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 꿈에 살다.
시네마 천국 감독판. 1994. (스포일러 포함)
창작자 의도를 가장 정확하게 반영한 것이 오리지널이므로 감독판은 축약판과 비할 수 없다. 불편한 리얼리티를 외면하지 않아 인물과 관계, 에피소드가 품은 의미가 선명하고 풍성하다. 엘레나와 알프레도에 관한 잔인한 현실과 나약한 이면을 남겨둔다. '국제용 축약판'과 다른 영화다.
청춘의 환영.
영화에 닻은 세 번 나온다. 마지막 닻은 살바토레가 엘레나와 해후하고 언 마음 녹아 움직일 때 닻이 내포한 기본 상징 그대로, 일생을 무거운 짐처럼 품다 잠시 머물기 위해 내리고 끝내 떠나며 다시 거두어야 하는 두 사람 관계과 추억을 은유한다. 한편으로 긴 세월 한결같이 남자의 중심을 지킨 첫사랑에 대한 뜻도 있다. 실연해도, 연인이 남긴 자부심은 오랜 인고를 가능하게 한다. 누구도 채우지 못하는 빈자리는 항상 옛 주인의 것이다. 하지만 여자에게 쓸모없는 순정은 횡포이므로 힘들고 아파도 홀로 풀어야 할 매듭이다.
엘레나의 어머니 모습에서 '녹터널 애니멀스' 수잔의 어머니가 비친다. 풍요와 지위를 향유하는 것으로 여러 욕구를 대체하고 안정적인 일상에 만족하며 산다. 대부분 그것만으로 충분히 살 수 있고 그것만으로 사는 건 누구에게나 충분히 의미 있다. 엘레나도 엄마를 닮은 딸로 산다. 자기 내면과 감정을 직시하고 정직한 선택에 따른 긴 투쟁과 인고를 거친 엘레나가 끝내 이상을 향한 동력을 잃고 현실에 녹아버린 것에 대비해, 그의 딸은 처음부터 고민이 필요 없는 얼굴로 현상에 반응하며 다니는 것으로 보아, 욕구에 충실한 책임감 옅은 보통 수컷 아버지 보르치아를 더 닮았다. 역할만 남은 여자는 외롭다. 이것이 보통 여자의 초상이다.
엘레나 역 브리지트 포세가 출연한 '라붐'(이라 쓰고 동물의 왕국이라 읽는다.)에서 간음에 대한 당시 유럽에 통하던 사회 인식과 정서를 알 수 있다. 이젠 한국도 불륜은 '라이프 스타일'로 문화적 승인을 얻은 듯하다. 다수 지구인들이 굳이 결혼을 선택한 뒤 열정적으로 일탈하는 심리와 입장은 이해하지만 공감할 수 없다. '감독판 시네마 천국'은 숨은 장면을 드러내, 두 사람의 이야기를 간절했던 보편 연애담에서 오해와 엇갈림, 반전이 숨은 고전 비극으로 바꾼다. 이 남다른 로맨스는 연결고리임과 동시에 외피로써 대척점에 있는 흔한 중년 외도를 설득력 있게 덮는다.
영화가 막바지에 이르렀다 싶었을 때 영화를 이끌던 템보보다 훨씬 빠르게 다채로운 정보가 밀도 있게 쏟아진다. 늦게 영화를 알아 대화와 회상으로 서사하는 건 좋은 연출이 아니라는 인식 강한데, 자동차 신은 극 전개에 매우 주효했다. 영화에서 '공간'을 어렴풋이 안 게 바로 '시네마 천국의 자동차 안'이다. 영화에서 대화나 액션을 통해 여러 방향으로 흐르는 또는 외부 충격으로 급변하는 전개에 쓰이는 공간이 자동차 안인데, 시네마 천국의 맥락에서는 일상 공간, 이동하는 공간, 소유한 공간, 사적인 공간, 밀착할 수 있는 공간 의미를 한 번에 담아 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많은 서사와 맥락을 한꺼번에 해결한다. 엘레나의 차에 살바토레가 오르는 것은 논리적이며 일반적으로 합승은 개연성에 관한 문턱이 낮기 때문에 남녀 관계가 변하는 차 안으로 이야기와 인물 및 관객을 유인하기 쉽다.
아름다웠고 당찼던 젊음을 표상하던 실체를 상실한 때, 좋았던 남자가 잘 익어 나타나 변함없는 태도를 지키는 건 여자가 한 번은 발상할 판타지다. 양립할 수 없는 시간선에 있는 정서를 다 쥘 최적해를 찾는 여자의 본성에 따라 여자는 늘 가장 이상적인 교차점을 찾는다. 보이기 싫은 것을 보여도 보이고 싶은 것을 보는 사람이 전하는 양가적 감정들로 인해, 내면 갈등과 혼란은 세월로 쌓은 힘없는 역할 자아를 무너뜨리고 메마른 줄 알았던 열정은 희미해진 물길로 견딜 수 없이 넘쳐흐른다. 그렇게 발버둥 치고 애태워도 얻을 수 없었던 시간, 확인하려 했던 고통스러운 질문들도 다 휩쓸려 나간다. 남자는 돌이키고 싶었던 모든 것의 회귀, 또 다른 출발로 오해하지만 그 밤은 여자에게 여한 없는 해후, 모든 것을 따뜻한 추억으로 완성한 관계의 끝이다.
아버지.
토토와 알프레도의 우정. 영화를 보기 전에 그런 줄 알았다. 처음 본 시네마 천국도 우정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관계였고 이어 본 시네마 천국에선 가슴으로 이어진 부자관계였다. 알프레도는 동화 같은 아이들의 친구도 은둔한 현인도 아니다. 그는 정직하고 성실한 자세로 사는 논리적인 사람이며 한 맺힌 삶의 무게를 소명으로 지고 사는 어디서나 귀한 사람이다.
알프레도는 인생사 큰 불행은 다 겪은 남자다. 세상을 원망하고 영사기가 꼴 보기 싫을 만도 한데 자신의 애환과 비참한 생업을 영화와 순수하게 분리했다. 작은 관 피지 못하고 진 꽃 앞에 하던 일 멈추고 당시 흔했을 죽음에 예우한다. 그 눈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은 슬픈 말, '자식 잃은 부모'가 잊을 수 없는 손님을 그리는 눈이다. 알프레도는 아내와 자식을 차례로 묻고 안나와 재혼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 아내에 대한 예의로 과거를 말하지 않을 뿐, 자신에게 절실했던 관계는 전처와 그 아이였던 것 같다. 말 나눌 사이가 된 아이 보내고 몸에 새긴 기억이 아직 지워지지 않은 때에 토토가 피 흐르는 상처 헤집고 들어 온다. 친구가 되어달라는 말은 부재한 아버지를 대신해 달라는 바람이다.
이 운명적 사랑은 알프레도에게 스며들어 결국 깊은 번뇌로 감싼다. 작은 반항에도 무력한 이면을 노출한 알프레도가 토토를 위해 그의 연애에 개입하는 것은 큰 용기가 바탕이다. 가슴으로 기른 아들과 관계 파탄 뒤 감당할 수 없는 원망만 남을 수 있어도 아들이 고통스러운 길을 가야 할 때 기꺼이 악역을 자처한다.
‘두 가지 다 못하는 놈’과 ‘순수해서 위험한 놈’. 전자는 대학 하숙집 옆방 수재에게, 다른 말은 겉멋 든 장삼이사들에게 여러 번 들었던 말이다. 순수해서 위험한 놈은 말이 안 통하고 두 가지 다 못하는 놈이라는 걸 이해시킬 방법이 없다. 다 보이는 내가 등질 각오로 끝낼 수밖에. 알프레도는, 연애감정에 휘둘려 가장 중요한 한 번뿐인 시기에 재능과 열정을 허비할 수 있으므로 자신이 홀로 된 고통을 택했듯 아들도 고통 속에서 피어나길 바랐다. 멀리서 들려오는 디 비타 감독 소식과 유명세, 작품을 보며 죄책감과 두려움 속에도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확인하며 더 긴 시간 더 성장하는 걸 지켜봤을 듯하다.
아끼는 사람이 하고 싶어 하는 걸 말리는 건 힘들고 실망하는 걸 보는 건 마음 아프다. 그럼에도 자신의 판단을 고집한 것은, 둘 다 얻기 힘든 가능성에 도박하다 모두 잃고 돌이킬 수 없이 파멸하는 것보다 성취에 따르는 성장과 함께 자연스럽게 인연이 맺히는 길을 택하는 게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숨 막히는 어둠 속에서 지난 생을 반추해 봤을 때, 가린 눈앞으로만 달리는 아들이 이른 중요한 분기점에서 더 나은 생을 애써 얻길 바라는 아버지 마음이다. 이건 친구의 역할을 넘어선다. 역에서 알프레도가 하는 말은 진심의 반대말, 아버지의 언어다.
다시, 꿈에 살다.
정의하지 못한 꿈을 좇는 토토, 꿈과 현실의 균형을 잡고 사는 즉 현재에 충실한 엘레나, 아들의 참 행복을 꿈꾸는 마리아와 알프레도, 각 인물들은 꿈이 가진 여러 모습으로 구도를 만든다. 토토의 실존은 꿈이다. 꿈을 통해 자각하고 움직이는 사람이다. 그의 꿈은 여러 관계로 일상에 드러난다. 부재한 부성과 준거에 대한 꿈은 알프레도로, 성장과 열정의 응축된 힘이 발산해 성취하는 꿈은 엘레나로, 미처 보지 못했던 꿈 어머니라는 여자 마리아로, 시네마는 다른 무엇의 표상 아닌 꿈 자체로. 영화가 끝난 뒤 토토는 진짜 홀로서기로 비로소 자신의 꿈, 자신의 삶을 정의해 나아갈 것이다.
타자의 의지로 가장 간절히 쫒던 꿈이 30년 전 뒤틀린 채 지금 확정되어버렸지만 그를 방황하게 했던 알 수 없었던 사실이 명확해졌다. 모든 관계와 의미를 재정립한 텅 빈 자신에게 순수한 꿈과 호기심이 다시 채워져 그의 작품 세계는 본질적으로 변할 것이다.
메마른 일상에 강렬한 재회와 공허함으로 창작자의 영광조차 무덤덤해지는 그때, 뜻밖의 선물로 토토는 웃음과 사랑을 회복하기 시작한다. 엔딩신은 중년 시네마 키드가 생생한 회상으로 활기를 되찾는 것 넘어, 시네마에 대한 순수한 태도와 벗어났던 열정이 꿈으로 다시 정렬하는 복원과 각성을 의미한다. 그의 부모가 토토를 존중하며 각자의 방식으로 기다린 미래다. 그들은 엘레나는 가지 말아야 할 신기루이자 더는 생채기 낼 필요 없는 흉터고 토토는 토토의 길을 가야 토토답게 사는 것을 잘 알았다. 귀향 이전 살바토레의 영화는 결핍과 부재를 승화해 당대의 문제의식과 닿은 듯한데, 그 이후 토토의 영화는 황폐한 시대에 모두가 놓쳤던 아름다운 대안으로 탄생할 것이다.
꿈을 되찾은 소년, 토토의 멈춘 시간은 다시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