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은 별, 여전히 살아있는 별빛. 박노해 '별에 대한 가장 슬픈 말'
지금 내가 머무르고 있는 이곳은 여전히 이른 아침이다. 통창을 여니 시원한 새벽 공기와 함께 부지런한 새들이 고운 노래를 부르고 있다. 아침으로 먹을 자색 고구마를 삶는 동안 우연히 브런치 어느 작가님이 쓰신 아름다운 시 한 편을 읽게 되었다. 오늘의 이 글을 쓰게 한 강한 울림과 깨달음이 내게 있었다.
차를 몰고 간다. 갑자기 길 가운데에서 기름이 떨어졌다. '뭐 어쩌겠나, 지금이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봐야지!' 이렇게 든든한 긍정의 생각을 하는 운전자. 그리고 다시 말한다 - '저기 희미하게 보이는 불빛, 그곳까지만 가면 된다. 어쩌면 지금 이곳에 멈추어서 있는 것은, 다시 출발하기 전의 숨 고르기일지도 모르겠다.' 내 기억 속의 그 시인님의 시는 이리 말하는 듯했다. 나는 이렇게 새겼다, 내 마음대로.
나는 저기까지 갈 수 있을까? '거기'가 어떤 곳이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그곳의 성격, 내게 있어서의 그곳의 의미와 가치, 나의 작금의 상황과 형편 이런 것들이 결국은 최종 결과를 좌우할 것이다.
우선 그곳이 중간 정착지/물과 음식이 있는 오아시스 같은 곳, 물론 기름도 보충할 수 있고/내가 잠시 쉬면서 지친 몸과 마음을 재충전할 수 있는 그런 곳일 경우. 당연 힘을 내서 가야 한다, 기를 쓰고라도 가야만 한다. 나는 갈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원래 '동기와 목적이 몰고가는' 그런 존재니까.
물론 다른 변수는 있다. 내게 지금 '여력'이 없다면? 그곳에 도착한 들, 돈이 있어야 기름도 넣고 숙소도 구하고 음식도 사 먹고 그럴 것 아닌가? 그래야 그곳에 가는 현실적 의미와 효용이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막상 돈이 없다면? 다 소용없는 짓이다. 오히려 더욱 힘들고 난감한 상황에 직면할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그곳까지 갈 이유는 없다. 사실 힘도 없다, 의욕도 없다, 신이 나지 않는다.
또 다른 가정. 혹여 그곳이 최종 정착지, 길고 길었던 여정의 끝지점이라면? 여기서 끝을 맞으나 거기까지 가서 끝을 보나 무슨 차이가 있을까? 차이 자체가 있기는 한 걸까? 차라리 지금의 이곳에 그냥 머물러 있는 것이 더 나은 전략은 아닐까? 가는 도중의 새로운 리스크도 피할 수 있고. 새삼 한동안 계속될 그 힘든 과정을 견디고 뚫고나갈 이유도 없고. 적어도 최소한의 '현재의 상태'는 유지되는 것 아닐까 여기 그냥 있으면?
그래서 그저 이곳에 있기로 한다고 치자. 문제는 그때부터 뭉게구름처럼 피어날 것이다. 더 이상의 희망은 없다는 현실적 자각. 이것, 사람을 많이 힘들게 한다. 꿈이 없고 기대가 없고, 혹시 모를 내일의 그 무엇을 상상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미 죽은 자와 같다. 나는 그리 본다. 이것이 최상/최선/맥시멈이라는 인식 또한 사람을 비참하게 만든다. '아, 이것의 나의 최상이구나?'
나는 원래 내 글을 이리 끝까지 슬프게 끌고 가는 사람은 아니다. 나는 그런 희망 없는 접근법을 싫어한다. 그래서 이쯤에서 돌아선다. 그래서 뭐 어찌하자고?
그래도 일단은 간다, 그곳으로. 이곳은 이미 모든 것이 확정된 상태이지만 그곳으로 가는 동안 어떤 일이 어떤 방식으로 내게 일어날지는 그 누구도 모르기 때문이다. 또한 그곳에 도착했을 때 내가 보게 되고 만나게 될 것들을 지금 이곳의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니 그곳에 가서 내가 내 눈으로 직접 목도해야 한다. 그래서 가야만 한다. 지금 돈이 없더라도 나는 갈 것이다. 가는 도중에 며칠 급히 일손이 필요한, 성경에 나오는 그 '사려 깊은 포도밭 주인'을 만날지 누가 알겠나? 그곳에 갔더니 딱 나같은 스펙의 사람을 구하는 전단지가 떡하니 내 눈에 띌지 그 누가 알겠나?
가는 여정 속의 나는 아마도 이곳에 그냥 죽치고 앉아있는 나보다는 훨씬 '살아있는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런 믿음이 있다. 그러니 간다, 그곳으로. 예이츠가 그의 시에서 말한 대로 '그래, 나는 이제는 분연히 일어나 갈 것이다 (arise and go)' 그곳으로! 이렇게 말하는 지금 벌써 나는 힘이 난다. 꿀꿀한 기분 가득했던 조금 전의 상황과는 다르다. 이렇게 단순한 인간이다, 내가!
저기까지만 가면 된다, 나는 갈 수 있다. 그러니 가자, 일단은 가자. 내일의 일을 나는 지금 모른다, 알 수가 없다. 그러니 선한 동기 속에 의로움 가득한 마음으로 열심히 가보자. 혹시 아나? 그런 내 모습을 신과 섭리와 스피노자의 대자연이 기특하게 여기고 그래서 옆에 숨겨놓았던 비장의 카드를 꺼내 내게 새로운 길을 보여주실지? 그들 성스럽고 신비한 존재들로부터 "아니, 그럴 일은 없어. 그러니 꿈 깨!" 이런 말을 들은 적은 없다 나는, 아직은!
이제 오늘의 시를 본다. 박노해 시인의 아름다운 시다.
우리가 지금 밤하늘에서 보는 저 별빛의 별은 어쩌면 이미 오래전 죽었는지도 모른다는 시작이 나를 설렘으로 가득하게 한다. 태양도 별의 하나, 지금 내가 쬐고 있는 한낮의 이 따스한 빛은 8.3분 전에 태양을 떠난 것이다. 지금 태양을 막 출발한 또 다른 빛들은 8.3분이 지나면 내게 도달할 것이다. 밤하늘 별빛이 내게로 오기까지는 짧게는 몇 년에서 길게는 몇 백만 년, 아니 수억 년이 걸린다. 빛은 여전히 살아서 내게로 오고 있지만 그 순간 그 빛을 보낸 별은 사멸하고 없다는 사실의 인식은, 슬픔과 함께 우주의 경외를 느끼게 한다.
그만큼 나라는 존재, 우리 인간은 이 거대한 우주 속에서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작은 실체에 불과하다. 다른 어떤 비유나 묵상의 결과보다 이 과학적 사실은 이런 깨달음을 강렬하게 내게 전달한다.
시인은 이렇게 더 깊은 얘기를 한다. 지금 우리 눈에 빛나는 건 이미 죽어간 존재일 수도 있다고. 그저 관념적 사유나 철학적 비유가 아니다. 엄연한 과학적 사실이다. 관념과 사실은 또 그 결이 다르다. 저 별처럼 사랑으로 자신을 사르지 않는 인생은 별 하나조차도 영원한 그리움으로 빛낼 수 없는 것이라고. 자신을 다 불사른 자만이 밤하늘 저 별같은 궤적을 남길 수 있는 것이라고. 비록 그것이 그에게는 소멸의 증거이기는 하지만.
내게로 달려오는 그 먼 거리 그 긴 시간 중에 이미 죽어버린 별, 그러나 그 죽은 별은 빛이 되어 지금도 내게로 오고 있다. '빛에 (단단히) 새긴 (자신의 그 크고 진실한) 사랑'으로, 그런 고귀한 사랑의 모습을 하고!
누가 이미 죽은 별을 그냥 슬퍼만 할 것인가? 누가 그 별을 불쌍하다 할 것인가? 그 별은 슬픈 존재도 아니고 불쌍한 존재는 더욱 아니다. 그 오랜 시간 변함없이 내게로 달려온, 그래서 마침내 내게 사랑으로, 밝은 빛으로 도달한 거룩한 존재인 것을!
내가 가야할 '저기'가 중간 정착지이든 최종 도착지이든 내가 불끈 힘을 내서 가야만 하는 이유가 이렇게 또 하나 생겼다. 믿음의 여정이라 해도 좋고 내 존재의 증명의 과정이라 해도 좋다. 그곳이 마지막 끝의 장소일지라도 나는 그곳까지는 꼭 가련다. 아마도 내 선함과 의로움 뿐만 아니라 내 존재의 흔적을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리 말해주는 그 누군가가, 아니면 그 무엇인가가 그곳에는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네, 저는 저기 그곳까지 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