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의 실체, 따뜻한 영혼, 긍지와 믿음. 쭈께로 '미제레레'
가을이 깊어가는 어느 날 초저녁 무렵, 내리는 비는 더욱 늦가을의 쌀쌀함을 느끼게 했다. 마음을 굳게 먹고 발길을 돌렸다가 다시 되돌아가고, 또 돌아섰다가는 이내 다시 돌아가고 몇 번을 반복한다. "아니 그래도 저렇게 둘 수는 없지. 그럴 수는 없는 거야 암. 친구 사는 작은 공간, 그 어느 한구석을 비집고 저렇게? 그건 아니야!"
그렇게 나는 나의 마음을 돌렸다. 그날 그 순간이 그 후의 나의 모든 것을 바꾸어놓았다. 작금의 나의 궁핍과 결핍 또한 그것과 끈이 닿아있다. 하지만 후회는 하지 않는다. 그때 내 판단과 결정은 나의 선함과 의로움의 의지에 따른 것이었다. 나의 순수한 젊음이 내게 지시하고 명령한 것이었다. 사실 세상의 중요한 많은 것들은, 결국에는 더 나은 방향으로의 진화로 이어진 그 모든 것들은 그런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진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리 믿는다.
맹자의 사단칠정 중 나는 유독 '측은지심'에 마음이 기운다. 어려서부터 그랬다. '아끼고 어여삐 여기는 마음', 내가 늘 마음으로 나의 영혼 속에서 되뇌이고 다짐하는 내 삶의 핵심 모토의 하나다. 불쌍하다와 불쌍하게 여긴다는 크게 다르다는 생각을 나는 한다. 우선 썰렁하게 말하자면 하나는 형용사이고 또 하나는 동사다.
'불쌍하다'는 그저 누군가의 처지가 딱하고 애처롭다는 관찰적 상태를 나타낸다. 그냥 그것이다. 반면 '불쌍하게 여기다'에는 내가 직접 개입한다. 그 상태를 보고 내가 안타깝게 여기는 행위를 나타내는 동사구다.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다음 질문, '그래서? 어쩔건데?' 내게 즉각 어떤 가시적인 행동을 요구한다. 내 눈에 관찰된 하나의 객관적 상황이 이제는 내게 나의 주관적 개입과 현실적인 행동을 원하는 것이다.
물론 판단과 결정은 전적으로 나의 것이다. 이런 경우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다. '뭐 어쩌겠나? 가난은 나라님도 어찌할 수 없다고 했거늘! 내가 나라님도 아니고 빌 게이츠도 아니고, 일론 머스크도 아닌 것을.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오호통재라!'
그러나 어떤 경우에 어떤 사람은 무엇인가를 한다. 그것이, 그 작은 행동 하나가 세대를 통해 이어지고 세월 속에 쌓여서 소위 진화와 진보라는 것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오랜 나의 일상 속 믿음이다. 이런 믿음과 가치 속에 나는 살아왔다.
나는 감히 이것이 사랑이라고 믿는다. 남녀간의 사랑의 원초적 모습도 결국은 이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부모자식 간의 사랑에도 그 바탕에는 이런 감정이 깔려있다. 그저 불쌍하지 않은가? 저 멀리 타국에서 혼자, 살아보려 저리 아등바등 애쓰는 모습이? 나 아닌 다른 사람을 부모로 만났으면 조금은 더 좋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도 들고!
내게는 그저 가슴 아픈 그 어느 상대방도 마찬가지다. '그 사람 인생도 알고 보면 불쌍함의 연속이지. 좀 더 행복했으면 좋았을 것을! 하지만 뭐 어쩌겠나, 본인이 자신의 의사로 선택하고 결정한 것을? 그저 잘 살기를 바랄 수밖에. 내가 기원이나 간구까지 할 수는 없을 것 같고. 그냥 좋은 마음을 가지는 것밖에는.'
오래전 돌아가신 어머니, 두 분도 아닌 단 한 분뿐인 고마운 나의 어머니, 불쌍하지 않은가, 마음 아프지 않은가? 이 세상에서 많은 것들을 즐기고 가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가 많은 것들을 당신께 드렸으면 얼마나 좋았겠나? 얼마나 애뜻하고 얼마나 사랑하는 마음을 나에 대해 품고 다른 세상으로 가셨겠나?
혹시 다시 태어나면 (그럴 일은 절대로 없지만 아무튼) 신부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표현한 적이 있다. 물론 그때는 금전적으로는 충분한 여유가 없을 것이니 화려하고 맛있는 많은 것들을 드리지는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분에게 드리는 나의 따뜻한 마음과 다정함, 눈에 명확하게 보이고 귀에 들리고 느껴지는 내 사랑은 적어도 그때는 그 누구도 방해하거나 막지는 못할 것이니!
내가 좋아하는 가수 조하문의 노래 '내 아픔 아시는 당신께'를 이 아침 그분과 함께 듣는다. 나의 이 못 드린 사랑의 마음을 가득 담아 그렇게!
"내 아픔 아시는 당신께 내 모든 사랑 드려요
이 눈물 보시는 당신에게 내 마음 드려요"
누군가를, 혹은 어떤 존재를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은 결과적으로 내게도 그 긍정적 결과가 그대로 돌아온다. 우선 내 마음이 편안해진다. 따뜻해지고 더욱 선해지는 나를 느낀다. 그런 긍정의 힘이 다시 나를 움직이게 한다. 나의 존재 가치, 나에 대한 자긍심을 일깨운다. '그래, 나는 여전히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할 의미와 가치가 있는 존재다. 아니 자격이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 긍지를 느낀다, 이 순간!' 중요한 깨달음이고 귀한 자극제이다.
타인을 위해 선을 쌓는 것이 아니다. 나를 위한 것이다. 내 자손을 위한 것일 수도 있다. 누구에게 보여주려는 것은 더욱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내가 나의 마음과 영혼에 실은 그런 따뜻함은 타인의 눈에는 쉽게 보이지 않는다. 혹시 모른다, 늘 우주 만물의 모든 것을 보고 있는 신과 섭리와, 그리고 스피노자의 대자연만은 이번에도 그 모든 것을 다 보고 기억하고 있을지. 그렇다면 그 또한 굳이 나쁜 일은 아니다. 후일 작은 사탕 하나라도 내게 더 주시지 않겠나? 그러면 좋은 것 아닌가?
오늘의 시를 본다. '미제레레' (Have mercy, 자비를 보이소서)라는 아름다운 곡이다. 가사는 더욱 깊고 절실하다. 많은 묵상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이태리의 싱어송라이터 쭈께로가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를 염두에 두고 작곡했다. 같은 제목을 가진 그레고리오 알레그리 (Gregorio Allegri)라는 16세기 이탈리아 작곡가가 작곡한 곡이 있다. 영국 케임브리지의 그 유명한 소년합창단 킹스 칼리지 콰이어가 부른 버전을 나는 즐겨 듣는다.
쭈께로의 이 곡, 나는 특히 그 가사를 좋아한다. 좋은 영어본을 여러 번을 찾아보며 힘써 우리말로 옮긴 이유다. 여러분도 상미하시기를!
미제레레 (Miserere)
- 쭈께로
자비를 베푸소서,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자비를, 부디 제게,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나의 지금의 삶에 건배를 합니다!
내 삶은 얼마나 미스테리인가, 불명확하고 애매하고 이해조차 할 수 없는,
이 미스테리, 사실 나는 8만 년의 죄인이지요, 거짓말장이이구요!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인가? 나는 무엇을 하고 있나?
나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 것이지?
나는 여전히 이 세상의 영혼 속에 살고 있지요, 삶의 심연 속에서
나 자신을 잃어버린 채 그렇게!
자비를 베푸소서 불쌍한 제게,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서도 나는 여전히 속세의 나의 삶에
건배를 합니다, 그게 나입니다!
나는 당신이 외로이 홀로 있을 때 당신을 배반한 성자입니다, 아니 성인인 채 하는 놈입니다,
나는 늘 어딘가 다른 곳에서 살고 있지요, 하늘 저 높은 곳에서 이 세상을 바라보고 관찰하면서,
네, 나는 그저 지긋이 바다를 보고 숲을 보고 나 자신을 봅니다...
이 현세의 영혼 속에 살면서, 삶의 심연 속에서 길을 잃은 채 그렇게!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 이 가련한 제게,
그러면서도 저는 아직도 이 삶에 건배를 한다니까요?
저를 숨겨주기에 충분히 어두운 그런 밤이 있다면, 나를 숨겨줄,
아니 빛이 있다면, 한줄기 희망이 있다면 - 내 안에서 여전히 빛나는 장대한 태양이 있다면 -
부디 제게 삶의 기쁨과 환희를 주소서,
하지만 아마도 여기 이 세상에는 없는 것 같아요, 지금은,
아직은 없고 앞으로도 영영 없을지도 모르지요.
자비를 베푸소서, 제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어쩌면 여기 이 세상에는 없을 것 같은
그 삶의 기쁨과 환희를!
<우리말 번역 - 가을에 내리는 눈, 영어 번역본을 바탕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