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이 만들어내는 의외의 새로운 기회를 경험하셨나요?

- 두려움, 가능성, 용기. 가을에 내리는 눈 '고고한 끝을 향하여'

by 가을에 내리는 눈

한동안 매일 아침을 먹던 쌀국수집이 갑자기 어느 날 문을 열지 않았다. 그다음 날도 그렇고 또 그다음 날도, 나는 허탕을 쳤다. 할 수 없이 다른 수단을 찾았다. 결과적으로 새로 찾아낸 새로운 방식이 내게는 훨씬 좋았다.


한 번에 네 개씩 1.5리터짜리 생수를 구입하던 구멍가게 주인에게 어느 날 내가 원하는 바를 말했다. 여기서 가까운 곳이니 내 숙소까지 12개가 들어있는 박스를 배달해 줄 수 있겠느냐고. 안 된단다. 의아했다. 모터바이크도 있겠다, 먼 거리도 아니겠다, 그래도 단골 고객이겠다 그럴 못하나? 못하는 건가 하기 싫은 건가? 당장 다른 방법을 찾는다.


마침 호텔에서 주문하는 생수가 내가 먹는 것과 같은 브랜드였다. 매니저에게 말한다. 내 것도 주문할 수 있겠느냐고? 문제 없단다, 가격도 무려 30%나 저렴하다. 그 구멍가게 주인의 불쾌한 거절을 고마워할 것까지는 아니지만 아무튼 나는 그 거절로 인해 두 가지를 한꺼번에 얻었다, 편리함과 저렴함.


새로운 나라에 도착하는 항공기 스케쥴을 이전과는 다르게 조금 늦은 시각으로 했다. 긴 줄의 이미그레이션까지 겹쳐서 결국 아주 늦은 시각 현지 공항 밖으로 나왔다. 예전에 익숙했던 대중교통편은 이미 끊겼다. 돈도 무려 열 배나 더 든다. 그런데 무거운 짐 들고갈 생각에 고민이 되던 차에 기사가 들어주고 목적지 코 앞에 내려주고, 열 배를 더 주고도 내게는 그 대안이 더 나은 것이었다. 그 열 배가 어마무시 그런 금액도 아니었다, 이전의 교통수단이 워낙 싼 가격이었기에.


이곳 대형 마트에서 사는 감자는 잘다, 큰 것이 없다. 아쉬우니 그것으로라도 만족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나마도 없다. 감자는 나의 주식 중 하나라 서둘러 대안을 찾는다. 현지 시장으로 간다. 주먹만하게 큼지막한 감자들이 보인다. 가격은 조금 더 비싸다. 그래도 그것이 더 맛있고 좋았다.


끝은 결국 다른 시작을 불러온다. 끝이 정말 끝인지 아니면 시작의 다른 쪽 모습인지, 알 수 없을 때가 참 많다. 나쁜 일은 그 끝이 있음을 아는 것만으로도 견딜 힘을 준다. 내게 희망을 주고 용기를 준다. 그 나쁜 일의 끝은 그래서 참으로 기다리던 끝이다. 그리고 대개는 더 나은 기회가 시작된다.


좋은 일의 끝은 왕왕 아쉬움과 미련과 안타까움을 가져온다. 그런데 또 가만 생각해 보면, 그 다음에 올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다양하다. 더 좋은 일이 올 공간도 마련되는 것이고, 비슷한 수준의 기쁜 일이 또 올 수도 있다. 물론 나쁜 일이 올 수도 있다. 그런데 그 나쁜 일의 도래는, 꼭 이번 일이 끝났기 때문에 오는 것은 아니다.


결국 올 것은 온다. 살짝 다른 각도에서 보면 이전의 좋은 일로 몸도 마음도 충분히 살찐 지금, 힘든 일이 오는 것이 차라리 내게는 낫다. 견디고 이겨낼 힘이 이미 축적된 상태니까. 나쁜 일 뒤의 나쁜 일, 아마 쉽게 일어서지 못할 것이다. 매사 이렇게 '보는 시각을 달리하는 전략과 전술'이 필요하다. 그래야 이 험한 세상을 살아낸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나쁜 일은 지나가니 좋고 좋은 일은 그래도 내게 와주었으니 좋고. 끝을 두려워하는 습관을 바꿀 필요가 있다. 새로운 카드가 내 손에 들어온다는 긍정적인 시각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게 자꾸 새로운 카드, 새로운 가능성을 반겨 맞이하는 자세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그것을 변화에 대한 적응이라 부르든 진취적 기상이라 부르든, 아니면 공격적으로 내 앞의 돌 들춰보기라 부르든, 아무튼 내게 주어질 수 있는 가능성과 기회에 대한 두려움 혹은 부끄러움을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


그래야 그들도 자기를 반겨주는 내게 자꾸만 온다. 나에게 오는 것 자체를 그들도 즐거워한다. 그러면 더 자주 온다. 그 소문을 듣고 더 좋은 놈들이 내게로 몰려온다. '이 세상의 많은 아름다운 것들이 앞다투어 당신에게 달려 가기를', 언젠가 나의 고마운 젊은 친구가 내게 빌어준 연말 덕담이다. 내가 좋아하는 구절이다.


'두려움이 우리의 시야를 흐리게 한다, 많은 가능성을 가로 막는다 (Fear fogs our vision)', 나의 카톡 커버 메시지다. 어디서 처음 본 것인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주 오래 전에 내게로 온 나의 중요한 삶의 경구다. 이 짧은 글의 도움을 그동안 참으로 많이 받았다.


두려움으로 주저하고 망설이고 그렇게 미적거릴 때, 나는 이 문구를 소환한다. 많은 경우 안개는 이내 걷히고 나는 용기 내어 일어나 '다시' 나의 길을 갈 수 있었다. 두려움의 원인들을 하나하나 깨부수며 나는 그렇게 전진한다. 이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물론 내일도 나는 그렇게 할 것이다.


새로운 환경과 상황에 노출되는 것, 그리고 새로운 사람과 대면하는 것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오랜 익숙함에 대한 의존과 집착에서도 벗어나려 힘쓴다. 잠깐의 불편함과 낯섦이 가져올 달콤함을 기대하면서. 실제로 그랬던 이전의 그 좋은 기억들을 마음에 품고서. 사냥을 나가야 내가 먹고 가족이 먹고 겨울을 위해 비축할 고기가 생긴다는 그 엄연한 현실을 잊지 않으면서.


오늘은 늘 다니던 길 말고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그 길을 택한다. 물론 사전 준비는 단단히 한다. 예전의 그 근거없는 두려움은 많이 줄었다. 이제는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확률적 경험적 기대와 그 달콤함이 나를 지키는 든든한 방패가 된다. 그렇게 나는 새로운 길을 간다.


두려움이라는 것을 아예 모르던 지크프리트 (리하르트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의 그것이 아니라, 내게 두려움이 나쁜 일을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그런 흔들림 없는 자기 확신과 믿음 속에 일상을 살아갔던 스물한 살 알료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세 형제 중 막내)의 그것을 나는 배웠다. 그리고 지금도 나의 것으로 수시로 익히고 연습한다. 이미 오래 전부터 그는 나의 삶의 스승이었다, '불치하문' (아랫 사람, 어린 사람에게 묻고 배우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주저하지 않는다).


일신우일신 (어제보다는 조금이라도 나아진 모습의 나), 일진월보 (그렇게 느린 듯, 하지만 결국은 분연히 일어나 나의 길을 가는 진전 혹은 발전), 그렇게 내게 올 권토중래 (흙을 돌돌 감아말듯 그렇게 거대한 흙먼지를 일으키며 보란 듯이 당당하게 다시 오는 그날)를 기대하고 소망하며! 그곳이 어디이든 그때가 언제이든 그것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다. 내가 그렇게 애쓰고 실행했다는 그 사실, 그리고 결국에는 내게 올 것이라는 그 믿음과 확신, 그것이면 되었다!


오늘의 시다. 내가 두 번째로 써 본 '시'다, 아니 꿈속 내 마음의 단상의 짧은 기록이다. 얼마 전 새벽, 역시 이번에도 비몽사몽간에 얼른 머릿속으로부터 옮겨 적은 글이다.


고고한 끝을 향하여

-가을에 내리는 눈

진정한 아름다움은 시작과 함께 그 끝을 향한다,

종말이 있음을 알기에 비로소 귀한 존재가 된다.


영원은 순간의 연속


그 끝남을 기다리지는 않는다,

내가 우아한 끝맺음을 위해 발을 옮긴다.


아름다움은 시작되었고 그 끝도 시작되었다,

그 아름다움을 영원히 손에 쥐는

내가 주도하는 여정 또한 이미 시작되었다.


그들은 다들 그렇게 함께 가고 있다,

그 또한 영원이고 아름다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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