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함의 평범성.
파친코. 애플TV. 2022. (스포일러 포함)
연기는 같은 사람이 같은 바탕으로 다른 본질을 그려내는 수수께끼다. 배우의 삶과 배역은 다르지만, 디트로이트판 서편제 ‘8mile’을 보면 그럴 거 같이 생긴 애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딱 그렇게 한다. 인상과 인생의 상관관계에 대한 고정관념은 미국도 우리와 비슷할지 모른다 생각했다. 양진 역 맡은 배우는 척박한 한국에서 연기로 자기 입지 다진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미국인 관점 한국인 얼굴로 박복과 억척을 아우르는 강렬한 인상 준다.
소망과 의지 닿는 생의 갈림길에서 선조와 후손의 접점을, 시공 초월한 교차편집한 것에 감탄했다. 원작이 편년체 구성이라는 것 알고 각본가에 관한 관심 커졌다. 강유정 교수에 따르면, 각본 기획 맡은 ‘수 휴’는 드라마 방향성에 대해 다른 제작자들을 홀로 설득했고 지금 작품이 나올 수 있게 길 열었다 한다.
치열한 고증과 수려한 영상, 다의, 중의, 함축, 은유를 모두 담은 인물과 사건, 대사, 배경, 폭압을 직시하지만 우아하게 표현하는 것까지. 한마디로 ‘시’였다. 창작자 동경하는 소비자 입장에서 압도당하는 느낌 받았다.
내가 소비하는 극 연기는 양극단에 ‘기호(記號)’와 ‘메소드 연기’를 둔 스펙트럼 위 어딘가에 있다. 파친코는 전반적으로 기호 연기(주관적 표현입니다)와 감정이입 연기가 혼재한다. 연기 톤은 일정치 않지만, 몸으로 하는 대사가 많아 좋다. 발화 텍스트에 집중하는 보통 한국 드라마와 달리 서사에 다양하고 주효한 방법을 활용해 극을 살린다. 몸으로 하는 대사 하나로 상황과 인물, 구도, 메시지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특히 여성 인물들 눈빛은 각자의 정체성과 방향, 역할 및 관계정서를 동시에 담고 있다.
수확 철 들녘에서 건강한 아비와 사소했으나 어느 것 어긋남 없이 행복했던 유년이 망국의 소녀에게 처음이자 마지막 황금기였음을 암시한다. 숨 참는 행동 하나로, 쑥쑥 해 보이는 촌부 안에 지혜와 사랑 가득 찬, 정작 물질하는 딸은 절대 알 수 없는 부성애를 말한다. 그 생은, 세상으로부터 지켜주겠다 약속한 아비의 부재 속에서 부모로 자격과 강인함 배운 딸이 거친 시대 견디며 아들은 절대 알 수 없는 모성애로 계승할 것이다.
본질이 착취라는 것 제외하면 명확하지 않아 예측할 수 없는 처벌을 보고 들으며, 지배당하는 사람이 자신의 행위에 대한 가치 판단을 스스로 내려놓으려 하는 식민 통치하의 무력감을 덤덤하고 섬뜩하게 묘사한다. 객실로 계급과 구조적 모순을 치환하고 같은 행선지를 향하는 시간과 공간에서 벌어지는 소동이 소요에 미치지 못한 에피소드를 통해 소수의 저항으로 전복되지 않았던 당대를, 허나 기저에 흐르고 있던 다수의 사연과 울분을 압축해 보여준다.
생존하기 위해 순진함 버리고 성공에 순수한 지금, 자신의 시작으로 돌아온 ‘한수’는 악제(惡制)로부터 유예된 공간 영도 밖에서 엄습하는 식민 조선의 현실을 냉철하고 성난 말로 전한다. 보여주지 않고 들려줘 오히려 더 직접적이다. 심지어 이때에도 각 인물의 성격과 입장, 관계, 복잡하고 다층적인 감정들이 급변하고 일그러지는 걸 두 배우가 충분히 표현하고 이런 맥락과 빈틈없이 짜여 있다.
필생에 필연인 택일, 그 때문에 다른 선택과 가정을 한 번쯤 곱씹어야 하는 상황은 온다. 확신과 책임감 충만한 삶 살아도 홀로 가는 것은 아니므로, 묻어버린 과거를 타자가 일깨우기 때문이다. 무지와 미숙에 비롯한 과오, 돌이킬 수 없는 파탄에 대한 자책과 상흔을 잊은 줄 알았는데 흔한 민요 한가락이 ‘선자’를 전 생애 가로질러 떠올리기 싫은 시간으로 데려가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연결은 시대와 세대, 남은 가족과 흩어진 인연, 추억과 사건 모두를 마주했던 나와 각자 흘러온 지금 무엇하나 헤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거미줄처럼 얽혀있다. 엔트로피 때문에 시간여행은 불가능한 것이며 주관에 따라 분화하는 우주만 있다 믿는 내게, 드라마 파친코가 관조하는 것은 한 번뿐인 우리 모두의 인생 그 자체다. 인간과 인생에 대해 폭넓고 깊이 있는 통찰이 살아있는 ‘파친코’는 내 지적, 정서적, 경험적 한계 너머에 있다.
미국에는 원 드랍룰(one drop rule)이 있었다. 한국에는 ‘코리안 원 드랍룰(주관적 표현)’이 있다. 큰 성공이나 성취 있는 외국인이 한국과 접점 있으면, ‘한국계’, ‘한국사랑’ 같은 말로 타자의 대단한 성취에 자신의 열등감을 희석하는 동일시 심리다. 소설 파친코와 드라마 파친코는 결이 다르다 본다. 당사자로서 주인공과 같은 정체성을 공유하는 작가와, 원작에서 보편성을 순도 높게 추출해 거부할 수 없는 가족정서와 소비하는 정의(Justice)에 관한 블루오션을 개척하는 애플TV는 펀더멘탈(Fundamental)이 다르다.
미군이 점령군으로 선언하고 이 땅에 처음 들어왔을 때, 많은 조선인은 해방군으로 알고 반겨서 미군이 의아했다고 한다. 21세기 한국인은 그렇게 순진하지 않으면 좋겠다. 지명과 시간 자막은 항상 영어, 일어, 한국어 순이다. 이것이 세계 시장에 흐르고 있는 현실논리다. 그 흐름에 무리하는 ‘한국사랑’은 없다. 드라마 파친코가 얼마나 흥행하고 어떻게 파급할지에 관심 두는 게 합당한가 회의적이다. 나는 소설 파친코를 몰랐다. 왜 이전에는 회자되지 않았는지 한국 땅에서 한국인이 주목해야 할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