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발장의 '발장'은 무슨 뜻일까? 그의 성인가?

- 선한 마음, 환경과 운명을 이긴 그. 토마스 아퀴나스 '천사들의 빵'

by 가을에 내리는 눈

필요한 경우에만 내가 머물고 있는 호텔 방의 청소를 부탁한다. 청소 후 방향제를 뿌리지 말라는 얘기를 하기 위해 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노크 소리에 문을 연다. 두 사람이다, 딱 봐도 아버지와 중학교 3학년쯤 되어 보이는 아들이다. 아버지에게서는 지독한 담배냄새가 난다, 안색을 봐도 나는 골초요 하고 쓰여있다. 그때 나를 보던 아들의 표정을 기억한다. 나는 슬펐다. 이것이 우리네 인생임을 새삼 실감하면서.


30분 정도 지난 후 방으로 돌아왔다. 돈을 좀 챙겨서 이내 리셥션으로 간다. 마침 매니저가 있다. 그들에게 주라고 10만 동짜리 지폐 한 장을 건넨다. 5천 원 정도의 돈이다. 그런데 이 나라에서는 꽤나 괜찮은 금액이다. 두 사람이 맛있는 쌀국수를 먹고 차까지 마실 수 있는 금액이니까. 매니저가 직접 주지 그러냐고 한다. 아니, 당신이 주라고 나는 굳이 말한다. 그리고 오늘 처음 보는 팀인데 아버지와 아들이 맞느냐고 하니 그렇단다. 청소 다 끝내고 점심 사 먹으라고 주라고 부탁을 한다. 당신이 매니저이니, 힘이 있는 사람이니 그들을 격려해 주라고도 말한다. 그러겠단다, 고맙다는 말도 잊지 않는다.


아니, 아직 그런 상식 수준의 지식도 없냐고, 명색이 그래도 브런치에 글을 쓰는 사람 아니냐고 그리 뭐라 하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이다. 공자님이 그러셨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그것이 진정 아는 것'이라고 ('지지위지지, 부지위부지, 시지야').


나는 불과 얼마 전까지도 장 발장의 뜻을 제대로 몰랐다. '레 미제라블' 자체를 그리 깊게, 정성을 다해 읽은 적이 사실 없다. 어느 해 여름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다섯 번 내리 읽을 때의 그런 열정을 이 위대한 작품에는 쏟지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다. 전 다섯 권짜리, 도합 2천 페이지가 넘는 이 책을 한번 열과 성을 다해 읽고 싶은 바람이 있다. 나의 이 두 눈이 허락한다면, 그리고 굳건하게 버텨준다면!


요즘 빅토르 위고의 시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그래서 이런 관심도 생긴 것이리라. 시와 소설, 4천 점이 넘는다는 그의 그림의 세계까지, 이 대단한 인물에 대한 경외의 마음이 가득한 요즘이다.


발장은 '부알라 장' 그러니까 '여기 장 (영어로는 그 흔한 이름 존, John)이라는 사람이 있어요' 뭐 이런 뜻이라고 나는 새긴다. 이것이 제일 마음이 들었다. '장, 여기 장이라는 평범한 인간이 있네요', 이 사람의 일생을 한번 보세요, 그 기가 막힐 만큼 기구한 한 인간의 삶의 여정을! 특별히 그라서 그런 삶을 산 것은 아님을 기억하세요. 우리 모두 그와 같은 운명과 현실을 만날 수 있어요. 저는 그저 그라는 인물을 택한 것 뿐이니까요. 빅토르 위고가 이리 말하는 것 같다. 실제로 그는 '발장은 부알라 장의 축약형이라고' 말한 바가 있다. 그러니 제일 근거있는 설명 아니겠나?


장 (Jean) 혹은 존 (John)은 '신은 자비롭다, God is gracious' 혹은 '신은 늘 우리에게 은혜를 보이셨다, God has shown favor' 이런 의미의 말이다. 서양에서 아니 세계적으로 참으로 많이 쓰이는 이름이다. 러시아의 이반 (Ivan), 이태리의 지오반니 (Giovanni), 그리고 스페인에서의 후앙 (Juan)에 해당한다.


빅토르 위고가 그 많은 이름들 중에 이 이름을 선택한 것에 나는 주목한다. 실제로 이 대작이 말하고 있는 메시지의 많은 부분을 장 (존)이라는 이름 하나가 스스로 설명하고 있다. 참으로 흔하고 흔한 이름, 누구나 살면서 이런 경우를 만날 수 있다는 중의적 메시지, 어느 날 찾아온 깨달음과 그를 통한 한 인간의 변화, 속죄와 다시 찾은 양심, 선과 의로움을 향한 끊임 없는 갈등과 투쟁, 그에 대한 열망과 희망, 이제는 깨끗하게 지워진 빈 칠판 ('blank slate'), 그러니 무엇이든 그곳에 새롭게 쓸 수 있다는 응원과 격려, 이런 많은 의미와 메시지를 나는 이 이름 한 자에서 읽었다. 이것만으로도 오늘 내가 이런 제목으로 이 글을 쓰는 의미는 충분하다.


장 발장을 읽으면서 우리가 쉽게, 흔히 그냥 넘기는 부분이 있다. '빵 하나 훔친 죄로 19년을 선고받은', 이 부분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하지만 그가 처음 선고받은 형은 징역 5년이다. 사실 이것도 좀 과하고 세다는 생각을 나는 한다. 물론 이유가 있다. 첫째, 그의 행위는 단순 절도죄가 아니라 '특수 절도'에 해당한다, 야간에 건물의 일부에 속하는 부분을 깨고 물건을 훔쳤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형법에서는 징역 1년 이상 10년 이하의 죄에 해당한다. 둘째, 공교롭게도 그가 체포되던 상황에 그는 밀엽 (그는 명사수였고 그래서 밀엽을 자주 했다)을 위한 총을 소지하고 있었다. 또 다른 가중 사유였다.


개인의 사유재산의 보호를 공권력의 가장 큰 사명으로 여기고 있던 그 옛날 그 시절 프랑스 사회의 분위기도 한몫했을 것이다. 오늘날의 우리나라 같았으면 초범에, 여러 상황을 고려하면 집행유예 형이 선고되었을 가능성도 크다, 나는 그렇게 본다. 그렇게 그에게는 징역 5년의 형이 확정되었다.


그런데 그 후 감옥에 있으면서 모두 네 번의 탈옥을 시도한다. 물론 그때마다 다 실패로 돌아갔다. 그렇게 더 보태진 추가 형이 무려 14년 (3년/5년/3년/3년)이다. 참으로 좋은 나이 27세 때 들아간 감옥을 19년이 지난 46세의 나이 든 중년이 되어서야 나온다.


여전히 나는 이런 '생각 없는' 의문을 갖는다 - "아니 그 5년 잘 참았으면 되는 것 아니야? 왜 쓸데없이,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여러 차례 그런 무의미한 탈옥을 시도해서 일을 그렇게 만들어? 어리석은 자!" 이리 말하면서도 나 또한 나의 이 생각이 어리석고 우매한 것임을 인식은 한다. 나도 여전히 부끄러움을 안다는 반증이니 그나마 다행이다. 그 사람은 생각이 없었겠나? 분명 내가 모르는 나름의 사정이 있었겠지? 세상이 그리 간단하고 쉬우면 왜 우리 삶이 고해라는 말이 툭하면 나오겠나? 왜 그 많은 사람들이 좌절하고 고뇌하고, 그렇게 고통 속에 살겠나?


소설 속에서 특히 기억에 생생한 장면이 있다. 우선은 감옥에 가기 전의 장 발장의 일상 중 하나. 고된 하루 일 (그야말로 잡일)을 마치고 몸이 녹초가 되어 누나 집으로 돌아온 그, 그저 보잘 것 없는 음식 몇 가지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 멀건 스프에 머리를 들이박듯 그리 허겁지겁 먹는다. 그 사이 저쪽에 있는 누나는, 아니 '누나라는 사람'은 그에게 줄 음식 그릇에서 그나마 있는 작은 고기 조각이며 양배추 덩어리며 이런 것들을 골라내서 자기 자식들 그릇으로 옮긴다. 못 본 척 그저 스프 그릇에 눈과 마음과 영혼을 들이밀고 있는 장 발장. 지금 그가 누구를 위해 이런 개고생을 하고 있는 것인데? 인간은 본시 이런 종인가 보다, 가끔은 인간인 나도 혐오감이 든다!


또 한 장면 - 장 발장의 유일한 혈육 누나의 남편은 일찍 죽고, 아이들이 무려 일곱 명이나 된다. 그들을 먹여 살리던 장 발장이 감옥에 들어간 후 우연히 누나 소식을 접하게 된다. 언제 어디서 슬쩍 보았는데 아이는 막내 하나만 데리고 있더라는. 나머지 여섯 아이들이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아마 누나 자신도 모를 것이라는 그 전언자의 얘기.


빅토르 위고의 작가로서의 위대함을 나는 이 두 에피소드에서 보았다. 톨스토이가 전하는 가슴 깊이 다가오는 잔잔한 감동의 설득과는 또 그 결이 다르다. 기독교적 정신에 입각한 사랑, 자비로움, 선과 의로움, 은혜, 그리고 구원과 평화 이런 것과는 또 다르다는 말을 나는 지금 하고 있다.


하긴 빅토르 위고는 위선과 엄격한 형식적 외양에 집착하는 제도 속의 종교인들의 세계를 아주 싫어했다. 그의 작품 '노트르담 드 파리'에서 그 적나라한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지고 있지 않은가? 유언에서도 그들의 위로와 기도는 거부한다고 할 정도였으니! '오직 한 사람의 진실 가득한 기도와 기원이면 족하다'


이탈리아의 유명한 싱어송라이터 쭈께로 (Zucchero)가 루치아노 파바로티를 염두에 두고 쓴 곡 '미제레레' (자비를 베푸소서)를 한번 들어보시라. 파바로티에게 보낼 데모 테입을 녹음하기 위해 오디션을 통해 발탁된 사람이 우리가 아는 그 안드레아 보첼리다. 무명 시절의 그. 이 테입을 듣고 파바로티가 쭈께로에게 한 말 - '당신은 굳이 나와 함께 부르지 않아도 되겠네요. 당신은 이미 대단한 사람을 손에 넣었어요.' 파바로티와 공연을 하기는 했으나 그 뒤로는 안드레아 보첼리가 쭈께로와의 투어에 동행했다. 이것이 보첼리를 유명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세상의 우연과 인연이란!


오늘은 조금 성스러운 내용의 시를 본다. 13세기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썼다는 '파니스 안젤리쿠스 (Panis Angelicus)'다. 나는 19세기 프랑스의 작곡가 세자르 프랑크의 곡을 제일 좋아한다. 영국의 보이 소프라노 알레드 존스 (Alred Jones)가 그의 나이 13살 때 부른 버전을 나는 늘 듣는다. 천상의 목소리란 바로 이런 것 아닐까, 40년 전쯤 처음 그의 이 노래를 듣고 내가 느낀 것이다. 그 소년이 어느덧 55세의 중장년이 되었다. 세월의 흐름이라니!


천사들의 빵 (Panis Angelicus)

- 토마스 아퀴나스

이렇게 천사들의 빵은 오늘날 모든 인간의 양식이 되지요,

형체 없이 천상으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빵.

오, 이 얼마나 경이로운 선물인가요!

가난한 자, 내세울 것 없는 자들이 그들의 하느님, 그들의 주의 보살피심과

돌보심에 의해 먹여지고 길러지게 하소서.


그래서 이제 당신께 간청하오니,

오, 삼위일체의 주여,

지금 이렇게 당신을 경배하고 있는 저희들을 찾아와 주소서,

그리고 우리를 당신의 길로 인도하소서,

그리하여 당신이 영원히 거하시는 그곳에서

마침내 우리가 광명의 빛을 볼 수 있게 해 주소서.

아멘.


<우리말 번역 - 가을에 내리는 눈, 영어 번역본을 바탕으로>


# '레 미제라블 (Les Miserables)' - 비참한 삶을 사는 사람들/지극히 가난하게 생활하는 슬픈 일상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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