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꽃, 박나물, 아내의 바가지, 초가지붕 위의 주렁주렁

- 호박꽃 아니구요, 청초한 박꽃이요! 전략? 신대철 '박꽃'

by 가을에 내리는 눈

나물 무침, 나물 볶음, 저는 거의 모든 나물 요리를 좋아합니다. 특히 무나물을 좋아하지요. 설익으면 안 되고 조금이라도 짠 맛이 돌면 안 되고 냉장고에 들어갔다 나오면 바로 그 맛이 달라지고. 웬만한 요리 고수들에게도 어려운 것이 바로 나물 요리잖아요? 저의 형수님이 나물 요리를 정말 잘하세요. 일 년에 한두 번 명절 때 해 오시던 박나물 요리, 참으로 맛있었지요. 들깨가루가 그 풍미를 더해주는 담백 그 자체의 박나물!


플라스틱 바가지가 박으로 만든 자연 바가지의 자리를 꿰어찬 지 이미 오래, 지금은 주방 용품에서 아예 바가지의 용도나 기능이 사라진 듯하다. 가마솥을 쓰지 않는 것의 영향도 클 것이다. 그때는 열기에 쉽게 녹지 않는 자연산 바가지가 꼭 필요했던 시절이었다. 촘촘한 골이 줄줄 가있는 플라스틱 바가지보다 위생적으로도 훨씬 좋았던 것 같다.


바람 많이 부는 제주도 같은 곳에서는 지붕에 주렁주렁 열린 박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지붕 고정용이었다. 보는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정겹고 멋스러운 모습이기도 하고.


박꽃은 밤에만 꽃을 피웁니다. 보통 해가 지기 직전 밤이 오기 바로 전에, 오후 5시에서 6시 사이 짧은 시간 안에 꽃 피우기를 끝냅니다. 그리고는 다음날 아침 5시에서 7시 사이에 꽃을 닫지요. 호박꽃이 화려한 진노랑의 낮의 꽃이라면, 박꽃은 청초한 흰색의 수줍은 밤의 꽃이지요. 밤의 동무이고 달님과도 친한 사이지요. 물론 이미 잠시 산 너머로 모습을 감춘 태양과도 막역한 사이일 겁니다. 박꽃, 밤, 달님과 햇님, 모두 친하게 알고 지내는 사총사라고나 할까요?


그런데 박꽃은 왜 이리 밤에만 피는 것일까요? 일종의 '틈새 시장' (niche market) 공략 전략을 취한 것이지요. 꽃들은 수정을 위한 곤충이 필요합니다. 박꽃은 한낮 세계의 그 치열한 경쟁을 피해서 밤의 세계에서 활동하는 야행성 곤충들을 자신의 시장으로 삼은 것입니다. 나방, 박각시 등이 그들이 찾는 고객이지요. 당연 이 또한 오랜 진화의 결과입니다.


제가 젊었을 때 어느 날 우연히 영국의 진화생물학자 리차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The Selfish Gene)'라는 책을 읽고 충격과 놀라움, 감탄 속에 몇 날을 보냈던 기억이 납니다. 박꽃의 밤에만 꽃을 피우고 낮에는 휴식을 취하는 이 전략 또한 오랜 세대 거듭된 점진적 진화의 산물인 것이지요. 식물 조차도 그저 만만히 볼 존재가 아니지요? 새대가리요? 지능과 머리 좋음이 단순히 머리 또는 대가리 (생선이나 새, 소 등 동물의 경우 대가리라고 하는 것 아시지요?)의 크기와 그대로 연동된다고 보시면 오산입니다! 물고기도 그 작은 새들도, 하다못해 식물도 나름 머리 좋습니다! 특히 생존을 위한 전략의 경우에는요!


위에서 박각시라는 곤충을 잠깐 언급했는데요, 이름이 재미있지요? 나방과 함께 나비 목에 속하는데요, 나방보다는 몸집이 훨씬 커요. 특히 꼬리박각시라는 나방은 마치 벌새 (아주 작은 새로 정지비행을 하면서 꽃의 꿀을 빨지요)와 그 모양 및 행동 양태가 유사해서 전문가들조차도 종종 그 둘을 오인한다고 합니다. 사진으로 제가 보니 비슷해요. 박각시 그 이름의 유래를 이렇게 저렇게 설명하던데, 저는 '밤에 조용히 수줍은 듯 박꽃을 찾는 각시' 그래서 박각시라고 해석하려고 해요. 그럴 듯 하지요?


조금 긴 서곡 연주였습니다. 그렇다면 이건 프렐류드 (prelude)라기 보다는 오버츄어 (overture)에 가깝겠군요? 시인 신대철은 이 시에서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요?


시끌시끌 소란스럽던 우리네 인간 세상의 낮도 이제는 저물고 벌들처럼 와글와글 모여서 생산의 활동을 하던 그 많은 사람들도 이제는 집으로 돌아가 잠을 잔다. 방어용, 소극적 자기 보호용으로 누구나 하나씩 들고 있는 나름의 침도 그저 옆에 편하게 내려놓은 채로. 이러쿵저러쿵 이렇다 저렇다 시끄럽게 떠들고 얘기하는 일도 지금 이 시간에는 없다. 이들이야 그저 꿀을 얻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소시민들이지만, 조금 전 한낮의 활동자들 중에는 현재 한반도 최상위 포식자인 담배와 같은 존재들도 많다. 그들도 밤이 된 이 시간에는 천연덕스럽게 자기 집으로 돌아와 아내와 자식들과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있다. 아이러니다, 낮과 밤의 전혀 다른 그 두 모습이라니! 내가 좋아하는 박꽃은 이미 피었고 이 밤 내내 저리 하얗게, 고고하게 피어있을 것이다. 천지 사방이 고요한 이 시간, 이제야 물소리가 물소리로 제대로 들린다. 낮에는 전혀 들을 수 없었던 그 물소리!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가 그의 시 '작은 호수섬 이니스프리'에서 늘 들었던 그 호수의 물소리. 그는 어린 시절 그곳 아일랜드의 슬라이고주 호수섬에서 듣던 그 소리를, 이제는 런던의 중심가 플릿 스트리에서, 회색빛 도로 위에서 밤이고 낮이고 듣는다는군요. 저 가슴속 깊은 곳에서 그렇게!

박꽃

- 신대철

박꽃이 하얗게 필 동안

밤은 세 걸음 이상

물러나지 않는다


벌떼 같은 사람은 잠들고

침을 감춘 채

뜬소문도 잠들고

담비들은 제 집으로 돌아와 있다


박꽃이 핀다

물소리가 물소리로 들린다


# '밤은 세 걸음 이상 물러나지 않는다', 재미있고도 궁금한 표현입니다. 하나, 박꽃은 오후 5시-6시 사이에 그 닫았던 꽃잎을 다시 활짝 펼치는 작업을 마친다고 했지요? 박꽃은 6월에서 8월에 핍니다. 그 계절 밤이 시작되는 시간 그러니까 일몰 시간을 확인해 보았더니 대략 저녁 7시 반에서 8시 반 사이랍니다. 박꽃이 밤보다 먼저 그 꽃 피우기 작업을 시작하고 그 끝을 낼 때, 멀리 떨어져 있던 밤은 서둘러 박꽃 있는 곳으로 달려오고 있지요. 길어야 2시간 반 정도의 시간 갭을 두고? 그리 길지 않은 시간 안에 곧 박꽃과 밤은 합류하는 것이지요.


둘, '하얗게 필 동안'을 다시 만개한 오후 6시부터 그 다음날 아침 5-7시까지의 그 긴 시간을 말하는 것이라면, 그 시간 내내 밤은 박꽃 옆에서 그녀를 지켜보며, 가끔 서로 조용조용 대화도 하며 그리 함께 보내는 것이지요. 멀리 떨어지지 않고 그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 그러니까 결국 박꽃과 밤은 비즈니스 파트너, 전략 공동체, 그렇게 운명의 공동체인 셈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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