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에 글쓰기 3개월이 내게 가져다준 것

- 자부심과 긍지, 득도, 나의 흔적, 평온. 에냐 '부디 그리 되기를'

by 가을에 내리는 눈

무의식 속에서도 늘 '그래서 내가 얻은 것은 무엇인가, 잃은 것은 또 무엇일까' (내가 좋아하는 어느 가수의 노래 가사가 기억난다!) 이런 셈을 하는 습관이 여전히 남아있다. 뭐 크게 나쁜 것도 아닌 듯하여 그냥 둔다. 그런 것까지 하지 못하게 하면 나의 자아와 나의 감성이 화를 낼 것 같기도 하고. 굳이 성인군자가 될 생각도 없으니 그럴 것도 없다는 생각도 들고.


후회를 위한 후회나 습관처럼 반복되는 미련과 아쉬움의 길 걷기를 극도로 경계하고 있는 나로서도, 개선과 두 번 실수의 방지를 위한 복기 혹은 '그렇다면 그때 이랬어야 했을까?' 정도의 한 번 되짚어보기는 꼭 한다. '과거를 망각하는 자는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 한다', 아들 녀석 어릴 때 내가 그에게 늘 하던 말이다. 그의 책상 머리에 써서 붙여놓기도 했다. 그도 지금 그 말을 늘 기억하고 있다고, 얼마 전 내게 그리 말했다. 이 아버지 기분 좋으라고, 그리고 염려 마시라고, 아마도 그런 뜻이었을 것이다. 사려 깊고 용의주도한 아들이니까!


그 아들 녀석이 조금 전 카톡 메시지로 '사랑해요!' 이런 문자를 보내왔다. 평소에는 영어로 보내는데 이 아이는 언제 영어가 아닌 한글 메시지를 보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다. 타고난 감각이다. 처음 그와 톡을 할 때 어느 날 밤 내게 보내온 메시지를 나는 지금도 잊지 않는다 - '아버지, 안녕히 주무세요!' 그 전에는 'Dad, have a good night sleep!'이었다. 이 두 메시지가 주는 하늘과 땅 차이의 그 감동을 여러분은 짐작하실 것이다. 사실 그날 밤 이 메시지로 인해 잠을 좀 설쳤다. 그러면 어떠랴? '잠은 그저 하룻밤이고 감동과 추억은 영원하다'


브런치와의 만남이 벌써 3개월이 되었다. 문득 '그동안 나는 무엇을 얻었나?' 이런 생각이 내 머릿속에 들어왔다. 글쎄, 굳이 잃은 것은 없다. 시간? 시간도 오히려 내가 더 얻은 듯하다. 많은 시간들이 내게 소중하고 더욱 의미 있는 순간들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의 감정은 표현해야 한다, 상대방이 쉽게 알 수 있게 제대로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알아 주겠지? 어찌 알 수가 있나? 바쁜 일상 말고도 사람의 속 마음을 알기는 참으로 힘들기 때문이다. '열 길 물속 한 길 사람 속' 얘기가 괜히 나왔겠나? 나는 그 또한 다른 형태의 오만이고 방심이고 게으름이라고 본다. 그만큼 절실하지 않기 때문이고 그만큼 열정이 없기 때문이다. '진심을 다하면 내가 변하고 내가 변하면 모든 것이 변한다'


나 자신에게도 나만을 위한 경과 보고의 프리젠테이션을 하는 기회를 갖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야 또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래서 오늘 이 글을 쓴다.


하나, 여전히 '중요한 무엇인가를 하고 있는' 존재라는 자부심. 매일 아침 일어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오늘의 글을 올리는 것이다. 그렇게 나의 하루가 시작된다. 오늘 해야 할 큰 일을 마쳤다는 안도감도 들고, 그러니 오늘 이 하루도 내가 숨을 쉬고 산책을 하고 밥을 먹을 이유는 이미 증명되었다는 나름의 합리화도 내 손에 쥔다. 내게도 내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도 좋은 일이다, 이런 긍정적 마인드의 흐름은.


둘, 이미 '충분히' 나이 들었다고 생각하는 작금의 내게도, "아,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아직도 여전히 내가 깨닫지 못한 것들이 이리도 많구나!" 하는 다소 신기한 느낌의, 그리고 그리 싫지만은 않은 깨달음이 뒤늦게 내게로 많이 달려왔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게로 오고 있다. 평소 무릇 모든 깨달음은 내게 좋은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크나큰 소득이다.


물론 유형적인 효익도 함께 오면 좋겠지만, 그건 아무에게나 오는 것은 아님을 이미 알고 있기에 별다른 아쉬움은 없다. 이런 깨달음 혹은 '득도 수준의' 인식이 내게 와 준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니까! 오유지족, 나는 만족을 안다.


둘의 하나 - 내 마음과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다르다는 것, 그 단순하고 뻔한 진리를 나는 일상 속에서 자주, 아니 거의 늘 망각한다. 내 편한 대로,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미리 결론을 내놓고 그리로 밀고가는 나. 그러고는 막상 예상 혹은 기대와는 전혀 다른 결과치를 보고는 괜히, 새삼 실망이라는 것을 한다. 그럴 줄 몰랐나? 에이, 이미 알고 있었잖아? 적어도 너 자신에게는 좀 솔직해봐라 이 사람아!


둘의 둘 - 사람들은 자기 보고 싶은 것만을 본다는 사실의 재확인. 넘치고 넘쳐나는, 참으로 무서운 양으로 매일 매순간 나를 덮쳐오는 그 많은 정보, 물건, 사건과 상황, 물론 수없이 많은 좋은 글들, 하지만 나는 그저 한 사람일 뿐인걸? 나의 시간은 겨우 하루 24시간, 일을 해야 하고 잠을 자야 하고 밥을 먹어야 하고 사랑하는 이들을 만나야 하고, 그 속에서 짬을 내어 책을 읽고 브런치의 글을 읽어야만 하지.


그러니 나를 잡으려면 우선 나의 눈을, 나의 마음을, 나의 손을 낚아채세요, '그 좋다는' 당신의 그 글 속에 무엇이 있는지는 나는 몰라요, 아니 사실 크게 관심은 없어요. 저는 솔직한 사람이니까 이리 솔직하게 말하는 겁니다. 그건 당신의 몫이지요. '어이쿠, 이거 그저 낚였군!' 이런 경우도 많아요. 할 수 없어요 그래도. 내게는 그나마 그것이 제일 효율적이고 현실적인 거름의 툴 (필터링, filtering)이니까요.


줄리어스 시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굳이 민중들이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것들까지 '기를 쓰고, 억지로' 보여주려고 했다. 그것이 결국은 그의 죽음을 불러왔다. 그의 후계자 옥타비아우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그와는 달랐다. 그는 그저 민중들이 보고 싶어 하는 것만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그는 로마제국의 여러 황제들 중 제일가는 황제의 위치에 올랐다. 그야말로 '청출어람 청어람' (푸른 색은 원래 쪽빛 남색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 쪽빛 보다 훨씬 푸르다).


뛰어난 세계적인 운동선수들의 코치를 보며 옛날 이런 생각을 나는 했다. '아니 그럼 코치 자신이 직접 경기에 나가서 뛰지 그래?' 그는 어디로 가면 되는지, 어떻게 하면 그곳에 도달할 수 있는지를 자신의 과거 경험과 그 속에서의 깨달음으로 알게 된 사람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정작 그곳까지 직접 갈 힘과 열정은 없다. 그러니 제자에게 자신의 비기를 전수하는 것이다. 그를 통해 자신이 이루지 못하는 그 무엇을 이루고 싶은 것이다. 의미 있는 바람이고 가치 있는 노력이다. 인류의 모든 발전과 진화는 그렇게 이루어진 것이다.


이 말을 하려다 여기까지 왔다 - '상대방이 보고 싶어하는 것을 보여주세요, 단박에 그녀의 눈에 들어올 수 있게 그렇게 잘 포장하고 제대로 다듬어서!'


둘의 셋 - 맛있어 보이는 것이 정말 다 맛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마다 다른 입맛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그저 보통의 공통적인 맛있음의 기준을 적용한다고 해도 그렇다. 보이는 것 따로 실제의 맛 따로. 내가 보기에, 느끼기에 이건 분명 맛있다고, 아니 꼭 맛이 있어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먹는 사람의 입맛 자체가 이상한 것이라고, 이런 궤변과 오만의 생각은 버리고 또 버려야 한다는 깨달음. 하지만 그 역도 성립할 수 있다고, 나는 감히 조심스럽게 말한다.


셋, 조금 더 성숙해져가는 나. 아니 이 나이에 뭘 또 성숙? 내가 좋아하는 첼리스트 중에 스페인의 전설적인 세계적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라는 분이 있다. 바흐의 '여섯 개의 첼로 모음 춤곡'을 처음 발견 (헌 책방에 그냥 버려진 그 악보를)해서 10년 간의 연구 끝에 이 세상에 처음 선보인 양반이다. 97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95세 때 그때도 매일 하루 몇 시간씩 첼로 연습을 하는 그를 보고 어느 기자가 묻는다. '선생님, 80년 넘게 첼로를 하셨는데 (그가 본격적으로 첼로를 연주한 것은 11살 때부터라고 한다) 뭘 그리 더 연습하실 것이 있어요?' 그의 대답, "아니, 지금도 내 실력이 조금씩 는다네, 나는 그걸 느껴!"


이제는 웬만큼 배가 부르고 급한 불은 끊듯 하고, 급했던 화장실에도 갔다 왔으니 그렇겠지만, 아무튼 요즘은 구독자의 수도 내 어떤 글의 조회의 수도 뭐 그리 나의 큰 관심을 끌지 않는다. 배부름보다는, 조금은 더 성숙해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고맙고 기분이 좋다.


누군가 오늘도 나의 글을 기다리고 있는 분이 있을 것이라는 나이브한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저 전적으로 나의 '이기적 동기'에 기해서 나는 글을 쓰는 것이다. 그것이 뭐 나쁘다는 생각 역시 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어떤 형태로든 피해를 주거나 심한 불편함을 끼치는 것은 아니라고 보니까.


넷, 3개월전에 비해 나의 일상 여러 부분에서 보다 편한안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나를 발견한다. 마음의 평화 영혼의 평온에 좀 더 가까이 간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지난 시간 글을 쓰면서, 산책 중 그 글들을 위한 묵상과 사유 속에서, 그리고 다른 분들의 브런치 글을 통해 내가 깨닫고 그렇게 얻은 소중한 것들이다.


다섯, 저의 글들을 여러 편 읽은 분들은 눈치를 채고 계실 것인데, "아니 이 양반 이제 이쯤이면 나올 레퍼토리가 있는데?" 딩동뎅, 네, 맞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귀한 아들!


엊그제 나는 세 번째 브런치북을 발간했다. 1편 '시와 함께 하는 에세이' / 2편 '묵상과 시, 그 사유의 흔적들'에 이어 3편 '시와 동무하는 내 일상 속 개똥철학'이다. 단순 실수에 의한 우연인지 아니면 이 또한 우연의 모습을 하고 나를 찾아온 필연인지, 아무튼 개똥철학의 마지막 글자 '학' 자가 들어설 자리가 없었는지 '개똥철'로 끝나버렸다. 이른 새벽 서두르다 미처 보지 못했다. 아무려면 어떠랴? 다 알아서 보시겠지?


이 정도면 사랑하는 귀한 나의 아들에게 자랑할 그 무엇이 좀 더 늘어난 것이 된다. 나의 흔적, 아버지의 자취를 아들은 '공연히, 다중의 시선 속에서' 찾고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면 되었다. 내가 처음 브런치에 글을 쓰기로 마음 먹은 그 이기적 동기 중 가장 큰 것 하나가 멋지게 성취된 것이다. 기쁜 일이다, 감사할 일이다.


눈치 채셨나요, 제가 숫자 5 (다섯)를 좋아한다는 것을? 지금 제가 있는 이 나라 사람들은 5라는 숫자를 싫어해요. 저는 좋아합니다, 완전한 균형을 말한다는 3보다도 저는 더 좋아합니다. 7보다 좋아하는 것은 물론이고요. 5를 좋아하고 9를 좋아하고 33을 좋아하고 38을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나의 아들, 그리운 내 아버지와 어머니, 나 그리고 우리를 지켜줄 신 이렇게 다섯이지요? 그래서 오늘의 이 글도 그만 다섯에서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은 에냐가 부른 '반지의 제왕' (반지의 지배자, The Lord of the Rings)의 주제가 가사를 살펴본다. 어쩐지 오늘 이 글과, 그리고 그간의 나의 소회와 잘 어울린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여러분도 이 기회에 예전의 그 영화를 보셨을 때의 여러 아름다운 추억들을 소환해 보시기를! 저는 아들 녀석 어릴 때 그와 셋이서 보았답니다.


부디 그리 되기를 (May It Be)

- 에냐

저녁 별이 늘 당신을 밝게 비춰주기를

어둠이 찾아올 때 그때에도 당신의 마음은 그대로 진실하기를

외로운 길을 걸어 아, 당신은 집을 떠나 얼마나 먼 길을 걸어왔는가

어둠이 왔네요 하지만 믿음을 가지세요, 그러면 당신의 길을 찾을 겁니다

이미 어둠이 찾아왔어요, 그러나 미래를 위한 희망은 지금도 여전히 당신 안에 살아있지요

그림자의 외치는 소리가 저 멀리 날아가버리기를

당신은 이 여정을 계속할 것이고 결국에는 당신의 그날을 환하게 밝히게 될 겁니다

밤이 잠시 세상을 정복할 때에도 당신은 분연히 일어나 태양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어둠이 내렸지만 믿으세요, 그러면 분명 당신은 자신의 길을 찾게 될 겁니다

어둠이 내려 깔렸어도 희망의 씨앗은 여전히 당신 안에 살아있으리니,

당신 안에서 지금도 살아있을 것이니!


<우리말 번역 - 가을에 내리는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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