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품을 줍는 사람, 슬픔을 담는 사람

- 아름다움의 또 다른 형태, 치유. 오순택 '슬플 때는'

by 가을에 내리는 눈

오늘은 바로 시에서부터 이 글을 시작합니다. 가끔은 이리 불규칙 바운드 ('이레귤러 바운드' - 야구나 테니스 등에서 공이 엉뚱한 방향으로 튕겨 가는 일)도 있어야 재미가 있겠지요?


꽃이 없는 때에도 굳이 슬퍼하지 않는 나비처럼, 먹고사느라 바빠서 슬퍼할 틈조차 없는 개미처럼, 정 슬픔에 힘들어질 때면 저 밤하늘에 가득한 별을 따서 가슴에 가득 채워보면 어떨까? 그래도 여전히 슬프다면? 그럼 들꽃을 만나보면 좋겠어. 아무도 그들을 보러오지 않아도 그 들꽃들은 늘 웃고 있잖아? 그러다 보면 가슴속 깊이 들어있던 슬픔이 채송화 꽃씨같이 톡톡 튀어나올 거야, 그렇게 저 멀리로 굴러가 버릴 거야.


희망 가득 따스함 가득 그렇게 슬픔을 다루는 시인의 마음이 좋다. 나도 이렇게 나의 슬픔을 웃으며 다독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슬프다 슬프다, 그건 자꾸 슬픔에게 힘을 주는 말이고 그녀의 기를 살려주는 행동이야. 언제나 슬픔을 모른 척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때가 되었다 싶으면 적당히 슬픔을 등떠밀어 보내는 용기와 지혜도 있어야겠지? 그래야 또 살아내지. 아무튼 참으로 이쁜 시였다.


이른 저녁을 먹고 늘 하는 산책길에 나선다. 오늘도 그 아주머니는 길가 대형 쓰레기통을 뒤진다. 돈이 될 만한 폐품들을 하나하나 골라낸다. 작은 모터바이크에 주렁주렁 매단 짐이 벌써 여러 개다. 턱 밑에 단단히 붙들어맨 전통 모자 농 ('농라'라고도 부른다. 햇빛 가리개, 우산 대용, 가끔은 부채로도 쓰고, 또 가끔은 물을 떠서 마시는 용도로도 쓰인다)에 가린 그녀의 얼굴, 문득 한번 보았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저렇게 모으면 하루에 얼마를 손에 쥘까? 이곳이 아직도 물가가 싸다고는 하지만 글쎄...


그녀에게는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남편은? 다른 가족은? 이곳 여성들의 강한 생활력은 유명하다. 내 눈에도 보인다. 굳이 그래서 여성 중심의 모계사회라느니 그렇기에 남자들은 아예 힘을 쓰지 못한다느니 그런 얘기를 하고 싶지는 않다. 그녀들은 강하다, 우선 삶에 임하는 정신이 강하고 실천력이 강하고 그렇게 몸도 강하다. 늘 눈빛이 살아있다. 그녀들과 얘기하는 것은 그래서 많은 경우 내게도 힘이 나는 순간이 된다.


터키 이스탄불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리어카의 네다섯 배는 큰 (윗쪽으로 그리고 살짝 옆으로도) 리어카를 끌고 다니며 폐지를 줍는 젊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곳에 있는 동안 일상 속에서 자주 보았다. 그런데 러시아에 인접한 어느 나라에서는 폐품이든 폐지든 줍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결코 잘 사는 나라가 아닌데. 그들은 멀쩡한 신발이나 옷을 그냥 내다버린다. 박스 같은 폐지도 마찬가지다. 그 나라에 유독 신발 가게가 많은 이유를 그곳에 오래 거주한 사람이 내게 설명해 주었다. 그들은 일상 속에서 남을 유난히 의식한다. 쓸데없는, 소모적 자존심의 형태다. 분명 많이 못 사는 나라인데? 어쩌면 그래서 그 오랜 세월 계속 못 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흥미로운 사실은 터키의 그 산더미같은 폐지 수집인은 모두 다 남자들이었다. 아 참, 거기는 종교가 이슬람이지? 반면 이곳에서는 여자들이 그 일을 한다. 남자가 폐품이나 폐지 줍는 경우는 본 적이 없다. 아마도 그들은 그 순간에도 어디 허름한 길 옆 찻집에서 진한 커피 한 잔 그리고 함께 마시는 차 한 잔 앞에 두고, 열심히 담배를 피워대고 있을 것이다.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남자들을 대신해서 이곳의 여성들은 오늘도 열심히 일을 한다.


다시 그 여인에게로 돌아간다. 폐품을 주우면서 아마도 그녀는 자신의 슬픔도 그렇게 쓸어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여기저기 흩뿌려져 나뒹굴고 있는 자신의 슬픔들을, 이제는 하나씩 주워담아 곱게 보내려 함인지도 모른다. 내가 따뜻한 미소를 그녀에게 보낸다. 순간 환하게 웃는 그녀의 모습이 눌러쓴 농 밑으로 보인다. 웃는 그녀의 얼굴이 나를 안심하게 한다. 내게도 힘을 준다.


적은 돈을 위해 폐품을 줍는 일이 뭐 그리 즐겁고 신나는 일은 결코 아니겠지만 그녀가 선택한 그 일, 비가 오는 날에도 그 일을 묵묵히 하고 있는 그녀를 나는 힘껏 응원한다. 조만간 조금은 더 나은 일을 할 수 있기를, 아니 오늘 모은 폐품이 다른 날보다 조금 더 돈이 되기를, 그녀가 함께 주워담는 슬픔이 곧 그 끝을 보이며 그녀를 떠나가기를.


슬픔은 애초 어떤 상실감에 기초한다. 우리 몸은 이에 대응해서 방어기제를 만들어낸다. 그러니 슬픔은 자기 자신을 외부 혹은 자신으로부터 방어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에는 긍정으로의 이동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다. 문학에서도 우리네 일상에서도, 슬픔이 종국에는 이전보다 더 큰 긍정과 생산의 길로 이어지는 경우를 많이 보는 이유다.


물리학에서의 '양자 도약 (quantum leap)'처럼 또 한 단계 훌쩍 뛰어넘어서는 경로가 된다. '울다가 웃으면' 뭐 어찌 된다는 어릴 적 우스개 노래도 있지만, 우리는 울다가 결국에는 웃어야 한다. 울다가 웃으면 괄목상대, 이전과는 다른 힘과 희망과 경쟁력을 갖춘 새로운 존재가 된다.


그렇다고 그것을 위해 일부러 자주 슬플 이유는 없다. 피할 수 없는 슬픔이 내게 온 경우라면, 그 슬픔을 더 나은 내일을 위한 '재료'로 삼을 수 있으면 좋겠다 그저 그런 바람을 나는 지금 말하는 것이다. 작은 개선이 모아져서 발전이 되고 그것들이 쌓이면 진보가 되고, 그것의 누적이 결국은 진화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니 나는 지금도 진화의 한 과정을 밟고 있는 것이다. 궁핍이든 결핍이든 슬픔이든, 외부의 고난이 어떤 형태로 나를 흔들며 달려들든 나는 조금씩은, 아주 조금씩이라도 나아지는 모습을 보일 것이다. 그렇게 진화해갈 것이다. 그것이 나다.


슬플 때는

- 오순택

꽃이 없다고 나비는 슬퍼하지 않는단다.

개미는 바빠서 슬퍼할 겨를이 없단다.


밤하늘에 박혀 있는 별을 따서

가슴 가득 채워 봐.

슬플 때는.


그래도 슬플 땐

들꽃을 만나 봐.

아무도 보러 오지 않아도

웃고 있지 않니.


그러면

가슴속에 들어 있는 슬픔이

채송화 꽃씨같이 토옥 튀어 나와

동글동글 굴러가 버릴 거야.

이전 02화반 타고 꺼질 거면 아예 타지를 말라고? 해 보셨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