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끌 모아 태산은 가능하다, 오늘이 나의 100번째 글

- 시간의 힘, 축적의 힘, 눈덩이 효과. 김정원 '아름다운 편견'

by 가을에 내리는 눈

아들 녀석이 아주 어릴 때 제 엄마가 하얀 사기 그릇에 개미 몇 마리를 담아주면 몇 시간을 그것을 보며 놀았다. 늘 곤충을 좋아했다. 여름에는 잠자리채 둘러메고 아파트 내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한동안은 사슴벌레 키우기에 빠져있었다. 그때 나도 사슴벌레의 세계에 대해 좀 알게 되었다. 어떤 것은 성충 한 마리에 무려 30만 원이나 하는 것도 있었다. 신비한 푸른 빛깔과 노란색이 섞여있는 말레이지아산이었다. 구입 며칠 만에 죽었다. 어른인, 명색이 애호가라는 사람이 어린아이에게 그런 것을 판 것이다. 물론 내가 동행한 자리지만 나는 전혀 그쪽 분야를 모르는 문외한이었으니.


그 녀석이 영국에서 프라이머리 스쿨을 다닐 때 집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곤충동물원에 갔다. 알고 지내던 영국인 노부부 (그들의 이름이 지금도 기억난다, 진 할머니, 레너드 할아버지. 내 아들 놈을 많이 예뻐해 주셨다)가 데리고 간 곳이었다. 한쪽에서 개미의 세계가 화려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벌떼보다 더한 그 '장엄한' 개미들의 일하는 모습, 꼬리에 꼬리를 물고 쉼 없이 움직이는 그들, 큰 잎사귀를 자기 덩치 세 배정도의 크기로 자기가 직접 잘라내어 등에 지고 간다. 그들의 그 작업은 그렇게 계속되고 있었다. 아들과의 좋은 추억 한 장면이 오늘 이렇게 소환되었다.


4개월 전쯤 브런치스토리 나의 첫 글이 나왔다. 시간이 지나도 구독자는 한 자리 수에 머물렀다. 최소 30명이 되어야 무슨 자격이 주어진다는 공지사항을 보았다. 어이쿠, 어느 세월에 구독자 30명? 그런데 어느덧 그 숫자를 훨씬 넘어섰다. 내가 발행한 글의 수도 오늘로 딱 100개째다. 개인적으로는 느끼는 것이 참 많다. 문득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우리네 오랜 속담이 생각난다.


정말 살아보니 그랬다. 복리효과 (컴파운딩, compounding effect)의 무서움과 신기함, 기적같은 그 힘을 알게 되었다. 눈덩이 효과라고도 우리는 일상적으로 부른다. 종잣돈의 필요성과 그 대단한 역할도 연관이 된다. 일단은 시작을 해야 한다는 삶의 진리가 그대로 다가온다.


젊을 때 내가 푹 빠져서 여러 번을 읽은 투자계의 전설 워런 버핏 (Warren Edward Buffet)의 두 권짜리 두꺼운 전기의 이름이 '눈덩이 (Snow Ball)'였다. 흔히 '오마하의 현인'이라고 부른다. 그의 고향이 미국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이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거주하며 투자회사 버크셔 해서웨이를 설립, 운영하고 있다. 1930년생이시니 올해 95세다.


그 오랜 세월 매일,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그 어떤 날도 변함이 없이 그의 점심은 레어로 익힌 붉은 빛깔 스테이크와 콜라 한 캔이다. 지금도 그런가? 아미 그럴 것이다 그 양반이라면! 그러니 그런 대단한 성과를 그 오랜 시간 꾸준히 내고 있는 것이리라. 끈기, 집중력, 원칙의 고수, 기초 자료의 수집에서부터 시작하는 어쩌면 지극히 단순한 그의 투자 실행의 과정, 전문가의 의미와 가치를 아는 사람, 그래서 필요할 때 언제라도 그들의 조언에 귀 기울이는 열린 마음의 존재...


물 한 방울은 약 천억 개의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원자나 분자는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지만, 수많은 원자와 분자가 결합되면 우리 눈에 보이는 물방울이 되는 것이다. 단순하지만 심오한 뜻을 담고 있다.


물론 티끌을 모아 태산이 되게 하려면, 그저 상징적인 의미로 이 말을 사용하는 것이기는 해도, 또한 실제로 우리가 이루려는 그 무엇이 굳이 '태산'의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당연 많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무릇 그냥 되는 것은 없다.


하나, 우선 그 티끌들을 꾸준히 모으는 데 필요한 시간이다. 한 달 두 달이 아니고 일 년 이년도 아니다. 십 년 이십 년의 긴 시간이 우리에게 요구된다. 그 시간을 이겨낼 자신이 있어야 한다. 예전에 읽은 책에 '만 시간의 법칙'이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무언가를 이루려면 적어도 만 시간 정도의 끈질긴 노력의 투입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 예로 비틀즈를 들고 있다. 그들이 유명해지기 전 그 많은 시간을 동네 작은 카페에서 이름 없는 밴드로 지내야 했던 에피소드를.


만 시간? 하루에 다섯 시간씩 일년 365일 하루도 빼먹지 않고 하면 5년 하고도 반이 걸린다. 하루에 세 시간씩 공을 들인다면 9년이 조금 더 걸린다. 하루에 매일 3시간, 결코 녹녹지 않은 일이다.


둘, 그 다음 내가 생각하는 필요 요건은 얼마나 열심히, 얼마나 몸과 마음을 다해서 하느냐이다. 그 진실성과 간절함이다. 십 년을 어떤 일을 하며 보낸들 그 하루하루가 최선을 다한 것이 아니라면, 그 십 년은 그냥 의미 없고 가치 없는 하루하루의 총합으로 남을 뿐이다. 허무한 '도로'다. 그저 그 세월이 아깝다. 어차피 보낼 십 년이라면 좀 뭔가 다르게 보내야 하지 않겠나?


셋, 절대적 시간과 상대적인 열심, 그를 통해 결국 우리가 무언가를 이룰 가능성이 큰 이유는 이런 측면도 있다. 우리가 모으는 것이 티끌은 아니다. 그것보다도 훨씬 크고 의미 있는 무언가를 우리는 모은다. 아주 열심히 모은다, 자기 몸의 세 배 크기의 싱싱한 나뭇잎을 등에 지고 가는 개미들처럼 그렇게.


또 우리가 이루려는 그 무엇이 태산은 아니다. 그것보다는 훨씬 더 현실적인 그 무엇이다. 훨씬 작다. 티끌보다는 훨씬 큰 꾸준한 인풋을 통해 태산보다는 훨씬 작은 그 무엇을 이루려는 우리들, 그러니 당연 그 성사의 확률 또한 크지 않겠나?


구독자 30명을 '어느 세월에?' 하고 한숨 쉬던 나, 그런데 어느덧 200명 가까이! 조심스럽게 첫 글을 발행하던 네 달 전 그날, 그런데 오늘 벌써 그 100번째의 글! 발행된 브런치북이 이미 다섯! 시와 함께 하는 에세이/묵상과 시, 그 사유의 흔적들/시와 동무하는 내 일상 속 개똥철학/시 속에서 삶을 철학하다/시와 사유, 풍요로운 나의 일상.


글에서 내가 소개한 시가 100편 (정확하게는 102편이다, 한 글에서 두 개의 시를 소개한 적이 두 번 있으니까. 아들 녀석이 내게 지어준 귀한 시 두 편이 있고, 내가 쓴 시 같지 않은 시 두 편도 있다)이다.


편당 최소 열 번은 읽었을 것이니 천 번 넘게 시를 읽은 것이다. 내가 번역해서 소개한 외국 시도 30편 정도는 될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내게는 참으로 뿌듯한 만족이다. <이런 자랑은 허락하실 것이다!>


티끌보다는 조금 큰 그 무엇을 모아가자, 꾸준히 모아보자. 1만 시간까지는 아니더라도 충분히 많은 시간, 긴 시간, 오랜 시간을 투여하자. 무엇보다 '열심'이 중요하다. 흘러간 시간들이 아깝지 않게, 그저 도로가 되지 않도록 그렇게.


그리고 태산을 바라지는 말자. 사실 그렇게 큰 것 뭐 어디에다 쓸 것인가? 그냥 적당한 사이즈, 내게 조금은 더 큰 일상의 기쁨과 즐거움을 가져다 줄 그 무엇, 그 정도로 만족하자. 그렇게 타협하자.


아인슈타인-로젠 브리지 ('ER Bridge')라고 불리우는 '웜홀' (Wormhole)의 이론적 기초가 바로 그것 아닌가? 한쪽은 저 아래로 쑥 들어가고 그 반대편은 또 쑥 올라오고, 그래서 그 두 지점 사이의 실질적 이동거리가 엄청 줄어든다는 것, 그것 아닌가? 그래서 빛의 속도보다도 빠르게 (결과론적으로는) 그 먼 거리를 통과할 수 있는 것이라고? 양자역학에서 이미 과학적으로 입증된 이론이다. 한 양자가 엄청나게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양자에게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그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이유! 이런 식의 거리의 단축!


티끌 모아 태산은 충분히 가능하다! 브런치 작가님들의 여러 글에서도 나는 이미 확인했다. 나는 오늘도 이 말을 믿으며 그렇게 나의 고단한 일상을 살아간다, 살아낸다! 희망이 있으니까, 내가 원하는 것이 태산은 아니니까, 무엇보다 티끌보다는 많이 큰 것을 내가 열심히 투입하고 있으니까!


오늘의 시를 본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 자동차를 모는 사람보다 '더 크다'는 편견을 자기는 가지고 있다면서 시인은 시를 시작한다. 자신의 두 발의 힘으로 자전거를 굴러가게 한다고 하는 말일 것이다. 이 또한 '그 거대한 티끌'의 시작일까?


이미 그 자체로 자본주의를 넘어선 이 지구 주인으로서의 당당한 존재라고. 반면 자동차를 모는 사람은 자본주의에 엎드린 노예라는 편견도 자신은 가지고 있노라고, 소리 높여 아니 조금은 자랑스러운 듯 그리 말한다.


네 발 남의 힘으로 가는 사람 (자동차, 휘발유), 두 발 자기 힘으로 가는 사람, 과연 누가 더 진화했고 누가 더 위대하냐고 따지듯 묻는다. 이 대목에서 나는 쉽게 대답을 하지 못 한다. 진화는 과학의 영역이고 위대함의 여부는 우리네 감성의 세계에 속하는 것이니까. 반 반이라고 답할까, 살짝 비겁하게?


나 어릴 때 처음 자전거 타는 것을 배우던 때가 기억난다. 발의 복숭아뼈도 몇 번 까졌다. 그러고는 어느 순간 홀로 달린다. 뒤에서 잡아주던 형이 이미 한참 전에 그 손을 놓은 것도 모른 채.


자전거가 넘어질 때 (두려움 없이, 아무런 회의나 망설임 없이) 그 쓰러지려는 방향으로 과감하게 핸들을 돌려야 한다는 것을 일찌기 깨달은 그 자전거 타는 사람을 시인은 칭찬한다. 오만과 편견 속에, 그리고 짧은 지식과 습관에 찌들은 섣부른 판단 속에, 넘어지려는 반대쪽으로 핸들을 꺾으면 금새 넘어진다는 것을 아는 그를 치켜세운다.


자신의 일상 속에서 늘 자전거를 타는 농부가 (번지르하게 광이 나는 마이바흐 뒷좌석에 앉아 그렇게 길을 가고 있는) 대기업 회장보다 더 크다는 편견을 자신은 지금도 여전히 가지고 있다는 시인. 자신의 그런 편견은 아름다운 편견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그런 티끌이 언젠가는 이 세상을 바꿀 것이라고? 우리 사는 이 세상은 그런 작은, 아니 작게 보이는 큰 존재들로 인해 굴러가는 것이라고?


시인의 이런 '여전히 순수한' 사고가 부럽다. 세파에 시달리고 그렇게 이미 많이 닳은 나로서는 결코 쉽지 않은 판단의 한 끝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아니 지금은 오히려 더 물질적 금전적 풍요와 풍부가 내게 와닿는 그런 속세적 일상을 살고 있는 나라서 그렇다.


그럼에도 티끌 모아 태산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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