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기억하는 어느 요정의 사랑, 그게 '사랑'

- 나보다는 그가 먼저, 아끼는 마음. 드보르작 '달에게 보내는 노래'

by 가을에 내리는 눈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사랑은 원래가 변하는 거야, 그래서 사랑인 것이지? 몰랐니?/사랑? 그 또한 다른 형태의 거래야. 비즈니스인 셈이지.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서로의 주관적인 가치로 거래하는 것, 그 상품을 그냥 사랑이라고 이름 붙인 거야, 멋진 마케팅 전략이지! 아마 인류사에 이런 상품도 없을 걸?/FWB (Friends With Benefits - 단지 서로에게 지금 필요한 것들을 얻기 위해, 그렇게 지극히 교환적 거래의 형태로, 이성이 혹은 동성이 함께 하는 것), 바로 이런 걸 생각하면 보다 이해하기 쉬울 거야!/내가 죽고서 (죽어서, 그래서) 네가 산다면? 에이 그건 좀 곤란하지. 그 역이라면 혹 모를까?/나의 것은 당연 내 것, 너의 것 또한 내 것이 되면 좋고 (불감청 고소원, 그래도 나도 양심이라는 것은 있는 존재이니 감히 대놓고 바라지는 못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나야 좋지! 사실 내 마음 저 깊은 곳에서는 그리 간절하게 바라고 있을걸?)'


이것이 우리가 흔히 보는 사랑의 모습들이다. 한 사람을 살리고 또 죽이는, 한 인간의 마음과 영혼을 그리고 그 현세적 실체적 삶까지도 그렇게 통째로 쥐고 흔들어대는 그 대단한 사랑. 그 속에 기쁨이 있고 슬픔이 있고, 뼈까지 시리게 하는 눈물이 있고 고통이 있고, 쾌감이 있고 만족이 있고 뿌듯함도 때로는 있고. 결국은 허망함과 허탈함의 형태로 모든 것을 휩쓸어 가기도 하는 그런 요상한 물건.


동서고금 역사 이래 죽 그렇게 이어져 내려오는 우리네 삶의 영원한 화두. 그 어떤 유튜브 숏 영상도, 수 천 구독자의 브런치 글도, 아니 그 대단한 금권과 권력과 솟구치는 자신감의 일론 머스크조차도, 이 상품 앞에서는 잠시라도 멈칫 한다. 때로는 흔들린다, 깊이 빠져든다, 자신의 돈과 시간 그리고 피와 살의 에너지를 열정적으로 쏟아붓는다. 그리고 또 잠시 시간이 흐르면 다시 그것으로 끝!


지금 이 시각 이곳에서 내가 이해하고 있는 사랑의 한 모습이다. 반론의 소리들이 벌써 마구 몰려온다. 오불관언, 저는 상관없네요, 그저 한 개인의 지극히 주관적인 헛튼 생각일 뿐인 것을? 됐나요 이러면?


어느 다른 글에서 저는 말을 제법 잘 하고, 결국에는 일이 되도록 하는 방법을 알고 (getting things done) 꽤나 유능한 마케팅 전문가였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지요? 네, 저는 불필요하게 크게 부딪히지 않고 비생산적인 요란스러움은 최소화하면서, 지금 이 순간의 대화에 또는 만남에 상호 도움이 되는 그런 전략 혹은 기술을 좋아합니다. 그것이 삶의 여유이고 나이 듦이 주는 그나마 몇 안 되는 효익이고, 제가 이 세상에 할 수 있는 여전히 남은 아주 작은 역할이라 믿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든든하게 변명, 방어막을 치고 이제 다시 오늘의 글을 이어갑니다.


전설적인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의 그 시원스럽게 내지르는 발성을 나는 좋아한다. '카스타 디바' (Casta Diva, 정결한 여신)는 그녀 버전이 내게는 여전히 최고다. 테너계의 엔리코 카루소와 같은 창법이다. 그의 노래 중에는 '페케' (Pecche, 결함, 흠결, 잘못됨)를 특히 좋아한다.


그러나 노래에 따라서는 다른 창법의 가수의 것이 더 좋게도 느껴진다. 이를테면 르네 플레밍 (Renee Lynn Fleming)이 부르는 '달에게 보내는 노래' (Song to the Moon) 같은 것이 그 대표적인 예다. 마리아 칼라스와는 정반대로 그녀는 소리를 극도로 절제하며 안으로 안으로 감아들인다. 그러면서 조금씩 아주 조금씩 쥐어짜듯 그렇게 밖으로 내보낸다. 자칫 잘못하면 갑갑하고 답답하게만 들린다. 그녀의 노래는 결코 그렇지 않다. 그것이 기술이다, 타고난 실력이다. 테너로는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창법이 이와 비슷한 구석이 있다.


어떤 노래는 데임 조앤 서덜랜드의 것이 좋고 또 어떤 노래는 마릴린 혼 버전이 좋다. 비벌리 쉴즈의 것이 좋은 노래도 있고 루치아 포프가 단연 두각을 나타내는 노래도 있다. 내게는 영국의 소프라노 린 도슨의 노래가 간절한 때도 많다. 영혼을 울리는 두성의 그 맑고 고운 소리.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의 몇몇 아리아, 그녀 버전은 가히 압권이다.


드보르작의 오페라 중에 '루살카' (Rusalka)가 있다. 이 오페라에 나오는 아리아 '달에게 보내는 노래'가 특히 유명하다. 나는 이 노래를 많이 좋아한다, 당연 르네 플레밍 버전으로. 같은 노래를 사라 브라이트만이 부르는 '라 루나' (달님 또는 그 달, La Luna)도 아주 좋다. 그 스토리 라인 또한 참으로 아름답다. 나는 이 오페라 속의 여주인공 물의 요정 루살카에게서 '진정한 사랑'의 모습을 보았다.


인간을 사랑하게 된 그녀, 그래서 인간이 되려는 그녀, 그 댓가로 말하는 능력을 잃는다. 영원히 말을 못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흔쾌히 수락한다. 물 도깨비인 아버지 보드니크가 딸을 극구 만류한다 - "인간은 그저 죄악으로 가득 차 있다"고 경고하면서. 그러자 딸 루살카는 이리 대꾸한다 - "그들은 사랑에 가득 차 있다"고. 그녀 자신 요정임에도 뭔가 단단히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렇다, 인간 사회가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던 때는 단 한 번도 없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결국은 딸의 청을 들어주기 위해 아버지는 마녀 예지바바를 찾아간다. 그렇게 루살카는 인간이 된다, 벙어리 인간. 사냥 나온 왕자가 그녀를 보게 되고 그녀를 왕궁으로 데려간다. 하지만 곧 다가올 결혼식 전야제에서 이미 벌써, 인간 왕자의 '그 사랑'은 식기 시작한다. 하객으로 온 이웃나라 공주에게 마음이 끌린다. 추파를 던진다. 드러내놓고 루살카를 냉대, 홀대한다. 급기야 그녀를 거부하는 행동도 보인다.


눈물을 흘리며 성 밖으로 뛰쳐나온 루살카는 아버지와 슬픔 속에 대화한다, 인간이 아닌 존재와는 여전히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루살카는 후회한다, 아버지의 경고를 무시한 것을, 자매들의 우려를 귀담아 듣지 않은 것을, 마녀의 현실적인 경고와 지적을 가볍게 흘려버린 것을.


곧 죽게 될 루살카에게 마녀가 다시 한 번 기회를 준다. 이 단검으로 왕자를 찔러 죽이면 다시 예전의 그녀로 돌아갈 수 있다고. 그녀는 단호히 거부한다, 그 단검을 호수에 던져버린다 - "그는 행복해야 돼, 비록 나는 그렇지 못하지만!"


이제 루살카는 죽음의 혼이 되어 호수 저 밑바닥에서 산다. 오직 밤에, 호수를 찾은 인간들을 죽음으로 이끌 때에만 호수 위로 올라올 수 있다. 그런 나락의 삶을 그녀는 지금 살고 있다. 왜? 그저 한 사람을 사랑했다는 그 죄만으로!


왕자가 사냥 중에 다시 그 호수에 오게 된다. 뒤늦게 그녀와의 추억을 떠올린다. "내게로 다시 와 다오!" 왕자는 그렇게 외친다. 기적처럼 루살카가 호수 위로 올라온다. 왕자에게 이리 말한다 - "당신의 그 입술은 왜 거짓말을 한 건가요, 왜 저를 배신했나요?"


왕자는 용서를 구하면서 자신에게 키스해 달라고 한다. 루살카는 그럴 수 없다고, 자신과의 키스는 바로 죽음을 의미한다고, 절대 그렇게는 할 수 없다고 거부한다. 왕자는 단호했다 (이럴 때에만? 그러니까 신화이고 드라마이지!). 결국 그 두 사람의 입술은 뜨겁게 부딪히고 잠시 후 왕자는 루살카의 팔에 안겨 그대로 죽는다. 그때 호수 밑 저 깊은 곳에서 물 도깨비의 이런 외침이 들려온다 - "이제 모든 희생이 다 치러졌다"


그 순간에도 '우리의 루살카'는 큰 슬픔 속에, 그럼에도 한때 자신이 인간이 되어 왕자를 사랑하게 된 것에 크게 감사한다. 그리고 왕자의 영혼을 신에게 위탁한다. 이내 다시 호수 아래 저 깊은 곳, 죽음의 혼으로서의 자신의 영역으로 쓸쓸이 내려간다.


하지만 이전과는 다른 쓸쓸함이었으리라 나는 그리 확신한다. '너무 늦은 것은 없다'는 것이 평소 나의 생각이고 믿음이다. 늦었어도 하는 것과 끝까지 하지 않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흥, 너무 늦었어요!'라고 힐난하는 루살카의 원망 가득한 소리가 들리는가? 나는 지금껏 그 오랜 세월 단 한 번도 듣지 못했다. 그녀는 그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니다. 더구나 왕자와의 '치명적' 입맞춤의 후에는, 그렇게 왕자와 함께 있는 지금 이 순간에는!


나는 요정 루살카의 그 한결같은 사랑의 마음을 보았다. 처음부터 그녀의 왕자에 대한 사랑은 즉흥적인 충동의 감정이 아니었다. 일시적인 육체적 쾌락을 위한 것은 더욱 아니었다. 물론 늘 차갑고 황량한 호수에 사는 자신의 삶에 대한 반동적 측면도 있었다 - '한 사람의 인간으로 따뜻한 태양 아래 살기를 원한다'는 갈망이 평소 그녀에게는 있었다.


그 사랑의 댓가로 많은 것을 내어놓았다, 아무런 망설임 없이, 그야말로 선뜻. 동반되는 확률 높은 위험도 그대로 받아들였다 - 자신의 죽음, 비루한 신분으로의 전락... 그럼에도 자신이 사랑하는 그 왕자의 배신을 크게 비난하거나 원망하거나, 그런 그를 증오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선택과 자신에게 돌아온 운명을 묵묵히 받아들인다.


마지막 부활의 기회도 던져버린다, 오직 자기가 사랑하는, 하지만 자신을 배신한 그 사람을 위해. 끝까지 그의 안위와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고 그렇게 한다. 그러나 결국에는 그녀 자신도 어쩔 수 없었던, 용서를 비는 왕자와의 그 마지막 입맞춤 - 왕자의 끈질긴 요구/그의 단호한 자세/동시에 한때 인간이었던 루살카 자신의 흔들림, 잠깐의 인간으로서의 과거 그때의 그 순수한 열망과 감정 속에.


그렇게라도 함께 있게 된 그 두 사람이 나는 그나마 다행이라 그리 생각한다. 이런 사랑이라면 어느 곳에 어떤 모습으로 함께 하더라도 좋을 것이라 나는 그리 '여전히 나이브한' 생각을 한다.


이것이 사랑이다! 나처럼 이 현세의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많은 회의와 허망함을 가진 사람이라면, 가끔 르네 플레밍이 부르는 그 간절한 노래를 들으며, 드보르작의 이 오페라 속 스토리 라인을 기억하며, 그래도 혹시 이 세상 어딘가에 여전히 있을지도 모르는 그 참된 사랑의 존재를 찾아갈 용기와 희망을 갖기를 바란다. 오늘 이 글의 목적은 오직 이것이다, 긍정과 희망과 가능성의 작은 조각 던지기!


오늘의 시를 본다.


달에게 보내는 노래 (Song to the Moon)

- 드보르작

부드러운 벨벳 같은, 저 어두운 밤하늘에 계시는 나의 은빛 달님이여,

당신의 빛은 언제나 먼 곳까지 다 환히 비추지요,

이 세상 모든 곳을,

인간 사는 곳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가만히 들여다보며,

그렇게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오 그렇다면 이번에는 그저 한 번만 잠깐, 제게 머물러주세요,

그리고 제게 말해주세요

오, 제가 사랑하는 그이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인지... 어디에?

그리고 그에게 말해주세요, 오, 부디 그이에게 말해주세요,

오 은백색의 달님이여,

나의 두 팔은 늘 그를 향해 뻗어있다고,


그분에게 말해주세요 꿈속에서 나를 생각해 달라고,

그저 아주 잠깐만이라도,

꼭 그리 말해주세요 꼭 그렇게 해달라고,


환상 속에서라도 환히 비춰주세요, 그이를 환하게 비추어주세요,

그 사람에게 전해주세요 오 말해주세요,

내가 여기 있다고, 늘 그를 기다리며 여기 있노라고,


그래서 그렇게 한 인간의 영혼이 나에 대한 꿈을 꿀 수 있게 된다면,

그렇다면 그는 잠에서 깨어서도 여전히 나를 기억할 수 있을 거예요 분명,


달님이여, 오, 오, 부디 그를 환하게 비추어주세요, 그를 위해 당신의 그 빛을 비추소서,

비추어주세요, 비춰주세요 오 나의 달님

그이를 비추어 주세요, 그 모습 감추지 마시고!


<우리말 번역 - 가을에 내리는 눈, 영어 번역본을 바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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