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산하는 방랑, 파괴하는 방황. 예이츠 '방랑자 앵거스의 노래'
영국에는 '갭 이어' (Gap Year)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에서 첫 학기를 시작하기 전까지의 7-9개월의 기간 중에 미리 사회경험을 위해 단기로 일을 하거나, 자신의 미래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그 큰 방향을 굳히기 위한 긴 여행을 하는 시간을 말합니다. 시간의 간격, 틈, 공백, 잠깐 끊긴 그 사이, 빈 곳... 그런 갭의 시간, 갭의 해이지요.
보통 1월이면 대학교도 정해지고 고등학교 졸업도 끝났고, 그런데 가을 8-10월 대학 입학 전까지는 여전히 긴 공백이 있지요. 이 시간을 실용적, 실무적 목적으로 적극 활용하는 것이지요. 어떤 학생들은 아예 대학의 입학을 1년 유예하고 이런 시간을 갖는 경우도 있습니다. 과연 그들 다운 사려 깊은 생각이고 과감한 실천 계획입니다. 저는 옛날부터 늘, 참 대단한 사람들이다 그리 생각했습니다.
어디 다른 곳에서는 '고등학교 졸업 후 실용적, 직업적, 개인적 사고와 경험, 인식을 깊게 할 목적으로 갖는 경험 학습의 시간'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특히 독일의 경우에는 전통적으로 실무 기술의 습득을 중시하기 때문에 예로부터 일정한 나이가 되면 (고등학교 졸업 무렵) 이제 사회에 직접 뛰어들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장인의 기술을 배우고 익히는 도제생활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요.
슈베르트의 연가곡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는 바로 이런 배경에서 일어나는 일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반더른' (wandern)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와요. '산책하다/하이킹하다/방랑하다' 이런 뜻으로 쓰이는 독일어입니다. 영어의 원더 (wander)입니다.
우리말의 단어가 가져오는 혼동 혹은 혼돈이 가끔 있습니다. 같은 발음의 한자어 때문이기도 하구요. 여기 '방랑'과 '방황'이 그 예입니다. 오늘의 글은 이 두 단어를 중심으로 끌어가겠습니다. 우선 제 나름 두 단어를 해석합니다.
방랑 (放浪) - 자유로운 생각 속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것. 구속이나 얽매임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떠도는 것. 놓을 방 (놓다/석방하다/놓이다/석방되다), 물결 랑 (떠돌아다니다/유랑하다/함부로/마구) - 이제야 비로소 '놓인 상태, 놓여진 상황'이 되었으니 모든 것 훌훌 털고 자유롭게, 그야말로 자유로운 영혼 속에 물결처럼 나 가고 싶은 곳으로 가보는 것.
방황 (彷徨) -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어정거리며 헤매는 상태. 심리적인 혼란이나 막막함의 상태를 표현. 갈피를 잡지 못하고 혼란스러워 하는 심리. 어정거릴 방 (어정거리다/배회하다/헤매다), 노닐 황 (노닐다/헤매다) - 꼭 공간적 장소적으로 이곳저곳을 헤맬 필요는 없다. 한 곳에 있더라도 도무지 마음을 잡지 못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고, 그런 상황이 오래 일상적으로 계속된다.
방랑, 여전히 우리 머릿속에는 그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지만 (그동안의 언어 습관과 사회적 인식의 부작용이다) 사실 방랑은 대단히 긍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생산적이다, 창조적인 활동의 시작이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열정적인 탐험이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돌아다니는 것은 아니다. 혹시 뚜렷한 목적이나 목표가 없이 다니는 것이라면 그 또한 당장은 좀 쉬면서 가까운 미래를 계획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러니 그런 경우에도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돌아만 다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대개는 새로운 기회의 모색 혹은 미래 방향의 설정을 위한 경우가 많다. 물론 서구에서는 비교적 보다 뚜렷하고 구체적인 목적을 가지고 여러 곳을 다니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이미 언급한 특정 기술의 습득 또는 그저 다양한 경험을 위해서.
이렇게 그들의 생활 깊은 곳에 자리잡은 방랑의 문화, 그리고 그 철저한 실천은 그들의 기본적 인성과 경쟁력의 형성에는 물론이고 그들 나라의 운명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우리가 미국 사회를 개척자 정신/탐험의 본능/프런티어십 이런 말로 묘사할 때 결국은 그들의 이런 방랑의 문화를 지칭하는 것이다.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과 실효적 지배 (지금의 미국인들 그리고 캐나다), 남미 대륙의 지배 (잉카문명의 멸망, 페루의 오늘날의 모습의 원인), 아시아와 아프리카 여러 나라들에 대한 식민지배... 이 모든 것들이 서구인들의 '이런' 방랑의 문화에서 출발한 것이라면?
우리에게는 어느 한 곳에의 정착이 정상이다. 선대로부터 애써 일궈놓은 논이 있고 밭이 있고, 고착된 집이 있다. 다른 곳을 '떠돈다' (이 말 자체에서 벌써 부정적 인식과 비정상이라는 판단과 적대적 자세가 가득 느껴진다)는 것은 뭔가 큰 문제가 있는 사람이나 하는 '짓'이다.
늘 새로운 목초지를 찾아 지속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유목 사회의 사람들. 그들에게 어느 한 곳에의 정착은 삶의 포기 그리고 죽음을 의미한다. 그들에게는 여기저기 때가 되면 돌아다니는 것이 정상이다, 삶의 기본 공식이었다.
그러니 남자 아이가 어느 정도의 나이가 되면 집을 떠나 새로운 곳을 찾는 '탐험'의 여정을 시작하는 것이 그들의 루틴이고 과제이고 사명이었다. 빈 손으로 떠나서 풍요로운 새로운 공간을 찾은 후 자랑스럽게 집으로 돌아오는 일. 혹은 양 몇 마리를 몰고 그런 탐험의 임무 수행에 나서는 아들. 또는 저 멀리 어딘가에 분명 존재할 장인을 찾아, 그의 그 기술을 배우고 익히겠다는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무작정 길을 나서는 열대여섯 나이의 젊은이.
이 나라 저 나라를 여행하다 보면 어디서나 공통적으로 목격되는 장면 하나 - 등에는 거의 자기 키의 반만 한 무거운 배낭을 매고, 배 앞쪽에도 그것 보다는 살짝 작은 배낭을 하나 더 걸고, 그것도 모자라 손에 또 무거운 팩을 들고, 얼굴은 이미 구릿빛으로 그을린 상태로, 아침 일찍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서양 젊은이들을 본다. 함께 가는 여성도 예외는 아니다. 거의 똑같은 양의 완전 군장 차림이다.
세계 어느 곳을 가도 볼 수 있는 그들의 그런 모습, 그러나 그런 모습의 동양인을 본 기억은 내게 없다. 우리에게 그것은 일단 고행이다. 우리가 꿈꾸는 '여행'이 아니다. 멋진 캐리어에 충분히 우아한 복장에, 당연 꽤나 괜찮은 호텔에서 그럴싸한 음식을 먹으며. 그게 우리에게는 여행의 정석이다.
다른 글에서 저는 '고독과 외로움의 차이를 아세요?'라는 제목으로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고독은 그저 혼자 있게 된 객관적인 상태입니다. 고독해서 외로울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혼자라서 더 편안하고 아늑함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고독의 상태를 만드는 경우도 있구요.
외로움은 내적 공허함을 느끼는 주관적 상태를 말합니다. 고독하면 더욱 외로움을 느낄 가능성도 물론 있지만, 여럿이 함께 있음에도 외로움을 느끼는 경우도 많습니다.
고독은 그 자체 좋다 나쁘다 판단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닙니다. 그러나 외로움은 그 어떤 경우에도 결코 긍정적인 상황은 아닙니다. 오래 지속된다면 더욱 큰 문제이지요.
제가 방랑을 고독의 친구로 만들고 방황을 외로움과 한패로 몰고간 이유입니다. 방랑은 그 구체적 상황에 따라 대단히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과정이 될 수 있습니다, 고독이 그런 것 처럼요. 하지만 방황은 도무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 그 자체로 큰 문제가 됩니다. 외로움처럼 빨리 그 해결책을 찾아야 합니다. 방황의 원인, 외로움의 다양한 이유와 원인을 우선 명확히 하고 그 다음에는 그 각각에 대한 솔루션의 모색에 힘써야 합니다.
더 큰 합병증으로 악화되지 않도록, 필요하면 항생제라도 처방 받아서 써야 합니다. 일단 그렇게 '손절'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최소한의 (다른 의미로는 최악은 막는) 안전한 바닥 ('플로링' flooring)을 확보해야 합니다.
이렇게 글을 쓰다 보면 애초 어떤 단초에 기한 사유와 묵상이 먼저였는지, 아니면 제가 우연히 만나게 된 마음에 드는 시가 그 글의 시작의 직접적 이유였는지 조금은 모호할 때가 있습니다. 물론 어떤 경우에나 제게는 좋습니다, 일단 글을 쓰게 되었으니까요.
오늘의 이 글의 경우에는 시가 먼저였습니다. 이 시가 너무도 마음에 들어서 이 시를 여러분에게 소개할 구실을 찾은 것이지요. 그래서 만난 것이 방랑과 방황이었습니다.
이제 오늘의 시를 봅니다.
제가 좋아하는 예이츠의 멋진 시, 신비감 가득한 시입니다. 아일랜드의 신화 속 얘기를 토대로 한 것입니다. 많은 노래들이 탄생했고 그것들의 가사로도 쓰였습니다. 특히 '달의 은빛 사과와 태양의 황금 사과'가 유명합니다.
방랑하는 앵거스의 노래 (The Song of Wandering Aengus)
-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나는 개암나무 숲으로 갔다,
내 머릿속에 뭔가 번뜩 떠오른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개암나무 가지 하나를 잘라 그 껍질을 벗겼다 ;
그러고는 긴 줄에 베리를 하나 끼운다, 흰 나방들이 날아 다니는 그때,
하늘에는 흰 나방 같은 별들이 깜박이고 있었다,
나는 그 베리를 강물에 떨어뜨린다
그렇게 나는 작은 은빛 송어 한 마리를 잡았다.
나는 그 송어를 바닥에 잠깐 두고는
불을 피우러 갔다,
그런데 그때 뭔가가 바닥에서 바스락 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른다 :
그것은 희미하게 빛나는 소녀였다
머리에는 사과꽃을 꽂고
내 이름을 부르더니 밝게 빛나는 허공 속으로 이내 사라졌다.
내 지금 비록 나이 들었지만
여전히 골짜기 여기저기 그리고 구릉지대 이곳저곳을 헤매고 다닌다,
나는 그녀가 간 곳을 찾아낼 것이다,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출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잡으리라 ;
그렇게 그녀와 함께 길게 자란 얼룩진 잔디 사이를 걸을 것이다,
나는 나의 삶이 다하는 날까지, 영원히
달에 있는 은빛 사과를,
그리고 태양의 황금 사과를 딸 것이다.
<우리말 번역 - 가을에 내리는 눈>
# '앵거스'는 아일랜드 설화 속의 사랑의 신이다. 로마 신화의 사랑의 신 '쿠피도' (영어의 큐피드), 그리스 신화의 '에로스'와 비슷한 존재다.
여전히 나는 궁금하다. 그래도 명색이 신인데, 그것도 사랑의 신인데 그 조차도 이리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평생을 헤매고 다녀야 하나? 사랑을 얻는 것은 그리도 힘든 것인가? 아, 사랑의 신이니까 그래야 한다고? 그런 신은 나는 하고 싶지 않소이다! 네버 에버, 어게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