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나가던 중년의 시절 내 머릿속에 어머니는 없었다

- 내리 사랑 치사랑? 아니, 그저 자식의 이기심! 김초혜 '어머니'

by 가을에 내리는 눈

'나무는 이제 좀 그냥 움직임 없이 가만히 있고 싶은데 바람이 계속 불어대며 그냥 두지를 않고, 이제는 부모님을 모시고 부양하고 싶은데 두분은 이미 계시지 않네' 사서 삼경의 하나인 '시경'의 해설서인 '한시외전'에 나오는 말이다. 우리에게는 '풍수지탄'이라는 말로 잘 알려져 있다.


얼마 전 브런치 다른 글에서 나는 '나는 돌아온 탕자가 부럽다'라는 제목의 글을 올린 적이 있다. 돌아갈 곳이 있는 그 둘째 아들 탕자가 나는 그저 부럽기만 했다. 시경에 나오는 말에서는 정말 이제는, 이제야 여러 여건들이 허락해서 드디어 부모님을 모시고 싶어하는 자식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런데 내 경우에는 꼭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내가 그동안 하지 못했던, 아니 그 어떤 이유로든 하지 않았던 '어머니 모시기'라는 것을 이제야 하려는 목적? 그것보다는 오히려 내 나이 들어 외롭고 달리 의지할 곳 없으니 이제야, 부모님이 그리워 그곳에 가서 '의존하고 의지'하려는 마음이 더 큰 것 아닌가 이런 부끄러운 인식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긴 세월 알뜰살뜰 나를 보살펴주신 어머니, 어쩌면 이제는 또 다시 나이 든 자식을 보살펴주는 상황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 꼴 보지 않으셨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나는 그러고도 '이제는 내가 어머니 곁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사네!' 하며 큰소리쳤을 것이다. 어머니가 나를 거두어 데리고 사는 것이었을 것을!


잘 나가던 나의 젊은 시절 그리고 중년의 시절, 일상 속에서 내 머릿속에 어머니는 과연 얼마만큼의 자리를 점하고 있었을까? 전혀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글쎄 '충분히 만족할 만큼' 그런 비중으로 내 생활 속에 있지는 않았다. 그것이 내 솔직한 고백이다. 그저 가끔 오는 전화 받고 가끔 작은 용돈 드리고 명절에나 뵙고, 그런 정도?


그렇다고 내가 유독 이상한 자식이라는 생각은 없다. 아마도 내 경우 평균 이하의 수준이라는 생각은 하면서도 다들 고만고만한 것 아닌가 이런 구차한 변명의 생각도 해본다. 이럴 때 내가 도피처로 삼는 것이 두 가지 있다, 무려 두 가지! 하나는 성경의 구절이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니 신이 주신 엄한 명령 아닌가? 내게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 가정을 꾸리고 그들을 먹이고, 그렇게 해야 하는 중대한 사명이 있는 것 아닌가? 어디에 더 중점을 두는 것이 타당한가? 당연 후자 아니겠나? 특히 두 영역 사이의 충돌이나 갈등이 있는 경우에는? 중간에 선 내 입장은? 나도 기실 할 말은 많은데? 이렇게 나 자신을 위로하고 합리화한다. 그러나 여전히 웃기는 변명임을 나는 안다. 그러면서도 가끔은 혼자 내 머릿속에서 이리 궁색하게 도피한다.


성경 어디에 '그러니 이제부터는 부모님 신경 쓰지 않아도 좋다'는 구절이 있나? 그저 책임지고 잘 돌봐야 할 '또 하나의' 새로운 영역이 생긴 것뿐인 것을?


나의 도피처 다른 하나는 바로 인류의 종족 보존 본능과 유전자의 역할이다. 이런 변명을 한다 - '내 몸 속의 유전자가 그리 시키는 것이다. 이제부터 너의 1차적 최우선 책무는 네 새로운 가족을 챙기는 것이다.' 뭐 이런 것? 그리고 이렇게도 합리화시킨다. 이런 유전자의 지시에 우리 인류가 충실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인류의 진화와 대규모 종족의 보존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그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다른 한쪽이 직접 간접의 피해를 본 것이라고, 상대적으로 그리고 가끔은 절대적인 기준에서도 마땅한 대접을 받지 못한 것이라고. 그러니 순전히, 전적으로 내 인간성의 문제 혹은 내 능력의 한계와 부족 때문만은 아니었다고. 이 역시 뻔한 변명이다, 나도 안다.


영국의 진화생물학자 리차드 도킨스의 책 '이기적 유전자 (The Selfish Gene)'는 나의 이런 생각에 든든한 기초가 되어주었다. 그가 35세 때 쓴 이 책을 그 무렵의 내 나이에 읽으면서 나는 인간 지적 능력의 격심한 차이를 실감했던 순간이 있다. 그리고 약간의 씁쓸함도 느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왜 이런 제목으로 글을 쓰고 있나?


아들이 하나 있다. 그 녀석은 내가 나의 어머니에게 한 것과 비교하면 최소 열 배는 내게 더 잘한다. 내가 인정한다. 그럼에도 가끔은, 아주 가끔은, 바람이 심하게 불고 하루 종일 비가 내리고, 코카서스 산맥의 살을 에는 초겨울 바람이 나를 힘들게 할 때면 이런 생각을 한다. "이 녀석은 가끔은 제 아버지 생각을 하나? 하기는 할까?" 뻔히 그 답을 알면서도 나 혼자 심통을 부리는 것이다. 당연 생각하지, '아버지가 잘 챙겨서 드시기는 하나? 엊그제 스카이프 (팀즈)에서 보니 활기 있고 얼굴도 좋기는 하더구먼, 그럼에도. 이제 당신 나이도 있고 그런데. 아무튼 늘 걱정이야! 내가 단 하나의 자식 (the only child)이니!'


점점 빠른 속도로 나이 들고 있다는 반증이다. 예전에는 결코 없었던 아쉬움의 감정이다. 그래도 가끔, 정말 아주 가끔 이런 뜬금없는 생각이 내 머릿속으로 들어온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그리고는 이내 다시 회복한다. 나의 마음과 정신, 그리고 영혼에 고마운 마음을 갖는다.


예전에 정부의 고위직 각료 중에 '꼿꼿 ##'라는 분이 있었다. 아주 큰 키에, 그 나이에 그런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쉽지는 않은데 거의 하늘을 찌를 듯 그리 늘 꼿꼿한 상체를 지켰다. 인상적이었다. 요즘 나는 산책을 하며 이런 주문을 왼다 - '몸도 꼿꼿 정신도 꼿꼿 마음도 꼿꼿 영혼도 꼿꼿'. 우선은 온전한 몸과 정신, 그 다음에는 일상 속의 감정과 내 무의식의 영혼의 세계까지도 그렇게 꼿꼿하게!

이제 오늘의 시를 본다. 왈칵 눈물이 날 정도로 가슴 시린 그런 시다. 꼭 한번 읽어 보시기를!


어머니가 나으신 나, 그렇게 다 주고 결국 받은 것은 수많은 아픔들뿐. 딩신에게는 늘 보고 싶고, 언제나 그렇게 아쉬움을 가득 남기는 나의 귀한 자식. 어머니는 이미, 미리 이럴 줄 알고 계셨을까? 아니, 모르셨을 것이다, 어쩌면 이 자식은 좀 다를 것이라 그리 믿으셨을 것이다.


갈비를 좋아하지 않는다던 어머니, 생선도 가시 있는 부분 혹은 껍데기를 더 좋아하신다고 하시던 어머니, 남은 밥 남은 반찬만 챙겨 드시던 우리들의 어머니, 바보가 아님에도 그 말들을 그렇구나 믿은 척 하던 자식들, 한번 그 역할 바꾸어보면 참으로 좋으련만, 어머니 당신께도 또 내게도! 그것이 공평하다, 페어 이너프 (fair enough)!


어머니

- 김초혜

한 몸이었다

서로 갈려

다른 몸 되었는데


주고 아프게

받고 모자라게

나뉘일 줄

어이 알았으리


쓴 것만 알아

쓴 줄 모르는 어머니

단 것만 익혀

단 줄 모르는 자식


처음대로

한 몸으로 돌아가

서로 바꾸어

태어나면 어떠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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