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타고 꺼질 거면 아예 타지를 말라고? 해 보셨나?

- 돌은 들춰보자, 아낌이 없는 미련 또한 없는. 이은상 '사랑'

by 가을에 내리는 눈

국민학교 3학년 때 처음 '가곡의 밤'이라는 음악회에 갔다. 그때 그 자리에서 들은 '비목'/'사랑' 등의 노래는 평생 나의 음악머리 속에 깊게 들어앉아 있다. 그 시절 어느 다른 음악회에서 피아노 소품곡 '엘리제를 위하여'를 들은 것도 그랬다. 어린 시절 흰 종이 위에 처음으로 그려진 것들은 그렇게 오래 간다. 그래서 '처음'이라는 것이 그리도 중요한 것이리라.


나는 우리 속담 중에 '가다가 아니 가면 아니 간만 못하다'라는 이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그 의미와 취지에 크게 반대한다. '남자가 한번 칼을 뽑았으면...' 그래서 뽑았으니 뭐? 어쩌라구?


우주선이 지구에서 발사되고 궤도에 진입하고, 최종 목적지를 향해 간다. 그런데 그 모든 과정이 처음에 한 번 입력된 그 길을 정확히 그대로 따라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을, 특히 그 '상징적 의미'를, 나는 나의 젊은 시절 늘 머릿속에 넣고 살았다. 조금 더 나아간 그 위치에서 다시 최적 궤도를 산정한다. 그 새로운 수치를 다시 입력하고, 그렇게 또 좀 더 나아가고. 그런 수정과 실행의 과정을 계속한 끝에 결국 우주선 하나는 목적한 곳에 안착한다고 하는 그런 얘기였다. 과학적으로 실제로 그런 지는 잘 모르겠다.


'일단은 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나는 한다. 특히 나이 들어가는 요즘에 더욱 그렇다. 그저 망설이고 계산하고 또 생각하고, 그러느라 허송세월하는 삶의 자세를 나는 싫어한다. 그런 사고가 개인을 지배하는 상황을 나는 미워한다.


그것이 두려움의 결과이든 제한된 자원 (실탄과 돈)의 탓이든, 아니면 우유부단함과 실행력 결핍의 문제 때문이든, 결국 하지 않으면 기대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예전에 읽은 어느 작가분 글에 이런 얘기가 있었다 - '나는 이런 부류의 사람을 제일 싫어한다. 복권을 아예 사지도 않았으면서 복권에 당첨이라도 되면 참 좋겠다 이런 말을 늘상 입에 달고 사는 사람'. 그런 사람에게 그는 이렇게 쏘아붙인단다. "야 임마, 그런 말을 하려거든, 그런 바람을 가지려거든 최소한 복권 한 장이라도 산 후에 그래라. 애초 복권을 사지도 않는 놈이 뭘 바래?" 나는 격하게 공감했다.


일단은 리포트를 제출해야 교수님이 A든 C든 D 마이너스든 준다. 안 내면? 그냥 F다. 달리 뭘 기대해?


오늘 아침 산책 후에 우연히 가곡 '사랑' (홍난파 작곡, 이은상 작시)을 듣게 되었다. 수십 년 전 그 옛날 내가 처음 들었던 것은 백남옥 버전이었다. 물론 대단한 메조 소프라노다. 그런데 나는 오늘 그 버전에 이어 김청자 버전을 연이어 들었다. 나는 오늘은 개인적으로 후자가 더 좋았다. 그 카랑카랑한, 소프라노 같은 메조 소프라노의 소리가 좋았다. 발음 또한 아주 명료했다.


그런데 오늘따라 그 가사가 내 귀에 거슬린다. 많이, 아주 많이. 나는 아직 '이순'의 경지에는 도달하지 못한 모양이다.


당장 이런 저항감이 슬며시 올라온다 - 아니 이 양반이, 내 선친보다 7년 정도 젊은 분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정말 '뜨거운/불같은/사람을 재로 타게 만드는' 그런 사랑을 해보기는 하셨나? 당신이 직접 해보시고 이런 시를 쓰신 것인가? 어떻게 이리 잔인한 말씀을?


하나, 결과적으로 '그저 타기 위해 탄 꼴'이 될 것이었음을 애초 어찌 짐작이나 했겠나? 설령 그런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라도 일단 타기 시작했으면 끝까지 다 타라고? 재까지도 남기지 말고 타라고? 왜?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라는 뜻은 이해한다. 그러나 그저 최선를 다하기 위해 끝까지 탈 필요는 없다고 나는 믿는다. 아차 아니다 싶으면 즉각 그 자리에서 멈출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본능적, 신축적인 판단력이 이 험하고 긴 삶을 끝까지 살아내게 만든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 남의 눈치 보느라 뻔히 아닌 줄 알면서 꾸역꾸역 그 길을 갈 필요는 없다. 그런 태도는 미련함을 떠나 자기를 배신하는 행위다. 자기 자신에 대한 정당한 직무의 무책임한 유기다. 나중에 분명 심각한 문책이 뒤따를 것이다.


'지지불태', 멈추어설 때를 알면 위험한 상황에 처하지 않는다. '지지당설', 멈추어야 할 곳에서는 반드시 멈추어야 한다. 그것이 전략적 '손절' (loss cut, 손실의 규모를 그나마 최소화하기 위해 더 늦기 전에 손실을 실현시키는 것, 그렇게 외과적 수술을 통해 더 이상 번져나가는 것을 막는 것)이다.


둘, 타다가 남은 동강은 달리 쓸 곳이 없다고? 어찌 그런 무서운 말을? 살짝 고쳐서 쓰고, 조금 기다리면 그 타버린 반도 다시 자라날 것이고, 또 어느 상대는 그 남은 반 동강으로도 만족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오히려 그 남은 반 동강 속에 진짜가 오롯이 다 들어있을 수도 있는 것이고. 모든 경우에 다 '결국은 크기가 결정한다 (Size matters)'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런데 왜 이런 말씀을? 그저 시니까, 시조이니까? 문학적 아름다움을 위해? 그래도, 시인 당신의 그 유명세를 고려한다면? 그 시를 읽고 그 노래를 들은 사람이 지금껏 얼마나 많을 것인데?


보통 사람들은 시나 가사에 대해 그렇게 진심 정독하지는 않으니 이 시의 경우에도 그렇기를, 그랬기를 바라는 수밖에.


셋, 끝까지 제대로 갈 생각이 없으면, 그런 자신이 애초 없으면 그냥 생나무로 있으라고? 어떤 일에 화가 단단히 난 상태에서 이 시를 쓰신 것은 아닐까? 누구나 한번 제대로 해보려고, 큰 뜻과 희망을 품고 그렇게 사랑의 여정에 나서는 것 아닌가? 그리고 시작 때만 해도 모든 것이 좋았지? 그게 중간에 그렇게 삐끗 틀어질 줄 누가 어찌 알았겠나? 사랑의 영역에서 '합리적인 예측'이라는 것이 가능이나 한 것인가?


넷, 이 정도면 거의 오기, 아니 광기의 수준이다. 기왕에 탄 것, 아니 애초 탈 생각으로 덤벼들었으면 '재 그것조차 마저' 타라고요? 재가 타기는 하나요? 뭐 500 - 600년에 한 번씩은 주기적으로, 또 다른 600년을 위해 스스로 타서 재가 되고 그 재 속에서 다시 살아나는 피닉스 불사조 얘기를 하는 것은 아닐 것인데 분명?


안다, 내 이리 씩씩거리며 떠들었지만, 한번 그런 '진실한/내 모든 것을 다 주고 다 태우는/타고 남은 그 재마저도 더 태울 수 있는' 그런 본때 나는 사랑을 하라고 하시는 말씀이리라. 무릇 사랑은 그래야 한다는 것을, 그렇지 못한 현실을 꼬집으며 역설적으로 하시는 얘기일 것이니.


그러면 얼마나 좋으랴? 전쟁 속에서도, 궁핍과 결핍 속에서도, 당장 내일 아침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가난 속에서도 그래도 든든하지 않을까? 함께 할 그 사랑이 있으니? 내가 나의 반 동강도 남기지 않고, 재까지도 마저 태우려는 그런 사람이 나와 함께 있으니, 지금 여기 이곳에 있으니?


사랑

- 이은상

탈대로 다 타시오 타다 말진 부디 마소

타고 다시 타서 재 될 법은 하거니와

타다가 남은 동강은 쓸 곳이 없느니다


반 타고 꺼질진대 아예 타지 말으시오

차라리 아니 타고 생나무로 있으시오

탈진대 재 그것조차 마저 탐이 옳으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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