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든 사람이 꼭 '노인'은 아니다 - 나만의 궤변?

- 내적 성찰, 지나간 기억들, 우아함. 투르게네프 '나이 든 남자'

by 가을에 내리는 눈

지하철 노약자석이 아닌 곳에 자리가 하나 났다. 내내 앞에 서있던 사람이 이제 막 앉으려는 순간 어디선가 중년 혹은 노년의 아주머니 한 분이 쏜살같이 달려와 쏙 그 자리에 앉는다. 앉으려던 그 사람은 이내 머쓱해진다. 중년이든 실은 노년이든 쏜살같았던 이 아주머니는 이로써 '노인'이 되었다. 조금 전 자신이 자기를 그리 규정해 버렸다.


나이가 든다는 것이 뭐 부끄러운 일은 아니다. 내가 그러는 것이 아니고 자연이 그렇게 강제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만 그러는 것도 아니다. 그 누구도 나이 듦을 피해갈 수는 없다. 그렇다고 굳이 자랑할 일도 아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고 나만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대자연이 그렇게 하는 것이니까. 그런데 유독 우리나라의 나이 든 분들은 그 나이 듦을 너무 자주 자랑하는 듯하다. 작은 이익을 얻기 위해. 아쉬운 일이다, 나로서는! 자식에게도 자신의 나이 듦을 자랑할 것은 결코 아니다. 그건 그저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굳이 자랑할 나만의 현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전에 보면 'old'는 나이 든/나이 먹은/나이 많은 그런 뜻으로 나온다. 궁금해서 'aged'를 찾아본다. '매우 old하여 노쇠한' 이런 뜻으로 나온다. 옳거니, 바로 내가 찾던 그 무엇이었다. 나이가 든 사람이라고 꼭 '노인'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작은 기댈 언덕이 생긴 것이다. 우리나라 노인복지법에 이 노인이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65세 이상의 연령층을 가리키는 법적, 행정적인 공식 용어다. 고용노동부에서 주로 쓰는 또 다른 법률에 보면 55세 이상인 사람을 '고령자'라고 정의하고 있다.


55세인 어떤 사람을 노인이라 하면 크게 기분 상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엄연히 관계 법령상 고령자다. 70세인 분 또한 그와 같은 부류에 속하는 고령자다. 공자님 말씀에 우리가 용어만 제대로 써도 우리네 일상 속 다툼과 분쟁의 많은 부분이 사라진다고 한 부분을 읽은 기억이 있다.


굳이 좋은 말 많이 두고 왜 노인이라는 용어를 쓸까? 일본의 법, 제도에서는 노인 대신 고령자라는 용어를 주로 쓴다. 미국에서는 시니어 시티즌 (senior citizen)이라는 말을 쓰고 다른 영어권에서는 연장자라는 뜻의 '엘덜리 (the elderly)'라는 말도 쓴다.


사실 내기 이해하고 있는 노인이라는 말 속에는 부정적인 의미와 느낌이 가득하다. 나이 든 것은 물론이고 '그래서' 노쇠하고 무기력하고, 더 이상은 생산적이고 창조적이고 유용한 그 무엇을 이 사회에서 할 수 없는 존재인 듯한 그런 강한 뉘앙스! '이제는' 끝이 난 듯한 그런 존재?


지나치게 오래되어 좋은 것은 없다, 나는 그리 생각한다. 오래 묵어 좋다는 보르도 특급 샤토의 1등급 와인, 부르고뉴 특급 도메인의 특급 밭에서 생산된 피노누아조차도 '너무' 오래되면 그때부터는 빠른 내리막이다. 불멸의 존재 같은 다이아몬드도 꼭 그렇지는 않다. 물론 분자구조 자체가 다른 물질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지만 그럼에도 결국 시간의 흐름에 따른 손상과 변형의 위험은 상존한다. 하물며 우리 인간이야?


'아'와 '어'는 분명 크게 다른 두 단어다. '나이 든 사람'은 그 먹은 나이만큼이나 유용하고 지혜로운 경험과 삶의 지식이 가득할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런데 그 똑같은 사람이 '노인'으로 불리우는 순간 그 사람의 경험과 지식은 이미 늙어 쓸모없고 가치 없는 것들로 넘어가 버린다. 그저 '노인과 바다'가 아니라 '나이 든 어부와 그가 정복한 바다'가 내게는 훨씬 더 멋진 번역이다. 헤밍웨이도 동의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왜 유난히 나이 든 사람들의 풍부한 경험과 지식을 좀 더 오래 활용하는 것에 그리 인색할까에 대해 생각해 본 때가 있다. 그때 내가 내린 그나마의 합리화는 이것이었다 - 그래야 젊은이들의 일자리가 생겨나니까! 그런데 그 후 꼭 그런 것은 아니라는 깨달음이 왔다. 그렇다면 다른 나라는? 그들에게는 원래 일자리 자체가 많고 넘쳐나서? 그게 아님을 우리는 안다.


얼마 전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을 연주하는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보았다. 오케스트라 정중앙 맨 뒷편에 더블베이스 연주자 네 명이 있었다. 놀랐다, 그들 네 명 모두 나이가 정말 많이 든 남성들이었다. 그 순간 저분들이 과연 활을 움직일 충분한 힘은 있을까 그런 걱정이 되었다. 물론 긍정적 놀라움에 내가 가진 어리석은 기우. 부러웠다, 그들 사회가 그리고 조직이 가지고 있는 상호 배려와 지혜의 정신이! 앞줄에는 머리 허연 나이 든 할머니 바이올린 연주자도 보였다. 대략 그 오케스트라 단원의 30% 정도는 '아주 나이 많이 든' 연주자들이었다. 글쎄, 나는 우리나라 오케스트라 단원 중 그렇게 나이 든 사람을 본 기억이 없다.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우리 사회는, 그리고 우리들의 조직은 이제는 경륜과 기술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경지에 '비로소 도달한' 그런 원숙한 예술가들의 연주를 들을 기회를, 우리 관객들에게서 원초적으로 빼앗아간 것이다. 나는 그리 생각한다. 아쉽고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 사회 전반에서 다 그렇다. 나이 든 사람들을 지나치게 일찍 무대에서 몰아내 버린다. 왜?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젊은이들을 위한 자리가 있고, 그들은 할 수 없는 나이 든 사람들의 자리가 있다. 내가 지금껏 보고 듣고 경험한 이 사회는 그렇다. 누가 누구를 그렇게 기계적으로 자동적으로 대체할 수 있는 그런 조직체는 아니다, 우리 사는 이 세상이라는 것이. 효율의 측면에서도, 완성도의 측면에서도, 사회 전체의 보다 나은 균형과 조화라는 측면에서도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옛날 영국에서 공부할 때 그때도 이미 충분히 나이 든 프레미어 리그 축구경기 해설자 할아버지가 있었다. 늘 흰 폴로 셔츠에 정장을 입고 나왔다. 나는 경기하는 선수들만큼이나 그 해설자의 해설 하는 모습을 즐겼다. 그 후 10년 가까이 지난 어느 날 영국 런던의 펍에서 우연히 그 할아버지가 '여전히' 건재하며 그 특유의 입담과 냉철한 분석을 프레미어 리그 경기에서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반가움, 그의 건재함에 대한 기쁨, 영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부러움, 많은 감정이 교차한 순간이었다. 그때도 그분의 트레이드 마크인 버튼 다운 흰색 폴로 셔츠와 블레이저 차림이었다. 머리카락의 색은 그때나 그 10년 전이나 똑같은 백발이었다.


이제는 내가 그분의 그 10년 전 모습이다. 아, 내 머리카락의 색은 여전히 검은 색이 많다, 숱 또한 여전히 풍성하다. 어릴 때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 다니는 이발소에 가면 주인 아저씨가 그랬다 - 얘는 머릿털이 돼지털같이 굵고 단단해서 아마도 나이 들어서도 오래 숱이 많을 것이라고. 지금의 이 풍성한 머리숱, 그때 그 아저씨의 덕담 덕이라 생각한다.


나이 든 사람을 대하는 이 사회의 제도와 관행은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내가 나에게 혹은 타인에게 풍부한 지식과 다양한 경험, 그 둘이 결합된 지혜 가득한 나이 든 사람으로 비치느냐 아니면 그저 몸과 마음, 어쩌면 이미 영혼까지 노쇠한 노인으로 보이느냐는 전적으로 내가 좌우한다. 내 소관이다. 나는 그리 믿으며 오늘도 살아간다.


나는 10년 째 같은 사이즈의 청바지를 입는다. 가끔 짙은 분홍빛 진 바지를 입기도 하지만 나의 공식 외출복은 특정 브랜드의 청바지다. 쪽빛 남색의 인디고 블루 (Indigo Blue). 벨트는 그 무렵 런던에서 만났을 때 아들 녀석이 사준 휴고 보스의 '보스 오렌지 (Boss Orange)' 넓은 폭의 정통 청바지 통가죽 벨트다. 젊어서도 별로 입지 않던 청바지, 나이 들어 입는다.


살짝 짧은 길이의 청자켓을 걸쳐 입은 나이 든 여성은 실례되지 않게 꼭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된다. 지극히 우아하고 고고하고, 진정한 멋스러움이 있다. 젊음에서 볼 수 없는 그런 기품이다. 서양에서는, 아니 내가 한동안 머무르던 작은 나라 조지아에서도 청바지를 즐겨 입는 나이 든 남성, 청자켓을 멋스럽게 입는 나이 든 여성들을 자주 많이 보았다. 멋졌다, 충분히! 나도 청바지를 일상의 외출복으로 입고 산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아직은 '노인'이 아니다. 그저 나이 든 사람일 뿐, 몸도 마음도 영혼까지 아직은 쌩쌩한.


나이가 들어간다, 그런데 뭐 이전과 별다른 차이를 느끼지는 못하겠다 아직은 (getting old) --> 점점 더 나이를 먹네? 하지만 아직은 괜찮아 (getting older) --> 어? 뭔가 조금씩 다르네, 몸도 마음도! 이제는 정말 늙었나봐. 노쇠함이 훅 느껴져 내게도! 이제는 나 자신 노인이라 인정해야겠구먼? (got aged) 나이 듦과 노쇠함의 이런 여러 단계.


이제 오늘의 시를 본다.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의 거장 이반 투르게네프의 작품이다. 나이 들어간다는 우리네 인생의 한 단면을 객관적인 시각으로 관조하고 있다. 따뜻함 가득한 시다.


맞다, 슬프고 쓸쓸하고 우울한 시간들이다. 몸도 마음도 결국은 서서히 시들어갈 것이고 그 속에서 당신 자신은 물론이고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힘든 시간이 될 것이다. 이제부터는 내리막의 시작이다.


그러나 그저 슬퍼하고 불만을 토로하고 그러지는 말지니. 그런다고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니까. 오히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고 지나간 기억 속의 아름다운 것들을 추억하고, 그렇게 깊게 내면으로 침잠할 것을 권한다. 나이가 든다고 그 푸르름이 그냥 없어져버리는 것은 아니니까. 그리하면 나이 든 삶도 그 자체 환하게 다시 빛날 것이라고. 그 속에는 우아함이 있고 향기가 있고, 여전히 튀어오르는 힘이 있으니까.


하지만 역시 그 다운 날카로운 지적도 잊지 않는다. 그렇다고 뭐 크게 바라거나 기대하지는 말라고!


이반 투르게네프, 그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부자 어머니에게서 재산을 물려받자마자 천 명 (혹은 오천 명이라고도 한다)이나 되는 농노 전부를 자유인으로 풀어주었다. 그냥 내보낸 것도 아니었다, 모두에게 조금씩 그래도 기본이 될만한 돈을 손에 쥐어서. 공식적으로 러시아의 농노해방이 이루어진 것은 그로부터 11년이나 지난 후였다.


참으로 따뜻한 마음을 가진 그가 하는 말이라 더욱 따뜻하게 느껴진다. 내게는 크게 위로가 되고 위안이 된다. 믿고 그의 권고를 따라볼 마음이 생겼다.


나이 든 남자 (The Old Man)

- 이반 투르게네프

결국 어둠의 날들, 그 쓸쓸함의 날들이 왔다.... 당신 자신의 쇠약함,

그리고 당신에게 소중한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 바로 나이 든다는 것의 몸 떨리는 한기와

우울함이다.

당신이 사랑했던 모든 것들, 그리고 지금껏 그들에게 주었던 돌이킬 수 없는 그 많은 것들,

이제는 그저 다 떨어지고 산산이 부서져버린다. 모든 것이 내리막이다.


그래서 당신은 뭘 할 수 있는가? 슬퍼하는 것? 불만을 말하는 것? 그것으로는 당신 자신에게도 또

다른 이들에게도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


이미 굽어지고 시들어가는 나무에서 그 잎들은 점점 작아지고 그 수도 적어진다, 하지만

그 녹색의 푸르름은 여전히 그대로다.


그러니 당신도 그저 속으로만 움츠리라, 보이지 않게 그대 자신 안으로만 물러서라, 당신의

그 기억들 속으로만, 그리고 그곳에서, 아주 깊게 침잠해서, 오직 안으로 향해있는 영혼의 바로

그 깊은 곳에서, 그러면 당신의 나이 든 삶은, 그곳으로 가는 열쇠는 오직 당신 혼자만 가지고

있는 것, 다시 밝게 빛날 것이니, 향기 가득, 신선한 그 푸르름 속에, 그리고 우아함과

튀어오르는 그 힘 가운데에서!


그러나 조심하라... 무언가를 기대하지는 말지니, 가여운 나이 든 자여!


<우리말 번역 - 가을에 내리는 눈, 영어 번역본을 바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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