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덧없다? 60년 이상의 그 긴 세월이?

- 지나고 나면 그저 모든 것이 다 아쉬운 법. 예이츠 '세 가지'

by 가을에 내리는 눈

열여덟 줄로 만들어낸 멋진 시. 여전히 인구에 회자되는 그 시. 머리의 좋고 나쁨은 결코 머리의 크기에 달린 것은 아니라는 과학적 증명만큼이나 길고 짧음이 명시의 척도는 아니라는 예시. 아주 작은 크기의 머리 (대가리)를 가진 새들이 그 작은 머리의 크기만큼 그리 머리 나쁜 존재가 아니라는 사이언스지의 글. 키 크고 싱겁지 않은 사람 없다시던 내 어린 시절 어머니의 말씀, 작은 고추가 맵다는 우리의 속담. 하지만 이 마지막 문장은 꼭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미 잘 아는 우리들. 다른 글에서 나는 언젠가 '결국은 크기가 중요하다 (Size matters)'다 그렇게 말했는데 이번 글에서는 달리 말해야 하겠다. '크기가 늘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60년 이상의 그 긴 세월이 '덧없다' 이런 결론을 내버리면 사실 또 다른, 더욱 심각한 덧없음과 허망함이 몰려온다. 아니 어떻게 그 오랜 시간이 그저 덧없을 수가 있나? 그러면 반백 년 이상을 살아온, 살아낸 사람들은 무언가? 그들은 왜 그리 오래 살아왔나? 그 한 단어 덧없음을 위해? 그런 줄 알면서도? 왜?


'덧없다', 참 오묘한 단어다. 이 단어의 구성이 항상 궁금했다. 당연 열심히 찾아본다. '덧', 동안/순간, 그러니까 그런 짧은, 잠깐의 시간조차도 아닌 그런 상황. '뭐 별다른 것' (덧) 없는 그런 그저 잠시 스쳐 지나가는 찰라의 순간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영어 단어 '플리팅 (fleeting - 시간 따위가 나는 듯이 지나가는, 한순간의)'이 참으로 잘 어울린다. 영어는 정교하다. 그래서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도 잡아내고 제대로 표현하는 일이 가능해진다. 화려한 영문학 번성의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다시 오늘의 주제로 돌아간다. 우리네 인생은 그냥 덧없다, 참으로 짧고 결국 별다른 의미나 가치는 없다 이런 뜻은 아닐 것이다. 그럴 수는 없으니까. 그 긴 세월 부침과 영욕의 세월이 어찌 남다른 의미를 갖지 않겠는가 그 누구에게든? 내가 이해하는 이 말의 뜻과 메시지는 이렇다.


하나, 60년 긴 세월? 1년이 무려 60번, 길다, 충분히 길다. 그런데 그것을 10년씩 묶으면? 겨우 여섯 번의 10년씩이다. 그리 길다고만 할 수는 없다. 갑자기 분위기가 바뀐다. 일견 길게 보일 수 있는 우리들의 인생, 어쩌면 생각하는 것만큼 그리 긴 시간은 아닐 수 있으니 매 순간 열심히 살라. 그런 메시지일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새긴다.


둘, 뭐 대단한 것을 이루려 하지는 말라. 그것이 쉽게 욕심으로 이어지고 그것은 다시 실망, 허망함, 고통과 번뇌로 연결된다. 그러니 그저 내게 주어지는 것 고맙게 여기고 과하지 않은 바람과 의욕 속에 살자. 그렇지 않으면 후일 삶을 마감하는 시점에서 당장 이런 말이 입에서 튀어나올 것이다. '삶은 허망한 것이야. 덧없지 참으로!' 너무 많이 바란 욕심의 결과라고 보면 크게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적당히 바라고 적절하게 의욕하자. 그러면 그리 큰 실망 또한 없을 것이다.


셋, '인생은 덧없다', 이 말을 뒤집어 다른 방향에서 보면 이런 말도 될 수 있다. 그러니 늘 작은 것, 잠시 왔다가 또 이내 가버리는 그런 조그만 달콤함을 내 손에 많이 쥐자. 절대 놓치지 말고 꼭 잡아내자. 그것들이 모이면, 60년 그 긴 시간 모이면 어마무시한 결과물이 된다. 그때는 인생은 덧없다 그런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어제 산책 중에 이 주제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곳이 우기이기는 하지만 요즘 거의 일주일 내내 긴 비가 온다. 흔한 경우는 아니다. 바람까지 강해서 산책이 힘들었다. 그래도 산책은 나의 힘, 강행한다. 비와 바람 속에 하는 산책, 문득 든 이 사유의 단초가 내내 나를 잡고 있다. 그래서 이렇게 글을 쓴다.


지난 세월 참 많은 '기적들'이 내 일상 속에서 일어났다. 고맙고 고마운 일이다. 그런 많은 기적과도 같은 일들이 앞으로도 내게 와준다면 더없이 고마운 일이지만 그 또한 이제는 욕심임을 나는 안다. 그래서 '불감청 고소원' (감히 대놓고 바라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마음 한 구석에서 은근히 바라고는 있다)마저도 하지 않으려 애쓴다. 언제부터인가 그것이 신과 섭리, 스피노자의 대자연에 대한 예의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줄수록 양양'이라는 말이 있다. 줘도 줘도 그저 자꾸 더 달라고만 한다, 뭐 이런 뜻의 말이다. 주는 사람도 화가 나기 시작한다. '그래 얼마나 더 줘야 네 성에 차겠니?' 나라도 더는 주기 싫을 것 같다. 괘씸한 마음도 들 것 같다. 이미 준 것까지 다시 빼앗아오고 싶은 충동도 생길 것이다. 그렇게까지 내 고마운 상대를 밀어붙이지는 말아야지?


'단사리' (냉정하게 끊어내고 하나씩 차근차근 버리고, 마음 단단히 먹고 떠나보내는 그런 결연함), 오유지족 (나는 이제야 비로소 만족을 안다, 만족의 의미 그 자체를 알게 되었고 나 자신 만족의 상태에 있다), 다 그렇게 지나가리라 결국은 다 그렇게 지나간다, '내가 내 인생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으면 충분히 사치스러운 것 아닐까?' (내가 좋아하는 오스카상 배우 윤여정님이 십여 년 전에 어디서 한 말이다, 나는 그 이후 늘 이 말을 기억한다), 이런 말들로 나를 다스리고 나를 위로하고 나를 준비시킨다. '삼계유심 만법유식' (과거 현재 미래의 삼계는 결국 우리들 마음에 있고 이 세상 모든 것 또한 우리 자신의 인식 속에 있다), 원효대사의 '오도송 (도를 깨달은 그 기쁨을 노래함)'에 나오는 구절이다.


더는 참지 못하고 오늘의 시를 본다. 내가 좋아하는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시다. 세계 각국에서 지금도 여전히 사랑받고 있는 의미심장한 사유와 묵상의 시다. 나는 지금 과연 지난 내 삶 속의 몇 가지나 아쉬울까? 정말 한 가지는 분명 크게 아쉽다, 참으로!


아쉬운 세 가지 (Three Things)

-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오 잔인한 죽음이여, 내게 세 가지를 돌려주오,

해변가 뼈 하나가 이렇게 노래하듯 외쳤다 ;

나의 풍요로운 품 안에서 부족한 것 하나 없이

모든 것을 다 누렸을 나의 아이 하나,

그것이 즐거움이든 평안이든 :

그러나 이제 나는 파도에 희어지고 바람에 바싹 마른 그저 뼈 한 조각.


여인들이 알고 있는 세 가지 사랑스러운 것들,

해안의 뼈 하나가 이리 노래 불렀다 ;

내 육체가 살아있을 때 나의 사람이 되었을 한 남자가

물론 내가 그럴 수만 있었다면

그렇게 삶이 주는 모든 것을 발견하는 것 :

하지만 지금 나는 파도에 표백되고 바람에 말라비틀어진 뼈 하나.


아직도 여전히 내가 생각하는 세 번째의 것,

해안가 뼈 하나가 이렇게 노래했다,

내가 내게 걸맞는 남자를 만나

서로 얼굴을 맞대고

그리고 기지개를 켜고 하품을 하며 그렇게 지내는 그 아침 :

아쉽게도 지금 나는 파도에 희게 변하고 바람에 말라버린 뼈 하나.


<우리말 번역 - 가을에 내리는 눈>


# 그의 나이 67세 때 쓴 시다. 노년의 작품인 셈이다. 그래서 더욱 그 묵상의 깊이가 깊다. 얼마 전에 소개한 '당신이 나이 들면', 오늘의 이 시, 그리고 조만간 소개할 '쿨에서 지켜본 야생의 백조들', 이 세 시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 주제와 배경이 비슷하다.


삶의 아름다움, 젊음, 열정, 기쁨과 즐거움 이 모든 것들은 영원히 언제까지 계속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들에게 상기시킨다. 그에 대한 아쉬움과 회한, 서글픔도 있지만 그 또한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대자연의 이치, 그러니 받아들이라는 따뜻한 조언.


그렇기에 더욱 현재를, 지금 내가 쥐고 있는 기쁨과 즐거움을 감사하고 충분히 나의 것으로 만들라는 시인의 메시지. 나는 과연 그렇게 하고 있나? 여러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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