 않은 채 원하는 자리까지 올라간 게 아닌가 싶다. 쟤들조차 고학력 고임금 헛똑똑이들보단 낫다. 자기계발서는 정신적으로 의지할 이정표로서 종교의 대체역을 하는 셈이다.
그리고 자기계발서가 물리학이나 엔지니어링에 범접하려 드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well-defined할 수 없는 삶의 기로들을 최소한이나마 모델링하려는 시도들이 바로 자기계발서다. 자기계발서를 엄하게 꾸짖는 사람 치고 삶에서 필연적으로 마주하는 불확실의 기로에서 쭈뼛쭈뼛 안 거리고 자신만의 컴팩트한 잣대를 잘 세우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근본없는 책 말고 고전 읽어라 어쩌구를 들을 때마다 얼마나 타인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저런 나이브한 말이나 하는지 한심하기 그지없다. 누차 말했듯 삶에서 중요한 것들의 존재 자체를 알지 못한 채 오랜 기간 살아온 사람은 자기 세상에서 깨는 게 엄청나게 힘들다. 애초에 필요성 자체를 가지지 못하고 쭉 흘러가는대로 살아온 마당에 고전을 읽고 소양을 쌓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나? 돈은 다른 걸로 벌고 지성은 취미로 추구하는 지같은 인간들한테나 알맞는 옷이다.
초심자에게 context 없는 자유란 감옥과 매한가지라는 말이 이런 데 통용된다. 교양 과목을 들어본 후에 전공책도 공부해볼까 하는 것처럼 자기계발서를 읽고 나서 아 심리 경제 건강관리 스타일링 운동이 중요한 거구나 나도 시작해볼까 생각하는 수순이 자연스럽고 일반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