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려움, 불안과 아쉬움, 정, 그리고 상실감? 헤르만 헤세 '구월'
우리는 왜 나를 떠나가는 것들에 대해 슬퍼할까? 사람이든 사물이든, 내가 있었던 환경과 상황이든? 그 또한 본능의 하나인가 아니면 우리들의 경험과 기억이 만들어낸 흔적일까? 그저 서운해서? 그동안 정이 많이 들었는데 아쉬워서? 그놈의 익숙함에 대한 상실감에서? 외로움 그리고 두려움 때문에?
우리를 떠나간다고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은 그렇다면 없는 것일까? 아 이제야 더는 안 봐도 되는 순간이 왔다고, 새로운 누군가가 혹은 신상이 내게 올 것이라고, 그저 내가 보게 될 새로운 그 무언가에 대한 순수한 기대와 호기심에서!
자연조차도 우리네 이 습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이 감정을 나름 합리화 시킬 수 있어서 내심 반길 것인가 아니면 그런 자연에 실망을 할 것인가? 계절 너마저도 그렇게 오고 가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는구나? 내년 이맘때 또 올 것이면서 뭘 그래? 그래도 일단은 아쉽고 슬픈 거야? 그런 거야?
나는 유난히 헤어짐에 약한 사람인 것 같다. 늘 그런 생각을 한다. 예전에 내가 국민학교 학생일 때 방학을 맞아 대학 다니던 형과 함께 우리집에 놀러왔던 형의 여자친구. 한 일주일 정도 있었나? 그 누나가 돌아간 후에도 한동안 내 마음에는 그 누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뭐? 왜?
어머니와 잠시, 아주 잠깐 떨어져 있어야 하는 그때에도 나는 그저 슬펐다. 의지가 약한 사람일까? 워낙 그리 나약한 감정의 소유자인가? 변화와 그에 따른 새로움 자체를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그런 부류의 인간인가?
사실 원시시대의 헤어짐이란 안전처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하는 것이기는 했다. 그나마 형성된 보호집단인 무리로부터의 멀어짐이다. 사냥을 위해서든 전쟁을 위해서든, 아니면 독립을 위해서든. 그런데 다른 쪽에서 본다면 그것은 새로운 기회 혹은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생존을 위한 보다 적극적인 행동이 되기도 한다. 사냥을 해야 며칠 더 먹고 살 것이 생기고 전쟁에 나서지 않으면 자칫 나와 나의 모든 가족이 다 죽을 수 있다.
큰 동물을 잡아 의기양양 집으로 돌아올 때를 생각해 보라. 상대방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승리의 기쁨으로 전리품을 가지고 자신의 집단으로 귀환하는 저 무리를 보라. 그렇게 '힘'이라는 개념이 생겨나고 권력이 등장하고 조직은 커져간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위한 헤어짐 (그것이 일시적인 것이 될지 영원한 이별이 될지는 아무도 그때는 모르지만 그럼에도!)을 그냥 슬퍼하고 거부하고 말 것인가? 언제까지? 몇 번이나?
어떤 것이 더 좋은 것인지는 나로서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서구에서는 아이가 아주 어릴 때부터 다른 방에서 그 혼자 재운다. 밤에 울어도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의 갓난아기 시절을 보냈다. 조금 커서는 이내 기숙사가 있는 학교로 간다. 방학 때나 잠깐 집으로 온다. 그들은 그렇게 내내 혼자만의 시간을 감내한다. 영국의 춥고 외로운 기숙사 생활에 관한 얘기는 많고도 많다. 그들의 소박한, 아니 차고 맛없는 기숙사에서의 음식은 유명하고도 유명하다. 그래서 그 옛날 내 아들 녀석은 그렇게 춥고 외롭고 음식 맛없는 그곳의 기숙사에서 생활하게 하지는 않았다. 지금도 그건 잘했다 그리 생각한다. 제 엄마와 함께, 따뜻한 공간 따뜻한 음식, 가득한 사랑의 온기!
그들은 그렇다면 헤어짐에 조금은 더 유연할까? 크게 슬퍼하지는 않을까? 그렇게 '훈련된' 그들이라, 그래서 우리의 눈에는 나보다는 좀 더 쿨해 보이고 더 성숙해보이고 냉철해 보이는 것일까? 아니, 그들도 속으로 들어가 보면 우리와 똑같을까? 그냥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 그들의 부모는 왜 그러면 그 오랜 세월을 이어내려 오며 그들의 그런 전통과 습관을 지속하고 있는 것일까? 그들은 지금도 그렇게 한다!
뉴욕으로 일주일 출장가는 남편을 아내는 참으로 반긴다. 내색을 않으려 하지만 뻔히 눈에 보인다. 한 달도 아니고 일 년도 아니고, 겨우 일주일. 더구나 처음부터 그 끝이 정해진 헤어짐이다. '달콤한 헤어짐'이라고나 할까? 우선 그 기간 저녁밥을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집에 있는 것 대충 먹고, 친구들도 만나고 외식도 하고. 모처럼 '나의 공간, 내 영역'이 늘어난다. 뉴욕까지 갔으니 '닥터 드니스' 화장품도 골고루 부탁한다. 품목을 꼼꼼하게 잘 적어서 준다. 물론 돌아올 때 남편은 아내를 위한 별도의 선물도 한 두 가지 챙길 것이다. 이런 좋은 일이?
황혼 이혼의 이유 중 하나는 아내가 갑자기 느끼게 된 '자기 영역의 상시적인 침범' 때문이라는 생각이 예전 언젠가 훅 하고 내 머릿속에 들어왔다. 한동안 '왜일까?'라는 생각을 하던 때였다. 그동안 남편이 회사 나갈 때는 하루의 반 이상이 오롯이 아내 자신만의 것이었다. 시간적으로도 그랬고 공간적으로도 그랬고 육체적 정신적 부담의 측면에서도 그랬다. 아침에 나가면 저녁이 되어야 돌아오니까. 그쯤은 견딜만했다. 아니, 오히려 이제 막 심심해지려던 그때에 딱 돌아오는 남편의 존재가 싫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퇴직을 하고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24시간 내내 내 옆에 있다. 아니, 내 공간 속에 들어와 있다. 나를 지켜보고 있다. 나를 감시하는 자가 생겼다. 이 불편함이라니? 어떤 용감한 남편은 잔소리에 간섭까지 한다. 이건 아닌데? 이런 것은 내가 참아낼 수 없지? 그 숨막힘, 그 부담감, 그 빼앗긴 느낌! '내 영역을 돌려주오, 시간적 공간적 정신적인 나만의 그 여유를! 지금껏 수십 년 내가 멀쩡이 누려온 나의 당연한 그 권리를!'
안된다고? 그렇다면 달리 방법을 찾아야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면, 그 헤어짐이 결코 모든 것이 끝나는 부정적인 상황만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으면 좋겠다. 물론 실제로도 그랬으면 좋겠다. 지금 동일인 혹은 동일 사물과의 재회를 말하는 것이라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 또한 우리는 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났다는 생각은 조금 바꿀 수 있으면 좋겠다.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가 그럴 수 있다면 언제나 우리를 슬프게 하던 그 헤어짐이 조금은 다르게 보일 수도 있으리라. 나는 그러면 참 좋겠다.
헤어짐에, 혼자 있음에 익숙하게 만드는 영국의 부모들의 홀로 재우기와 기숙사 넣기의 강공이든, 우리들의 패러다임 쉬프트에 의해서든 이제는 헤어짐에 대한 일방적 두려움을 이겨봐야 할 때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한다. 단지 변화를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헤어짐을 좋아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피할 방법도 없이 그렇게 내게 다가온 헤어짐이라면, 이겨내야지 어쩌겠나? 그저 주저앉아 눈물만 흘리고 있을 수는 없지 않겠나?
이제 오늘의 시를 본다. 자연조차도 헤어짐은 슬퍼한다는 사실에 인간인 나는 당연하지 하는 위안도 되면서, 또 한편으로는 헤어짐의 그 무서움에 다시 한번 몸을 떠는 씁쓸한 상황도 된다.
사실 이 시는 헤르만 헤세의 연작 아닌 연작의 시다. 우선 '봄'이라는 시가 있고 그리고 이 시가 있다. 이어서 '잠을 자러 가면서'라는 시가 이것과 연결된다. 겨우내 기다리던 봄이 오는 것을 크게 기뻐하며 자기를 알아봐 주는 봄을 시인은 몸을 떨며 황홀해한다. 이제 그 봄과 그리고 화려했던 여름이 그 끝을 고하는 이 순간, 정원도 그 정원 안의 장미들도 머무적거리며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뒤이어 과연 꿈꾸는 그 잠을 자러가는 것인지 아니면 더 깊고 영원한 잠을 자러가는 것인지 우리를 궁금하게 하는 시가 이어진다.
독일의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이 세 시와 요제프 폰 아이헨도르프의 시 '저녁 노을을 보며'를 가지고 '네 개의 마지막 노래 (Four Last Songs)'를 작곡했다. '저녁 노을을 보며'는 죽음에 대해 더 직설적으로 표현한다. 노부부가 바라보는 저녁 노을을 그 주인공으로 해서. 이미 번역해 놓았으니 조만간 소개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구월 (September)
- 헤르만 헤세
정원은 지금 상 중에 있다 ;
비는 냉담하게 꽃들 위로 가라앉듯이 내린다.
여름의 시간들은 전율하듯 몸을 떨며
말없이 그 끝을 고하고 있다.
키 큰 아카시아나무의 잎이
황금빛 잎 위로 떨어진다.
깜짝 놀라고 기진맥진해진 상태로, 여름은
이제는 죽어가는 정원의 백일몽에
그저 덧없는 미소만 짓고 있다.
특히나 못내 아쉬워하는 장미들 옆에서 오래, 아주 오래
여전히 머무적거리며, 잠시라도 더 멈추어 섰으면 하고 간절하게 바라면서,
결국은 어쩔 수 없이 극도로 지친 그 두 눈을
감는다.
< 우리말 번역 - 가을에 내리는 눈, 영어 번역본을 바탕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