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영역 밖으로 나가보기, 돌 들춰보기, 용감함. 윤동주 '자화상'
얼마 전 어느 브런치 작가님의 글 중에 '내게는 지금 어떤 조명이 비추고 있나' 이런 내용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아침 깊은 울림을 주는 참으로 좋은 글이었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내가 색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는 것도 문제지만 세상 사람들이 그들 나름의 색안경을 끼고 나를, 서로를 그렇게, 이 세상을 보는 것 또한 큰 문제라고. 더 큰 우려는 나는 지금 그들이 어떤 색안경을 쓰고 있는지를 결코 알 수 없다는 사실.
내게 비춰지는 조명에 따라 내 모습은 그때그때 달라진다. 사실 나는 그대로인데, 이전과 동일한 나임에도 그저 내게 비춰지는 조명의 색깔에 따라 나의 색과 내 모습은 확연히 다르게 보인다. 세상은 그렇게 그들에게 보여지는 모습의 나를 본다. 어떤 때는 나조차도 그렇게 '조명에 비춰진 나'를 본래의 나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그렇게 좌절하고 포기하고 주저앉는다. 쓰고 있는 색안경의 위험성, 조명이 가져오는 착시와 왜곡 그리고 의도적 변형.
요 며칠 아주 우연한 기회에 우리가 알고 있는 그 'G선상의 아리아'를 오랜만에 다시 듣게 되었다. 그리고는 탐구에 빠졌다. 거의 스무 개 버전을 들었다. 그리고는 깨달았다 - '아, 나는 아직도 여전히 우물안 개구리로 남아있구나. 이제는 우물 밖에 사는 줄 알았더니 지금도 그 좁은 우물 안에서 주야장천 그리 살고 있구나. 우물 안에 있음을 인식하지도 못한 채, 그렇게!'
이 양반이 오늘은 무슨 뜬금없는 얘기를 하려고 이러나, 그러실 분도 있을 것이다. 뻘쭘한 주제가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할 생각이다. 이해해 주시기를!
앙드레 가뇽의 뉴에이지 음악을 즐겨 듣던 때가 있었다. 출근 때 차 안에서 늘상 그 음악만을 듣던 때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메인 멜로디 주변에 서성거리는 사이드 디쉬들이 너무 많다는 생각을 했다. 훅 하고 소음처럼 다가온 순간이었다. 마치 폴 모리아의 음악을 듣는 그 느낌. 그저 맵기만 한 맛없는 짬뽕 같은, 여러 소리가 뒤섞인 그런 복잡한 소음의 세계라는 느낌이 내게로 왔다. 그 뒤 앙드레 가뇽의 그 음악들은 더 이상 듣지 않는다.
나는 단품의 음식을 좋아한다. 어릴 때는 비빔밥을 먹지 않았다. 도무지 무슨 음식을 먹고 있는 것인지 모를 만큼 이것저것 한데 섞인 것을 먹는 그 행위 자체가 싫었다. 물론 한참 뒤 충분히 나이가 들고 지금처럼 외국에 많이 거주하고 그러는 동안, 한번에 그 모든 아쉬움과 결핍을 싹 씻어주는 음식이 대한항공 기내의 비빔밥이었다. 그것 때문에라도 대한항공 노선이 있는 곳에서는 꼭 그 항공기를 탔다. 거기에 멀건 미역국 대신 컵라면을 곁들이면 최고였다. 당연 드라이 레드 와인 한 잔과 함께.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비빔밥 생각이 간절하다.
그러나 음악에서는 여전히 나는 이것저것 뒤섞인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담백하고 깔끔한, 그 색깔이 명확한 음악을 좋아한다. 하이든의 음악, 교향곡 (베토픈의 그것은 좀 다르다) 그런 것들은 그래서 자주 듣지 않는다. 명확하게 주장하고 내세우는 자기만의 색이 없는 듯한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뷔페 식당을 거의 가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뭐 딱히 뛰어나게 내세우는 것이 없다. 다 그저 그만그만한 것들의 집합.
오해는 마시라, 나는 그렇다는 것이니까. 그야말로 다 개인 취향 아닌가? 다른 분들의 취향과 선호는 충분히 존중하고 인정한다. '똘레랑스 (tolerance)'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만큼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의 생각도 똑같이 옳을 수 있음을 나는 인정한다. 서로가 서로의 존재와 가능성을 인정하는 상생, 공생, 너그러움의 세계관이다. 나는 옳지만 당신은 옳을 수 없다는 생각은, 결국 돌고 돌아서 나도 처음부터 옳을 가능성 자체가 부정되는 그런 논리와 현실의 명제다.
'바이올린의 G현 하나만으로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선율',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G선상의 아리아' (Air on the G string)다. 갑자기 여러 호기심과 궁금증이 내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왜 G현일까? 편곡자는 왜 굳이 하나의 현만으로 연주하라고 써놓은 것일까? 사람들은 왜 이 새로운 연주곡의 탄생에 관심을 가진 것일까? 하나의 현, 특히 G현으로 연주하면 어떤 차이점을 보이는 것일까? 그래서 원곡이 나을까 편곡 버전이 더 나은 것일까? 사람의 목소리로 부른 것은 없을까? 꼭 현악기로만 해야 하나, 피아노나 뭐 다른 악기가 연주한 것은 없을까?
하나, 이를테면 마케팅 전략의 성공이다. '분리해서 정복하라' 전략의 실행이기도 하다. 일단 이 부분에서는 편곡자는 뜻하지 않은 의외의 성공을 거둔 셈이다.
바흐가 작곡한 원래 이 곡의 정식 명칭은 '오케스트라를 위한 모음 춤곡' (Ochestral Suites)이다. 1번에서 4번까지 총 네 개가 있고 그 중 3번의 두번 째 곡 '에어 (Air)'를 독일의 바이올리니스트 아우구스트 빌헬미 (August Wihelmj)가 바이올린 독주곡으로 편곡한 것이다. 바흐의 원곡에서 이 부분은 현악기들의 합주로 연주된다.
그 큰 대작의 나무에서 딱 이 부분만을 따로 떼어낸 것이다. 당연 듣는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간다. 바흐 원곡은 다 들으려면 100분 가량 걸린다. 많은 사람들에게 길고 지루한 시간이 될 것이다. 3번만을 듣는다고 해도 20분이 넘는다. 3분에서 5분 가량인 대중가요나 팝과 비교하면 여전히 길다. 그런데 이 곡은 5분에서 길게 연주한다 해도 6분 정도다. 딱 좋다, 편하게 듣기에.
둘, 원래 이 부분은 현악기들의 합주다. 당연 섞인 소리가 들려온다. 바로크 시대의 고악기들과 고풍스러운 연주법으로 들으면 더욱 여러 소리들의 혼합이다. 사실 좀 애매한 소리다. 맑고 깨끗함과는 거리가 있다. 물론 클래식 전문가, 바흐 애호가들은 무릇 음악은 이래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람들의 듣는 귀는 저마다 다르다. 서로 다른 취향과 선호를 가지고 있다.
바이올린 솔로로 연주되는 편곡 버전은 그러니 명확하고 깨끗하고 깔끔한 소리로 다가온다. 피아노의 단순한 반주에 단독 바이올린의 그야말로 명징한 연주다.
셋, 하나의 현으로만 연주된다. 바이올린은 모두 네 개의 현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냥 현 하나로 5분의 이 곡을 끝낸다. 듣는 사람에 따라서는 너무 단순한 소리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또 어떤 이들에게는 그래서 더 단순하고 이해하기 쉬운 소리로 들린다. 악기가, 이 곡의 선율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그대로 전달되어 온다.
넷, G현은 바이올린의 네 개의 현 중에서 가장 굵고 낮은 소리를 내는 현이다. 그래서 곡에 차분하고 깊이 있는 음색을 더할 수 있었다. 그윽하고 서정적이고, 숭고한 느낌까지 준다. 사람의 마음을 안정시킨다, 차분하게 가라앉게 한다. 명상곡의 대표로 우뚝 서게 된 이유다.
다섯, 하나의 현, 그리고 그것도 G현, 이 두 가지 요소가 결합되어 또 다른 효과를 가져왔다. 평소 바이올린 연주에서 우리가 쉽게 들을 수 없었던 독특하고 감성 가득한 분위를 만들어냈다. 첼로가 주는 그 그윽한 느낌일 수도 있고, 비 내리는 음울한 날 오후 차 한 잔과 함께 듣는 내 마음의 위로곡일 수도 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다가왔다.
이것이 바흐라는 어마무시 대가의 곡 전체를 ('오케스트라를 위한 모음 춤곡 1번 - 4번'), 그리고 이 편곡된 5분의 짧은 곡을 둘 다 공히 'G선상의 아리아'라고 부르게 하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지금까지는 이 편곡 버전에 대한 칭찬이었다. 물론 편곡자에 대한 찬사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실 그의 이 편곡은 바흐 애호가들의 심한 비난과 혹평을 불러왔다. 그 옛날에도 그리고 오늘날까지. 원곡의 아름다움과 고상함, 사려 깊게 의도된 다양한 음색의 결합을 망가뜨려버렸다고.
나는 개인적으로 이들의 비판적 시각에 동조한다. 여러 번 여러 버전을 들어보니 그런 결론이 내게로 왔다.
G현 하나로 연주되는 이 선율은 이 곡의 아름다움을 많이 잃게 하고 있다. 내가 듣은 G현의 소리는 그리 아름다운 소리는 아니었다. 미운 바이올린 소리 그것이었다. 바이올린은 원래 화려함을 그 자랑으로 한다. 고음현의 그 맑고 고운 소리 (가장 높은 소리의 현 E현, 그 다음 A현)가 사라졌다.
여러분이 편곡 버전과 오리지널 버전을 들어보면 이내 제 얘기에 공감하실 것이다.
스무 개 정도의 버전을 여러 번 들어본 나의 평결은 이렇다. 당연 내 개인적 생각이다.
1) 영국의 지휘자이자 바이올린 연주자인 네빌 마리너 경 (Sir Neville Marriner)이 지휘하는 '아카데미 오브 세인트 마틴 인 더 필즈' (Academy of St Martin in the Fields)가 연주하는 바흐 오리지널 버전. 제 1 바이올린의 화려하고 밝은 음색, 다른 현악기들의 소리를 제치고 도전적으로 앞으로 튀어나오는 솔로 연주 같은 그 소리가 나는 참으로 좋았다.
2) 카라얀이 지휘한 베를린 필의 바흐 원곡 버전. 위 연주와의 차이점은 앞쪽으로 명쾌하게 튀어나오는 제 1 바이올린 소리가 별로 없고, 다른 현악기들과의 화합과 조화가 부드러운 소리를 낸다. 역시 카라얀 다운 요리법이다. 그가 지휘한 베를린 필의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 서곡'에서의 잔잔한, 파스텔톤의 느낌과 정확히 일치한다. 아무튼 이것 또한 내게는 아주 좋았다.
3) G현 하나만으로 연주되는 편곡 버전. 나는 별로였다. 피아노와 바이올린, 무겁고 단조로운 음색의 5분. 독일 연주가의 것도 들었고 정경화의 바이올린에 정명훈의 피아노 버전도 들어보았다. 연주자가 악기의 음색 자체의 제약과 한계를 넘기는 힘들다는 사실을 나는 확인할 수 있었다.
4) 오르간 버전도 들었다. 아니, 이 곡은 바이올린에 어울린다. 바흐가 그걸 몰랐겠나? 대가는 언제나 옳다, 적어도 자신의 음악에 관한 한은. 첼로 버전 역시 그리 아름다운 첼로의 진면목을 보여주지 못했다.
5) 정말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소년 합창단이 부른 버전이었다. 영국의 한 소년합창단 '리베라 (Libera)'가 부른 이 곡은 정말 천상의 소리가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해 주었다. 그 어떤 악기보다 사람의 목소리가 단연 최고의 악기라는 사실도 내게 알려주었다. 정말 좋았다, 꼭 한번 들어보시기를!
6) 편곡은 바이올린 뿐만 아니라 피아노 솔로 연주도 가능하게 만들었다. 나는 랑랑 (Lang Lang)이 연주하는 버전을 들었다. G현 단독 바이올린 연주보다 훨씬 좋았다. 살짝 재즈의 느낌도 나고 뉴에이지 음악을 듣는 기분도 들었다. 맑고 고운 피아노 소리 그 자체였다.
7) 바흐 원곡을 바흐 시대 바로크 올드 악가들로 바로크풍으로 연주한 버전도 들었다. 여러 소리가 뒤섞인 이런 화음을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맑고 고운 원곡 'Air'의 그 선율을 느낄 수 없었다. 바로크 악기에 의한 바로크풍 연주는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에서 그 빛을 발한다. 나는 그리 느낀다.
오늘의 시를 본다. 우리 모두 사랑하는 대가의 시다. 참으로 고운 시다. 오늘의 음악과도 잘 어울린다.
이제 나는 예전의 그 내가 아니라고, 자신 있게 그리고 조금은 호기 속에 그리 안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도 보지 않는 외딴곳에서 우물을 통해 가만히 나를 살펴보니 그게 아니다. 여전히 그 옛날의 작고 편협한 내 모습이 거기에 있다. 현재를 즐기려는 내가 있다.
당혹감과 부끄러움과 성난 감정 속에 서둘러 그곳을 떠난다, 더는 보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런 나에 대한 미움이 가득하다. 그런데 한참을 오다 보니 문득 그런 내가 불쌍해 보인다. 가여운 느낌이 들었다. 에고, 그래도 딴에는 한번 살아보려 저리 애를 쓰는구만!
내가 본 것이 맞나 다시 서둘러 우물로 돌아간다. 다시 들여다 본다. 그런데 여전히 나는 조금 전 내가 보았던 미운 그 그대로다. 다시 미워진다. 예전에 나를 그리도 사랑했던 어느 여인의 그때의 행동을 보는 듯하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애증의 시간적 반복.
또 다시 발길을 돌린다. 그런데 이번에는 가여움을 넘어 조금은,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 내가 그립다는 어리석은 순진함의 생각도 든다. 그래, 그때는 좋았지. 그때는 그래도 되는 시절이었지. 모든 것을 가진 듯하던 그때 그 시절, 나의 화양년화 - 꽃같이 아름다웠던 화려한 시간들.
지금의 상황과 기준에서 보니까 그렇지, 그때로서는 어쩌면 그것이 최선이고 최상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연민과 아쉬움과 그리움의 생각. 하지만 이미 지금은 그때가 아닌 것을 알고 있는 나. 이제는, 아니 이제라도 변해야 함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나, 그러니 그 변화를 손에 쥐려 무던히도 애를 쓴다.
이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돌아가면 안 되는 추억 속의 그때의 나의 모습. 그래, 그래도 그 사이 조금은 내가 변화되었구나 - 성장하고 발전하고, 보다 현실적인 삶의 생존자가 되어가고 있구나. 그러니 지난 시절의 내 모습은 '이미 이제는 추억'이라는 인식이 지금의 내게 드는 것이리라.
못난 나를 그래도 응원할 사람은 나밖에는 없다. 나는 그래야 한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다른 그 누구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아 한 사람 예외는 있다 - 사랑하는 귀하고 멋진 나의 아들!
# 오늘의 제 글은 많이 길군요. 제게 자주 올 기회가 아닌 듯하여 욕심을 낸 탓입니다. 아무쪼록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기를! 사실 그래서 궁여지책, 어제의 글은 아주 짧게 썼습니다. 혹시 눈치채신 분이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