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자는 있었지만, 나는 혼자였다

by 여운

그 사람과 나는

굳이 대화를 나눌 필요가 없었다.


6년 동안

같은 교실을 바라보다가

나는 여중과 여고의 담장 밖으로 나왔다.



그해, 나는 수능에서도 운이 없었다.

1년 전까지 피아노 연습에 매진했던 나는

짧은 시간 동안 최선을 다했지만

기대만큼의 성적을 내지는 못했다.


집안 형편상 수도권 근처의 대학에는

원서조차 넣을 수 없었다.

지도에서 한참을 찾아야 하는 곳들,

교대와 사범대를 중심으로 원서를 넣었다.

나의 보호자였지만 내가 보호해야 했던 엄마와

면접을 보러 다녔다.


추운 겨울, 버스를 타고 전날 도착해

아침 일찍 학교를 찾아가 면접을 보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다.


차라리 나 혼자였다면 조금은 쉬웠을지도 모른다.

나는 늘 엄마를 먼저 챙겨야 했다.

낯선 곳의 버스 노선을 미리 파악하고

실수 없이 엄마의 좌석을 확보했다.

수험생인 나는 앉아 있기만 하면 됐다.


면접장에 도착하면

보호자 대기실이 있는지부터 찾았다.

엄마를 안전하게 앉혀 두고서야

나는 면접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엄마는 몇 번의 면접을 함께 다니며

비슷한 말을 반복했다.

“너 때문에 내가 고생이다.”

“이렇게까지 면접을 봐야 하냐.”

“면접 번호는 왜 이렇게 뒤냐.”

“다 나오는데, 너는 왜 안 나와서

나를 이렇게 지겹게 기다리게 하느냐.”

그 말들은 장소만 바뀐 채 같은 어조로 되풀이되었다.

그렇게 나의 대학 지원은 끝이 났다.


전화로 불합격 소식을 확인할 때마다

집 안의 공기는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그리고 마지막 합격자 발표 날,

지방의 한 국립대가 나를 장학생으로 불러주었다.




졸업식 날,

그 사람은 학교에 나타나지 않았다.

무선호출기로 음악실에 와 보라는 메시지만 남겼다.

텅 빈 음악실에는

너를 보내고 싶지 않지만 보내야 한다는 편지와

음악 CD 한 장이 놓여 있었다.


나는 그날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 사람도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누군가의 보호를 받기보다

조용히 보내지는 쪽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