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하는, 변해야 하는 사랑. 버스커 버스커 '정말로 사랑한다면'
국내의 대중가요든 팝송이든 외국어 가사의 성악곡이든 그 가사를 이해하고 음악을 들으면 그 맛과 감동이 훨씬 깊어진다. 나는 외국 시든 가사가 있는 외국 음악이든 꼭 내가 다시 번역해서 내 버전을 읽고 듣는 것을 좋아한다. 번역을 잘해서가 아니라 그 과정에서 많은 것들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시가, 그런 가사기 나오게 된 배경과 단어 하나하나의 구체적인 의미들을 알게 된다. 상황정보가 그만큼 많아지는 것이다.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할 때, 특히 코스요리인 경우에는 주문이 끝나고도 메뉴판을 두고 가라고 한다. 물론 친절하게 이번 요리는 무엇입니다 하고 설명을 해주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내가 주문한 것이지만 지금 내가 먹고 있는, 아니 그것 보다는 이제 다음에 나올 음식이 어떤 것인지를 미리 알고 먹으면 그 맛이 크게 다르다.
대중가요의 가사 하나를 소개하려 이리도 시작의 말이 길었다. 당연 이 또한 아름다운 시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어느 영화 속 대사다. 왜, 사랑은 변하면 안 되나? 변하는 것이, 어쩌면 변해야 하는 것이 바로 사랑의 속성 아닌가, 남녀간의 사랑이라면 특히나? '어떻게 변해가나/언제 변하나/왜 변했나/그래서?', 실은 이것이 더 중요한 문제일지 모른다. 그저 이 부분에 우리들의 관심과 주의를 집중하는 것이 보다 현실적이고 현명한 자세일지 모른다.
남녀간의 사랑은 어떻게 시작되나? 단순한 호기심, 애뜻함과 연민의 감정, 뜨겁게 불붙은 육체적 욕망과 충동, 금전적 동기가 중심이 된 현실적인 접근법, 어느 일방에게는 그리 마음 내키지는 않았던 비자발적 요인들에 의한 애매하고 미지근한 시작, ...
리하르트 바그너는 이 세상의 사랑은 결국은 뜨거운 육체적인 사랑 이외에는 없으며 그 외의 것들은 아예 사랑이 아니거나 아니면 이 육체적, 쾌락적 사랑을 은근히 달리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이 원칙에 대단히 충실한 사랑의 삶을 살았다. 충분히 뜨겁게!
반면 영국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퍼시 비시 셸리는 (Percy Bysshe Shelly)는 정신적인 사랑을 강조했다. 그가 생각하는 진정한 사랑이란 마음과 몸이 함께 만나고 무엇보다 서로에게 자신을 온전히 바치는 것이었다.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정말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는 혹은 그녀는 늘, 언제나 슬픔과 떨리는 마음 속에 살 것이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그것이 내가 말하는 진실한 사랑이다. 그저 매 순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안위를 노심초사 걱정하고 그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과연 충분한지를 걱정하고, 그 순간에도 그를 그리워하고 함께 있고 싶어 하는 그 마음 때문이다. 그러니 누군가를 진정 사랑하는 이는 늘 초조와 연민, 그리움 속에 산다."
사랑은 무조건 하나 되는 것이라고 셸리는 강조한다. 아름다운 말이다, 조건 없이/그 어떤 조건이나 전제를 내걸지 않고 그저 하나가 되는 것! 아쉽게도 우리 사는 이 현세에서는 언제나 그렇듯이, 아름다운 것은 더욱 손에 쥐기가 힘든 법이다. 그래서 더 아름답게 보이는 건가?
어쩌면 그저 본능의 지시에 의한 단순한 하나의 목적, '번식을 통한 종의 보존' 그것을 위해 암컷과 수컷이 만나고 짝을 짓는 동물의 세계가 더 발전된 형태의 모습 아닐까 하는 뜬금없는 생각도 해본다. 오직 그 목적을 위해, 그것만을 위해 엄격하게 짝을 고르고 이번의 짝이 꼭 다음번의 짝인 것은 아니라는 서로의 쿨한, 명시적 동의가 있고. 가끔은 아주 답답한 마음에, 자조적으로 이런 생각까지 하는 나. 참으로 단순한 나.
일단 그 목적이 충족되었다 싶으면 그냥 다시 이전의 '남'의 상태로 돌아가는 그들의 행태. 각자 자기가 해야 할 일에 몰두하는 그들. 어미는 새끼를 먹이고 기르고, 보호하고 가르키고. 대개의 경우 수컷은 자신의 새끼가 누구인지 아예 알지도 못하고 알 수도 없고, 알 생각도 없는 그런 야생의 세계.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요구하지도 강요하지도 않고, 그러니 그로 인한 고통스러운 다툼이나 상처 내기 또한 없이. 그것이 더 좋다고 강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서도 배울 것은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뿐.
우리는 그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고등동물이라는 것 아닌가, 우리네 주장으로는? 포유 강, 영장 목, 사람 과 아닌가 명색이 우리가 그래도?
이성간의 육체적 결합의 행위에 이런 번식의 목적 외에 사랑이니 안정이니 하는 전혀 다른 감정적, 계산적 요인의 개입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오직 우리 인간의 세계에만 있는 것 아닐까? 동물의 세계에서는 선택권은 암컷에게 있다. 사자나 호랑이 같은 대형 맹수로부터 시작해서 새 같은 작은 동물들도 그렇다.
그들의 선택 기준은 철저하고 단순하다 - 어떤 상대의 유전자가 2세에게 더 유리할까? 힘의 크기다. 육체적 생존력이다. 물론 이들의 세계에서도 상대방의 매력도 혹은 물질적 수단에 의한 유혹의 동인이 가끔 존재한다. 그러나 그 비중은 아주 작다. 오직 보다 나은 2세를 위한 경쟁력 있는 유전자의 확보, 그것이다.
인간 남녀의 결합에서는 통상 보다 높은 수준의 고차원적인 개념, 그러니까 사랑의 존재가 늘 등장한다. 종의 보존이나 물질적인 요인의 매력도는 아예 뒤로 밀리는 경우가 많다. 적어도 표면적, 외양상으로는 그렇다. 물론 이것 또한 오늘날에는 이미 크게 변화되었지만.
그러나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 글쎄, 과연 그럴까? 이런 사랑의 감정이 그리 고차원의 숭고한 덕목일까?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까? 현실과 이런 이상은 그럼 왜 그리 큰 격차를 보이는 것일까?
진정 그렇다면 일단 서로가 서로를 묶는 행위부터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역사 속에서 그동안 이 부분은 다양한 형태로 많은 시도와 변화를 거듭해오기는 했지만. 아무튼 지금도 제도라는 것이, 법이라는 것이 그 고상한 남녀간의 사랑의 영역에서도 버젓이 자신의 강력한 몫과 권한을 주장하고 나선다. 일단 이 부분에서 나는 모순을 본다. 법과 제도, 사회 관습에 의한 타율적 강제적 규제, 반면 인간들은 동물과는 전혀 다른 고차원적 상위 개념의 사랑의 존재를 말한다. 모순이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하고 항변조로 아니면 슬프게 따지듯 말할 때 우리는 당연 나쁜 쪽으로의 변화를 두고 하는 한탄입니다. 보통은 사랑의 끝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세상에 끝이 없는 게 뭐가 있나요? 생명도 끝이 있고 사계절도 늘 그 자리에 있을 수는 없는 것이고, 해도 길고 짧음이 있고 달도 차고 기우는 것을!
왜 사랑만이 꼭 예외가 되어야 한다고, 그리 될 수 있다고 믿는 건가요? 논리적으로도 또 감성적으로도, 무엇보다 그 오랜 세월 우리가 목도하는 현실과도 맞지 않잖아요? 사랑이 더 깊어지기를, 혹은 그저 뜨거운 열정이 지탱하던 사랑이 언젠가부터는 정으로 그리고 의리로, 상호 신뢰를 힘으로 더욱 단단해지기를. 또한 바라건데 상대방에 대한 기대와 요구의 수준을 점차 줄이는 형식으로, 시간의 흐름과 함께 약화되어 가는 상대방의 과거의 그 강점과 넘치던 매력을, 이제는 보다 너그럽게 끌어안을 수 있기를! 사랑이 그렇게 순기능의 방향으로 변해가기를!
하지만 영 안되겠다 싶으면 너무 늦기 전에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을 다시 '남'의 위치로 그리 '온전하게' 내보내 주기를! 끝까지 상처 내고 파괴하고, 그래서 두 사람 모두 큰 후유증 속에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는 불행한 상황으로 몰고 가지는 말기를! 그래도 한때는 서로 사랑했던 사이 아닌가?
전혀 모르던 남이 정말 사랑하는 나의 님이 되었을 때, 우리가 맛보았던 삶의 신비와 황홀함을 기억하시나요? 세상을 다 가진 듯, 이제는 달리 더 크게 원하는 것이 없을 것 같았던 그 순간을 기억해 보세요. 아름다운 시간들이었지요?
그 아름다움의 기억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적어도 그 소중했던 나의 님이 '놈'으로까지 떨어져 내려 가는 것을 그냥 방관하지는 마세요. 물론 작정하고 그렇게 하시지도 말고요. 그냥 고이 다시 그 남으로 돌려보내 주세요. 당신을 위해서요 우선, 그보다는!
대학 다닐 때 좋아했던 법철학 시간, 그때 얻은 것 몇 가지 중에 '금반언의 원칙'이라는 것이 있어요. 저는 늘 '나중에 딴소리하지 말기 법칙'이라고 불렀지요. 공자님이 말씀 하신 '일이관지 (일관, 하나로써 죽 변함없이 꿰어내는)'와도 결을 같이 하는 말이지요. 돌변은 곤란해요. 굳이 표변이나 호변은 기대하지도 않아요. 그래도 어제까지 멀쩡하다가 갑자기 오늘 아침 먹고부터 태도가 180도 달라지면 곤란하지요. 그 사이 무슨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저 본인의 마음이 바뀐 것 뿐인데. 그건 참으로 곤란합니다!
'소급입법 금지의 원칙'도 기억하면 좋겠어요. 그래요, 어느 날 나의 마음이 바뀌고 나를 둘러싼 환경이 변하고, 그렇게 상황이 내게도 변화를 강요하고 있다고 치자고요. 그래도 '이제부터의 일에 대해서' 새로운 정책이나 법을 적용해야 하는 것이지요. 이미 다 지나간, 본인도 다 알고 있었고 지금껏 아무 말 없었던 그런 건에 대해 새삼, 그저 트집을 잡기 위한 방편으로 물고 늘어지는 것, 아 곤란합니다. 치사하잖아요 너무?
지금껏 상대방이 내게 잘했던 것들, 다 합해보니 열이라고 쳐요. 물론 항목별 가중치까지 넣어서요. 이번에는 잘못했던 것들을 그렇게 해보니 셋이에요. 그러면 열에서 셋을 빼도 여전히 칠은 남는 거잖아요? 그것을 그냥 퉁쳐서 아무 것도 남은 것 없는 것처럼, 아니 마이너스인 것처럼 그리 셈하면 안 되지요. 물론 순차적 스트라이크 셋으로 이어진 삼진 아웃이 아니고 첫 번째 공을 냅다 받아쳐서 외야 플라이로 한 방에 아웃되는 경우도 있겠지요. 그런데 통상 그런 중대한, 회복 할 수 없는 사유가 그리 흔한 것은 아니잖아요?
의리라는 것이 있지요, 정이라는 것도 있고요. 아끼고 어여삐 여기는 마음, 맹자의 측은지심을 굳이 끌어다 붙일 것까지도 없어요. 그런 면에서는 서양의 남녀가 조금은 더 성숙한 판단을 하고 그렇게 행동하는 것 아닌가, 그런 관찰을 저는 자주 합니다. 100% 유치한 감정적 동인에서 모든 것을 판단하고 결정하고 실행하면 참 난감한 일이지요? 그때는 방법이 없어요, 솔루션이라는 것이 아예 보이지 않는 것이지요. 안타까운 일 아닌가요?
이제 버스커 버스커의 그 노래 가사를 봅니다. 유행가 가사이다 보니 그만큼 직설적이고 솔직하네요. 저는 오히려 좋습니다!
단지 목전의 이익을 위해 너무도 쉽게, 너무나 악의적으로 거짓을 말하지는 마세요. 결국은 큰 상처가 되지요, 서로에게. 상대방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지금 그 사람은 얼마나 힘든 상황에 있는 것인지 당신은 단 한 번도 진심으로 마음 쓰지 않았지요?
이번에도 그냥 그렇게 넘어가자고요? 더는 안 되겠어요. 이제 그만해요 우리!
내가 원한 것은 그저 나를 진심으로 사랑해 주는 것, 그래서 때로는 조금 기다려주고 또 때로는 조금 참아주는 것 그것이었어요. 내가 사랑하는 당신 그대를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 그런데 그것이 당신에게는, 또 내게는 그리도 힘든 것이었나 봐요. 그저 늘 그 순간만을 넘기려는 그 얕음과 얼버무림과 그 사랑 없음!
정말로 사랑한다면 아니 그동안 잠시라도 사랑했다면, 우리 이제는 헤어져요 그동안 우리들의 그 아름다웠던 (혹시 당신에게도 그랬다면!) 사랑의 힘으로 그렇게!
# 내가 의도한 이 글의 원래 제목은 '남이 님이 되고 그 님이 놈이 되는, 남녀간의 허망하고 민망한 사랑이라는 것에 대하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