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반복적인 지루한 일상을 나름대로 열심히 사는 데엔 1년이 가도 10년이 가도 갑자기 전쟁이 터지거나 세상이 무너지진 않을 거라는 암묵적인 전제가 깔려 있다(반대로 현재 다소 힘든 입장에 있으면 차라리 전쟁이라고 나라고 혼자 외치곤 한다). 지금 몸담은 분야가 꼭 마음에 들진 않더라도 이 길을 가다 보면 나름대로 뭐라도 이룰 것이며, 남들도 다들 치열하게 살기 때문에 가만히 있으면 나만-우리나라만- 밀려나는 '붉은여왕 현상'에 의해 나의 경제적 정진이 강제된다. 웬만하면 어느날 길이 뚝 잘려서 낭떠러지에 봉착하는 일은 없으리라.
긴 타임 스케일로 볼 때 세계가 평평해지고 대전쟁과 재난의 공포가 작아지는 방향으로 진보하고 있고, 생존 문제가 해결된 후에는 정복보다는 효용-특히 쾌락이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세상이 발전하게 마련이다. 그 때문에 너무 강렬한 자극들이 범람하면서 도파민 디톡스 운동도 일어난다. 쾌락을 잘만드는 서비스업계가 내가 숭상하는 실리콘밸리의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이고 애플이고 기타등등 선진국 고부가가치 서비스업이다. 애초에 실리콘밸리를 개척한 세대가 스티브잡스 등 히피- 즉 인류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이상을 추구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었고 오늘날까지도 그 정신이 내려오고 있을 거다. 그래서 팔란티어의 알렉스 카프와 <킬 체인>의 저자 크리스찬 브로즈가 실리콘밸리의 군사적 무력함을 비판하기도 한다.
잊고 살았지만 80년 간 그 세계를 평평하게 해주는 밑받침이 미국 해군과 공군이었는데 이제 제조업을 잘하는 일부 태평양 중진국들이 재래식무기에서 미국을 추월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나온다. 그리고 선진국 위주의 구 1세계에서 그나마 배를 잘만드는 나라가 한국과 일본이다.
미국은 로마와 다르다고 생각했었다. 무기의 파괴력이 너무 강해진 20세기 후반부터 큰 분쟁은 일어나기 어렵기 때문에 로마인처럼 방탕해져도 아무 문제 없으며, 근래에 <가속주의> 담론을 좀 찾아봤는데 전인류가 기술발전 속도를 미처 못따라가 기술에 종속되는 문제가 있을 뿐 과거의 물리적 전쟁의 위협에 또다시 노출되진 않을 거라는 함의에 고개를 끄덕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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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키디데스는 사회가 민주정, 참주정, 중우정, 귀족정, 아노미상태 등등을 순환한다고 말했고 패권국과 도전국 간에 힘의 길항상태가 찾아오면 대전쟁이 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 2가지 모두가 호모 사피엔스의 쾌락-고통 균형과 크고작은 연관이 있다고 믿는 편이다.
사람은 본디 하루종일 먹이를 쫓거나 맹수와 투쟁하는 삶을 사는 원시인의 본성을 여전히 가지고 있고, 그래서 문명과 잉여자산이 생기기 전 사피엔스는 모든 개체가 스포츠 선수만큼 신체가 기민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연상태에서 먹이가 풍요롭게 주어질 리가 없으므로 하루종일 굶주리는 고통을 겪다가 음식을 맛있게 먹는 쾌락을 왔다갔다하는 균형이 잘 지켜졌을 것이다. 그러나 식의주 문제가 해소된 이후에 다른 역량- 즉 분업을 통해 지금보다 더 풍요로운 미래에 기여하는 역량이 중요해졌는데, 현대에는 그게 사무실이나 작업장에 가만히 앉아서 업무를 보고 집에 가서 정적인 여가생활을 보내는- 본성과 다소 다른 생활상을 강요하다 보니 <직업병> 등등이 생기는 것 같다.
그런데 쾌락고통 균형점으로 돌아오는 순간이 없으면 더 강렬한 쾌락이 있어야만 사람을 만족시킬 수 있다 보니, 우선 패권을 안정적으로 장악한 국가는 쾌락을 극대화하는 산업에 치중- 즉 방탕해지고 타락하게 마련이다. 그 와중에 헝그리 정신이 높은 도전국이 실질적으로 뭔가를 쟁취하는 수단이 되는 산업 역량을 분주하게 길러와서 전쟁을 일으킨다.
또한 쾌락의 역치가 올라가다못해 내부적으로 해소하기 어려워지면서, 이를 해소하는 외부적/폭력적 수단으로 전쟁을 지지하는 비율이 높아지기도 할 것이다. 나는 전쟁의 파괴력이 너무 커졌기 때문에 전쟁을 해결책으로 삼으면 안된다고 생각하지만, 현대 첨단문명의 사회문제와 병리현상을 적당한 전쟁으로 해소할 수 있다는 논지에 동의하는 편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엘리자베스1세와 청교도들이 식문화를 탄압한 게 합리성이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때는 2형당뇨같은 병이 거의 없었을텐데 그런 결단을 했으니 더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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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조타륜이 당분간 고부가가치 추구에서 실질적인 패권경쟁 수단을 중시하는 쪽으로 돌려질 수도 있고,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별 수 없으니 일단 내가 몸담은 분야에 하루하루 충실해야 하며 어떻게 하면 어떤 미래가 펼쳐지든 나름대로 의미있는 뭔가를 할 수 있게 테크트리를 만들 수 있을까 싶다. 찰리 멍거가 예측이 맞든 틀리든 이길 수 있는 베팅을 하라고 했다.
그래서 이제 무력한 내가 나름대로 뭘 할 수 있을지 몇가지 생각을 종종 하는데, 첫째로 역시 3년 전에 가볍게 맛만 본 AI를 열심히 팔로업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원래 나는 개발자들 일각에서 "개발자는 수학을 잘하거나 로우레벨을 해야 진짜다"라고 말하는 걸 속으로 비웃었다. 아니, 세상은 사치재가 지배하고 있고 그 사치재 잘만드려면 Json제조기라고 비난받는 부류의 개발을 lean하게고 빠르게 잘해서 비즈니스 임팩트를 내는 포지션으로 넘어갈 생각을 해야지, 그런 사농공상적 사고를 하면 어쩌냐 하고. 지금 역시도 로우레벨은 너무 나랑 안맞고 차라리 그럴 바에 하드웨어로 넘어가겠다는 생각이 커서, 원천기술인 AI를 다루는 포지션으로 영역을 넓히고 싶다. mlops엔 원래 관심이 있었는데 이유가 한 가지 늘었다.
둘째로 최근에 빨리 수익을 내고싶은 계기가 생기면서 만약 근시일 내 창업한다면 요새 한국에서 핫한 소비재(화장품, 식품)- 그러니까 사치재와 관련된 뭔가를 하면 유리하겠다고 생각했는데, 만약 한다고 해도 여기에 올인하진 않고 그 사업을 발판 삼아 만날 수 있는 사람들과 네트워킹을 하거나 다른 기회를 도모해야겠단 생각이 든다.
셋째로 세상이 평화로울 때 비중이 커지는 실리콘밸리스러운 덕목들(상상력, 엉뚱함, '동물적본성'에 덜 의존하는 리더십, 관용, 수평적 태도, 다양함)보다 전통적 덕목들(수직적 관계에서 요구되는 역량들, 소위 '사회생활'이라 불리는 소사회 내 정치)이 다시 중요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살려 한다. 현재 내가 타인보다 낫다고 해서 그걸로 당장 어떤 승복을 얻어내려 하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서로를 알아가는 게 중요하고, 누가 이상한 소리를 해도 일단 경청해봐야 한다는 생각이 꽤 있었다. 그래서 가끔 다짜고짜 이겨먹으려고 구는 사람을 만나면 별 대응을 못해서 그냥 그 자리를 피하는 게 상책이라 생각했었다. 누가 더 기가 세고 잘났냐를 초탈하고 어떻게 다같이 진리에 가까워지느냐에 골몰하는 환경에 있어야 일이 잘 풀리니까.
그런데 중요한 산업과 그 목적이 바뀌면 사회상도 꽤나 바뀌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커서 과연 내가 세상의 방향이 달라져도 거기에 부합해서 나름대로 정진할 준비가 되어 있을까 가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