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톡스 회고 조 7주차- 갓생 담론:바쁨을 통한 도피

by 반골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낮 사이에 잔 시간이 도합 14시간이 넘는다. 일요일에도 10시간을 잤다. 최근에 주말에도 계속 일정이 있었기 때문에 평일에 얻은 수면부채를 주말에 해소하지 못하던 걸 드디어 청산했다. 나는 새로운 직장에 들어온 지 한 달 넘은 프로그래머이고, 도메인지식을 한창 흡수하던 과정에 있다 보니 피로도가 빠르게 쌓였다.


후술하건대 나는 내가 나름 열심히 살려 한다는 점에 안도하는 게 무섭다.



7월달에 다른 스타트업에 다닐 때 대학생/대학원생 인턴들이 많이 있었다. 대표가 수요일 9시~10시에 직원끼리 삼삼오오 커피를 마시며 의미 있는 대화를 하는 시간을 가지기를 독려했다. 어느날은 대표에게 진로에 대해 대화하기를 요구받았는데, 한 대학생 인턴이 갓생을 사는 것에 대한 목표의식을 밝혔다.


이 대목에서 나는 "사실 저는 요즘의 갓생 열풍이 탐탁찮아요. 사람이 아무것도 안 하면 불안하게 마련이고 바쁘면 뿌듯하게 마련인데, 실제로 일이 잘되어서 영달을 이루는 건 1주일에 1시간만 일해도 가능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열심히 해도 방향이 틀려서 안되는 사람이 있죠. 열심히 하는 것과 전략적으로 잘하는 건 다른데 갓생 열풍은 어느 시점부터 불안을 피하려는 쪽으로 변질되었다고 생각해요.

oo님 개인을 예단하려는 게 아니고 전반적인 풍조에 대해 말하고 싶었어요."


이 대목만 보면 내가 인턴사원에게 무안을 준 걸로 보일 수 있는데,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그럴 수도 있지만 내가 했기 때문에 괜찮았으리라 확신한다. 왜냐하면 나는 그 전까지 소사회 내 튀지 않기 위한 적당한 사회생활용 스몰토크보다는 소위 mbti N형 대화 - 그러니까 진리를 추구하거나 대화 내용 자체의 원초적 재미를 추구해왔고, 그럴려면 대화 내용에 타인보다는 나에 대한 정보를 담아야 할 때가 많았는데 나부터가 인턴사원들 첫 입사 주에 자기소개 하는 순간부터 '망가짐'에 대한 거리낌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사람이 자기는 빈틈을 안 내주면서 내 빈틈을 파고드려는 정치행위를 한다'라는 악의가 느껴져야 멘트 내용도 마음에 받치게 마련인데, 나를 아는 사람은 이 악의가 없는 티가 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이다)


아무튼 내가 저 말을 하자 카이스트 대학원생 1명이 자기는 갓수로 사는 게 최종적인 목표이다 - 본인 생각에도 갓생 열풍이 노력을 과하게 숭상하는 방향이 된 것 같고 잘 쉬는 것도 노력만큼 중요한데, 사실은 그 '리프레싱 잘하는 것'마저도 그 다음번째 도약을 위한 수단이기 때문에 결국 굴레 내에 있는 것 같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나는 머스크랑 잡스도 계속 일을 했기 때문에, 나도 경제적 자유를 얻은 후에도 내 노력이 아무런 한계효용을 내지 못하는 steady state가 되기 전까지 일을 할 것 같다고 대꾸했다.



그런데 나 역시도 몇 달 전에 지적했던 갓생의 문제를 고대로 답습하고 있다. 물론 지금 성장을 안 하고 있냐하면 그건 아니라고 생각하고, 어린아이에게 "너 잘했구나"보다 "너 열심히 했구나"라고 하는 게 장기적인 성장에 도움을 주는 데 담긴 함의처럼 GRIT이라는 역량 자체가 앞으로 어떤 일을 하든 요긴한 국영수같은 factor인 건 맞다.


하지만 몇 주 전까지는 본업이 아닌 영역에서 비즈카페 유투브 영상을 빠짐없이 본다거나 주변 지인들과 거대담론에 대해 얘기하거나 독서를 하는 등의 여가시간을 영위하고 있었는데, 최근에 주말에도 피로가 가시지 않으면서 그런 생산적인 여가활동에 좀처럼 집중하지 못했다.

비즈카페 '실리콘밸리 현자 인생 11가지 조언'이라는 영상에서 주 1회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가지면 오히려 영감이 생길 가능성이 높다는 대목이 있었는데, 이번 주말에 잠을 많이 자면서 정상컨디션을 되찾음에 따라 드디어 그게 가능해졌다.



조촐하게는 디톡스 조 다른 분들의 액션플랜인 '기상 후 30분 간 아무것도 안 하기'나 '밥 먹을 때 스마트폰 안 쓰고 식사에만 집중하기' 등등을 따라해보고 있다. 어떤 조원 분이 정신적 피로도가 쌓이면 자제력이 떨어져서 디지털 디톡스가 더 어려워진다는 말씀을 해주신 적이 있는데, 나도 활력을 되찾고 나니 디톡스가 쉬워지는 걸 보면 정말 맞는 것 같다.


어제는 한 친구와 몇 주만에 단둘이 만나서 어떻게 비전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볼지, 그리고 이건희 회장이 20년 전에 양자반도체 시대의 반도체산업 변천에 대해 예견한 걸 언급하며 아직 도래하진 않았지만 '정해진 미래'에 미리 경각심을 갖고 대응하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등등에 대해 대화를 했다.

그러고보면 이런 대화만큼 내 삶에 장기적으로 중요한 게 별로 없는 것 같은데 이런저런 일정 때문에 미루고 미루다가 몇 주만에 만난다.

이 또한 앞서 말한 '갓생 열풍' 담론의 연장선상에 있는데, 솔직히 내 주변 사람이 바빠서 내가 만나고 싶어도 못만날 때보다 내가 바빠서 남을 못만날 때 기분이 덜 상한다. 이는 정말이지 동물적 본성의 영역에 가깝다. 이 바쁨의 뿌듯함의 달콤함에 빠지지 않아야겠다.


친구도 다소 비슷한 말을 했는데, 비본질적인 영역에 의도적으로 '결핍'을 줌으로써 본질에 강렬하게 매진할 동기부여를 하는 게 좋은 전략같다고 했다. 실리콘밸리 리더들은 뭔가 하나씩 빠진 사람들이다.

일론머스크는 남미에서 불우한 학창시절을 보내다가 미국에서 1회의 대학 편입을 거쳐 주류사회로 부상했는데, 만약 태생적으로 미국 WASP 주류였다면 지금의 테슬라 오너까지 갈 정도의 강렬한 유인이 있진 않았을 것 같다. 자기 첫번째 파트너에게 "나는 세계 최고의 갑부가 되거나 알거지가 되거나 둘 중 하나일 거다"라고 예견한 게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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