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부터 나는 조용한 아이였다.
큰소리를 내지 않았고, 사고를 치지 않았고,
눈치를 보며 상황을 살폈다.
엄마는 자주 말했다.
“내가 남자를 잘못 만나서 이렇다.”
그 말은 하소연처럼 들렸지만,
아이였던 나에게는 다른 의미로 남았다.
엄마의 고생이
내가 태어난 삶의 조건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내가 얼른 자라야 한다고.
집안에 도움이 되는 사람,
아니,
엄마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학교에서의 나는 모범생이었다.
모든 선생님의 관심과 칭찬을 받았고,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으며
묵묵히 공부만 열심히 했다.
부모에게서
“공부해라”라는 말을
단 한 번도 듣지 않았지만,
나는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기준을 세우고
스스로를 관리하는 아이였다.
음악은 나에게
유일하게 숨을 쉴 수 있는 언어였다.
중학생이 되었을 무렵,
나는 모차르트의 터키행진곡과
베토벤의 비창 소나타를 모두 섭렵했다.
내가 자란 읍에서는
‘피아노 잘 치는 아이’로 알려졌고,
작은 음악회 자리에
찬조 출연을 하기도 했다.
피아노는 재능이었고,
동시에 나의 정체성이었다.
그러나 IMF를 겪으며
우리 집은 더 가난해졌다.
고등학교 2학년,
나는 음악을 포기해야 했다.
그 선택은 갑작스러웠고,
선택지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좁은 길이었다.
나는 1박 2일을 울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리고 남은 1년 동안
미친 듯이 공부했다.
사범대에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도망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새로운 생존 방식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무렵,
나의 피아노 인생은 사실상 끝이 났다.
그런데도 나는
그 끝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가을에 열렸던 화랑문화제
피아노 부문에 지원했고,
리스트의 곡을 연주했다.
쉬운 곡은 고르지 않았다.
마지막이라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어려운 곡으로
끝내고 싶었다.
나는 그 무대에서 상을 받았고,
그제야 피아노를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것은 포기가 아니라,
나의 음악에게 건네는
마지막 예의였다.
나에게는 세 살 아래 여동생이 있다.
나는 어떤 언니보다도
동생을 보살폈다.
숙제도, 학교 이야기들도,
울고 싶을 때도
늘 내가 먼저였다.
그러다 보니
동생은 엄마보다
나에게 더 의존하게 되었다.
나는 그 사실을
이상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사는 일은
이미 너무 익숙했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나는 늘 같은 마음으로 살아왔다.
어렸던 시절이었지만
빨리빨리 자라서
집안에, 아니
엄마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아이로 머무는 법보다
어른이 되는 연습을
먼저 배웠다.
이 글은
불쌍한 아이의 이야기나
희생을 자랑하는 기록이 아니다.
이건
너무 일찍 책임을 배운 아이가
자기 삶을 끝까지 책임지고
여기까지 살아온 기록이다.
그리고 나는 이제야
그 사실을
조용히 인정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