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의 무상함, 그 끝 있음, 열심. 박노해 '내가 죽고 싶은 자리'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의 '죽음에 대한 묵상'은 참으로 깊고 그만큼 놀랍다. 하긴 삶에 대한 그의 관조와 통찰력 자체가 우리들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고 말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그의 소설 '레 미제라블'이 그렇고 '노트르담 드 파리'가 그렇다. 그의 수많은 시들이 그것을 말해준다. 4천 점이나 되는 그의 그림들도 죽음을 다룬 것들이 아주 많다. 그는 마치 동양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 강하게 나는 그런 수묵화 비슷한 독특한 그림들을 주로 그렸다. 얼마 전 뉴욕 화랑가의 큐레이터들이 그의 그림에 대한 분석과 평가를 하는 영상을 보았다. 좋았다.
그는 아주 오래 살았다. 아내도 그보다 먼저 죽었고 반세기 동안 그 관계가 계속된 사랑하는 연인도 그보다 일찍 죽었다. 다섯 자식 중 넷이 그보다 먼저 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83세의 나이에 생을 마감했고 팡떼옹에 묻혀있다. 정신질환으로 고생한 막내 딸 하나만이 그보다 오래 살았다.
소련의 잔혹한 독재자 스탈린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주가슈빌리)도 오래 살았다. 두 아들의 삶을 합한 것만큼이나 살았다. 그가 오래 산 것이고 그의 두 아들이 그만큼 짧게 산 것이다. 그는 74세에 죽었다.
첫 아내와의 사이에서 얻은 큰아들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스탈린의 아들인 것을 안 독일군이 포로교환을 요청했으나 스탈린은 매정하게 거부했다. 포로로 잡힌 것 자체가 반역이라는, 아들 가슴에 비수를 꽂는 그 다운 잔인한 말과 함께. 결국 큰아들은 포로수용소 전기담장에 몸을 던져 죽었다. 그의 나이 36살이었다.
두 번째 아내에게서 얻은 아들은 방탕한 생활을 했다. 무소불위 아버지 권력의 정점의 시기였다. 스탈린이 죽고 그가 재평가를 받고 냉대를 받던 시기, 그 아들에게도 당연 힘든 시기가 찾아왔다. 알콜중독으로 41살의 나이에 죽었다. 두 아들이 산 삶을 합해도 겨우 77년이다.
빅토르 위고의 장수에서 나는 나름의 아름다움을 본다. 그러나 스탈린의 오래 산 삶에서는 그저 역겨움과 혐오감을 느낄 뿐이다. 오래다 아니면 짧다는 모두 상대적인 개념이다. 얼마나 오래보다는 얼마나 가치 있고 의미 있게, 그리고 우아하게 살았느냐가 더욱 중요하다. 짧아도 충분히 고고하고 멋진 삶이 있고, 설사 절대량으로는 아주 길어도 그저 추한 인생이 있다.
며칠 전 그날도 내가 머물고 있는 이 나라 이 도시에서 아침 산책을 하고 있었다. 형형색색 화려한 장식과 긴 행렬의 장례 차량들을 보았다. 마침 이날은 이 나라가 90년 전 프랑스의 오랜 식민지배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한 독립기념일이었다. 그로부터 24년 후 이 나라에서 국부로 추앙받는, 그 독립선언을 한 인물이 사망한 날이기도 하다. 우연치고는 참으로 묘하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우연이 아니라, 바위도 뚫는 낙숫물처럼 강한 인간 의지의 무서움의 영향 아닐까 그런 생각도 해본다.
우리나라에서는 지금은 보기 힘든 그런 장례행렬을 이곳에서는 요즘도 자주 본다. 그럴 때면 뜬금없이 삶에 대한 기쁨을 나는 느낀다. 살아가는 것에 대한 여전한 희망도 본다. 살아있음이 기쁘다거나,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내 어릴 적 어머니의 말씀 때문이 아니다. 내가 삶에 대한 희망과 기쁨을 느끼는 이유는 다른 곳에 있다.
하나, 삶의 무상함을 정말 리얼하게 느끼는 생생한 체험의 장이다. 저 망자가 지금 앞에서 리드하는 차가 메르세이데스인지 아니면 이곳 로컬 브랜드의 허름한 차인지 어찌 알겠는가? 안들 뭐가 달라지겠나? 그저 허망함이다. 끝은 그냥 끝일 뿐이다. 아등바등 그리 가슴 졸이고 안달할 것 없다는 쉽게 잊을 수 없는 깨달음을 얻는다, 이곳 남의 나라에서.
둘, 아, 끝은 있구나 하는 그 증거의 현장을 목도함에서 오는 편안함이다. 저 망자가 살아서 어떤 화려한 삶을 살았는지 나는 모른다. 그렇지 않았을 수도 물론 있다. 그게 지금 이 순간 그에게, 그리고 남아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무엇보다 그를 알지 못하는 나 같은 많은 사람들에게 무슨 의미나 가치가 있는가? 낫씽 (Nothing)!
셋, 여전히 몸도 꼿꼿, 정신도 꼿꼿, 마음도 영혼도 꼿꼿한 나의 현재 상태가 나를 기쁘게 한다. 그러니 저 망자처럼 신이 혹은 자연이 나를 데려가는 그 순간까지, 그저 열심히 살면 될 일이다 하는 뻔한 깨달음이 나를 또 한 번 강화시킨다. 그래서 좋다.
아들 녀석 어릴 때 내가 늘 그에게 한 말이 있다 - 한 번 외서 잊으면 또 외면 된다. 또 잊으면 또 외면 된다. 그것을 여섯 번까지 했는데 그럼에도 또 잊었다? 그러면 외는 것은 그만 포기해라. 굳이 머리가 나쁘다고 자조하지는 말자. 다만 '나는 외는 데는 별 재주가 없구나!' 그리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일찌감치 다른 길을 찾자. 인생에 길은 많고도 많다. 그 뒤 아들 녀석이 내게 '다른 길' 얘기를 꺼낸 것을 들은 기억이 없으니, 다행히 그는 그 여섯 번의 기회 안에 다 왼 것 같다는 짐작을 할 뿐이다.
자꾸 내게 기억시켜야 한다, 수시로 여러 방식으로. 끝은 있다/끝은 끝이다, 그 뒤는 없다 일단은 이승에서는/그 끝의 순간까지 최대한 건강한 몸과 더 건강한 마음과 영혼 속에 살면 된다/내가 신경써야 하는 것은 오직 그것이다, 뭐 이런 것들에 대한 세뇌 수준의 되풀이와 각인!
넷, 저 사람들처럼 많은 이들은 아니겠으나 그리고 저런 화려하고 성대한 장례의 이벤트는 당연 없겠지만, 그럼에도 '나의 당당한 끝' (아니면, 분명 당당하고 고고했을 것이라는 그런 끝의 짐작)을 기억하고 마음에 품고, 잠시 조금은 진심으로 슬퍼할 사람이 하나는 있으니 그것이 나를 흐뭇하게 한다. 그러면 되었다!
다섯, 내가 지금 가진 것, 누리고 있는 것이 결코 작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의 확인. 그 과정에서 오는 마음의 평화의 영혼의 평온. 우리네 사는 세상 다 거기서 거기라는 그 단순하고 평범한 사실을, 이런 생과 사의 이벤트에서 새삼 실감하게 된다. 뒤따르는 모토바이크의 행렬보다는 차량이 더 많은 것으로 보아 어디 멀리까지 가나보다. 선산에 묻힐까? 이곳에서도 보다 간편한 절차를 따르는 것이 보편화되었을까? 이들의 전통과 문화를 볼 때 아직은 아니겠지? 이들에게도 그 옛날에는 묘소 앞의 초막과 그곳에서의 3년이라는 관습이 있었을까? 뭐 이런 산 자의, 그리고 단순 관찰자의 여유로운 호기심이 나를 담담하게 한다.
이제 시를 본다.
오늘 나의 이 글에 딱 맞는 시가 있다. 얼마 전 내가 번역해서 소개한 빅토르 위고의 시 '삶 속의 죽음 (Death, in Life)'이다. 하지만 이미 여러분들에게 선을 보였으니. 그래서 고른 시가 이것이다.
깊고 깊은 묵상과 사유를 실천하는 시인, 참으로 열심히 이 세상을 살아온 분. 매 순간을 늘 최선을 다해 ('fully' - 시인 자신이 어느 다른 글에서 말한 표현 그대로. 나의 최대치를 다해서 그렇게 열심히, 그렇게 최선을 다해, 그렇게 마지막 한방울의 열정까지 다 쏟아내며, 그렇게 '완전히') 살아가고 있는 선한 영혼의 사람!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하루하루 살아간다'는 사실 정확한 표현이 아니라는 말로 시인은 용감하게 시를 시작한다. '실은 하루하루 죽어가는 것'이라고. 대담한 도전이다, 시작부터 우리 모두에게. 하지만 우리 모두 시인의 그 말이 맞는 것임을 안다.
죽음을 향해 걷고 있는 우리. 그러니 그동안 우리가 늘 기억해야 할 것, 그렇게 힘써야 할 것은 오직 이런 것이라고 - 나는 무엇을 하다가 죽고 싶었는가 (적어도)/나는 누구의 곁에서 죽고 싶었는가 (가능한 한).
살짝 거꾸로 그것들을 살피면 바로 이런 말 - 내가 (그렇게 살다가) 죽고 싶은 자리가 내가 (그렇게, 꼭 그렇게, 적어도 그렇게) 살고 싶은 자리라는 것.
그러니 지금 내가 그런 삶을 살고 있는가를 늘 살피고 그리 살려고 애쓸 일이다, 시인은 오늘도 이리 통찰력 가득한 질문과 해법을 우리 모두에게 던지고 있다. 고마운 일이다! 노동운동가로만 기억할 인물이 결코 아니다 이 시인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