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에 물고 있는 소갈비, 조금 더 커보이는 눈앞의 저것

- 욕심, 타협, 에지와 훈련. 니키 지오바니 '선택력'

by 가을에 내리는 눈

'뷔리당의 당나귀' (Buridan's donkey)를 아세요? 여기 목마르고 배고픈 당나귀가 있습니다. 당나귀 앞에는 신선한 건초와 물이 있습니다. 그 둘은 이 당나귀에게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정확히 동일한 만족을 줍니다. 이 당나귀는 무엇을 먼저 먹어야 하나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결국은 건초도 물도 먹지 못하고 그냥 죽습니다.


과학적 이성적 사고와 그에 기한 의사결정을 최고의 덕목으로 치던 뉴턴적 사고가 지배하던 시대의 의사결정상의 딜레마 혹은 자유의지 부재의 인간을 빗대어 말하는 내용이라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현실적으로 우리 인간에게는 '자유의지'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적어도 이런 슬프고도 어이없는 상황에 직면하는 경우는 많이 없을 겁니다. 사람마다 그 생각이 다르고, 무엇보다 인간에게는 충동과 사유라는 묘하게 역설적인 두 가지 엔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각자 다른 판단과 결정으로 결국은 무언가 하나는 먼저 집어서 먹을 겁니다.


당나귀에게 인간과 같은 자유의지라는 것이 있는지 없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머리 좋다고 알려진 당나귀이니 분명 어떤 선택을 할 겁니다. 나름의 자유의지 또한 있을 겁니다. 그러니 지금껏 그 오랜 세월 생존해 온 것이겠지요. 그런데 자유의지가 없는 당나귀를 가정한다면 그는 건초와 물 둘 사이의 50:50의 상황에서 갈등하다가 그렇게 끝을 맞겠지요.


사실 이 얘기는아리스토텔레스가 처음 한 말이라네요. 그 후 프랑스의 철학자 뷔리당이 자기 책에서 비슷한 얘기를 한 적이 있고, 그것을 다시 후대에 스피노자가 뷔리당의 당나귀 역설이라고 소개하면서 그렇게 굳어진 것이랍니다. 뭐 누가 말한 것이면 어떻겠어요?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중요한 것이겠지요.


이 역설은 그나마 이성적 사고, 과학적 수리적 접근법의 맹점과 한계에 기한 것이니 그렇다고 쳐요. 그런데 우리네 일상에서 겪는 이와 비슷한 상황은 전혀 그 원인을 달리하지요. 바로 욕심, 탄력적 사고의 부족, 순발력의 부재, 타협의 긍정적 순기능 망각, 타고난 혹은 길러진 '에지' (edge, 판단력 그리고 결정력, 실행력까지)의 부존재, 평소 판단하고 결정하고 실행하는 연습의 턱없는 부족 이런 것들에 기인하지요. 저는 그리 봅니다.


꿩 먹고 알 먹고 계속 그렇게 할 수는 없지요? 매일 알을 먹으려면 그 알을 낳는 꿩은 먹이를 잘 주면서 살려둬야 하겠지요. 정말 꿩의 고기가 먹고 싶어서 그만 그 꿩을 잡아먹었다면 이제 그 꿩이 낳는 알을 먹지 못하는 것이지요. 아니면 이제부터는 돈을 주고 매일 꿩의 알을 시장에서 사 와야 하겠지요. 처음부터 그 꿩은 그대로 두고 시장에서 꿩고기를 사오거나. 사실 선택지는 많아요. 우리가 깊게, 충분히 탄력적으로 생각하지 않아서 그렇지. 혹은 금전적 여력의 문제이거나.


우리의 특정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에 대한 분명하고 정확한 인식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원인 없는 결과란 없으니까요. 실수나 착오, 과실 혹은 중대한 과실로 그 정확한 인과관계에 대한 오판이나 잘못된 이해 또는 인식이 있었다면 그것은 큰 비용을 초래하지요.


욕심이 낳는 우리들 선택력의 제한과 한계를 지금 말하고 있습니다. 고깃덩이를 이미 입에 물고 있는 개가 개울 위 다리를 건넙니다. 저 아래 물에 비친 자신을 봅니다. 그게 바로 자기인 줄은 모르지요? 자기만큼 잘 생긴 다른 개 한 마리가 자기 것보다 더 커 보이는 (아마 그렇게 보일 겁니다, 물에 비친 것이니까, 그리고 굳이 그렇게 보고 싶었겠지요) 고기를 물고 계속 자기를 쳐다보네요.


그 개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물에 비친 저 큰 고깃덩이가 생각나서요. 저것도 입에 물고 가면 좋겠는데 이미 입에는 큰 고기가 있으니 그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것을 저것으로 맞바꿀 의사도 없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개.


개만 그런 것이 아니지요? 저는 자주 그래요. 과거는 이미 좋았으니 좋고, 그러니 그건 그냥 고스란히 그것으로 두고. 지금의 나의 일상도 그만큼, 아니 그보다 아주 조금은 더 좋으면 좋겠고. 미래 또한 최소 그 수준은 되면 참으로 좋겠고. 욕심도 이런 도둑놈 욕심이 없지요. 이 지구상 모든 재화는 유한한데 어찌 유독 내게만 그런 예외적 특혜가 주어지기를 기대하고 바라고 있나요? 알아요 무리이고 욕심임을! 그럼에도 은근슬쩍 내내 그리 원하지요.


우리가 학교 다닐 때 배웠던 '질량 보존의 법칙', 화학 반응이나 물리적 변화가 일어나도 총 질량은 일정하게 보존된다는 법칙이지요. 물질은 형태만 바뀔 뿐 갑자기 짠 하고 생겨나거나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지요.


저는 늘 아들 녀석에게 말합니다. 우리 삶 속에서 어느 개인이 이루어낸 것은 그 총량으로 따져보아야 한다고. 그리고 결국 그 총량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그것이 서로 비슷할 것이라고. 그저 조삼모사냐 조사모삼이냐 그런 차이가 있을 뿐. 그래야 좀 공평하고 공정하고, 한번 살아볼 만한 삶이 되지 않겠어요? 어쩌면 그 총량의 계산을 세대를 넘어서까지 합산해야 될 수도 있어요.


지금껏 그 긴 세월 참으로 많이 즐기고 많이 누렸으니, 보름달 지나 그 달의 기욺이 있듯 이제 똑같은 현상을 예상함이 옳겠지요? 손자병법에 '오행무상승, 사시무상위, 일유단장, 월유사생' 그랬잖아요? 화수목금토 그 각자는 각자가 이기는 상대가 있고 그와 똑같이 어느 상대에게는 각각 반드시 지는 것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은 늘 언제나, 일년 내내 자기 혼자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때가 오면 반드시, 그 어떤 예외도 없이 다른 절기에게 자리를 내어 주어야 하고). 해도 짧을 때와 길 때가 있고, 달도 죽을 때와 생겨날 때가 있다.


그러니 당연 우리네 미물 인간에게도, 우리가 가진 욕심과 욕망에도 예외를 기대하면 안 되겠지요. 저 신비하고 거대한 존재 대자연도 늘 그렇거늘?


언제부터인가 저는 신 혹은 섭리, 아니면 대자연에게 이렇게 간구합니다 - '나를 둘러싼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이 내게 없다면, 그렇다면 그 상황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이라도 바꿀 수 있게 도와주소서!'


그건 해주신 것 같아요. 이전과 똑같은 상황과 사건, 사람들을 이전과는 다른 시각으로 보고 있는 저를 자주 발견하니까요. 물론 많은 경우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합니다. 그로 인해 절대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는 없습니다, 오해는 마세요. 가급적 긍정적으로,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의미로, 내게 힘과 용기를 주는 그런 건설적인 방향으로 해석하려 한다는 뜻이니까요. 제 주변 사람들에게도 오히려 좋을 겁니다. 긍정을 보는 눈은 그냥 좋거든요? 혹여 자신이 조금 부정의 상황에 처해있는 경우라면 특히나! 좋은 것이 좋다는 생각을 저는 늘 합니다.


오늘의 시를 봅니다. 흥미롭고 그러나 깊은 묵상과 통찰력을 요구하는, 조금은 신기하기까지 한 그런 시입니다. 뜻밖에 제가 만난 참으로 귀한 인연이지요. 고마움을 느낍니다, 이런 우연 속의 필연에 대해 저는 늘.


학교 다닐 때 국어 시간에 읽은 어떤 글귀가 생각나요 - '천재의 작품에서 잃어버린 자아를 발견함'. 어느 날 우연히 어느 유명한 사람의 글에서 혹은 그의 말에서, 평소 제 생각과 비슷한 문구나 말을 발견한다면? 아니 저 사람이 나와 비슷한 생각과 말을 하고 있네?


이 시인이 뭐 그리 유명한 사람은 아니지만 (특히 제게는) 아무튼 타인의 글에서 저와 비슷한 생각과 가치관을 본다는 것은 기분 나쁜 일은 결코 아니지요.


오늘의 시는 특히나 좋습니다. 오늘 제 글의 방향과도 정말 잘 어울리네요. 천천히 음미하시기를, 상미하시기를!


선택할 줄 아는 자유 (CHOICES)

- 니키 지오바니

만일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할 수 없다면

그때 내가 할 일은 내가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그 둘이 같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리고 또 내가 해야 할 일은

이미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원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적어도 앞으로 또 내가 원할 그 무언가가 아직 더 있다는 그 사실에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언제나 내가 가고자 하는 곳으로 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그렇다면 나는

가야만 한다...표지판들이 가리키는 곳으로

같은 방향으로 평행하게 움직인다는 것이 꼭 그저 옆걸음만 치는 것은 아님을

항상 명확하게 이해하면서

내가 진정으로 느끼는 것을 정작 내가 표현할 수 없다면

나는 내가 표현할 수 있는 것을 느끼는 연습을 한다

물론 그 둘이 똑같은 것은 아니다

나도 안다

하지만 그것이 왜 그 많은 동물들 중에 오직 인간만이 기쁨과 슬픔에 울 줄 아는가에 대한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말 번역 - 가을에 내리는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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