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과 바다' - 두려움의 두 얼굴

- 파괴와 패배의 그 큰 차이, 의욕과 간구의 힘. 고영 '구름의 종점'

by 가을에 내리는 눈

시인 김종삼님의 시 중에 '어부'라는 작품이 있다.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고, 사노라면 많은 기쁨이 있다고' 그리 우리를 위로하고 응원하는 시인. 모짜르트의 음악 듣는 것을 참으로 좋아하고 술을 좋아하시고, 듀퐁 라이터를 애장하고 명동에서 멋진 드레스 셔츠 맞춰입는 것을 즐긴 분.


그 시에 헤밍웨이의 '바다와 노인'이 오마주 (hommage)처럼 살짝 언급된다, 그 앞뒤를 바꾸어서. 자신도 언젠가는 그의 그 바다, 그 노인이 되어서 자랑스럽게 그러나 여전히 소심하게 중얼거릴 그날을 기다리고 있다면서. "이거 왜 이래? 나 아직 살아있어!" 하고 그렇게, 마음 속으로는 세상이 떠나갈 듯 큰 소리로 외칠 그날을.


이전에 두려움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과연 그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해. 그렇게 '해부'를 하고 나니 조금은 마음이 편안해졌다. 상대의 정체를 알고부터 대비책이라는 것도 조금 생겼다. 이제는 나도 그를 상대해 볼 만하다는 안도의 자신감도 생겨났다. 그렇게 조금은, 아주 조금은 두려움의 세계에서 벗어나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두려움이 우리의 시야를 흐리게 한다, 많은 가능성을 가로막는다', 내 카톡 프로필 커버 메시지다. 그만큼 나와 두려움의 인연의 끈은 길고 깊다. '애증',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이 이 단어가 등장할 최적의 타이밍 아닐까 싶다.


평소 두려움 때문에 많은 것들을 하지 못하고 있는 나. 하지만 동시에 가끔은, 그 두려움이 내게 무언가 의미 있는 큰 것을 할 수 있게 나를 마구 몰고간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그 애증의 두 얼굴을 보게 되었다. 두려움을 다시 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복어 맑은 탕 (복 지리)을 좋아한다. 두툼한 복어의 살이 다 익기 전에, 미리 먹는 미나리가 좋다. 섬섬하게 조정된 고추냉이 간장에 찍어먹는 그 즐거움! 물론 남은 국물에 주인 아주머니가 직접 볶아주는 밥, 김가루와 잘게 썬 김치 약간과 함께. 완벽한 마무리다.


복어의 치명적인 독 때문에 복어가 그리 맛이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튼 복어에는 무서운 독이 있다. 그 독 때문에 복어를 아예 먹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아주 잘 알려진, 오래된 전문 식당에 가서만 복어를 먹는다. 독이 무서워 먹지 않기에는 복어는 참으로 맛있다. 철저히 독을 제거하며 잘 손질해서 먹으면 된다.


구더기와 장도 그렇다. 지금이야 그런 일 없겠지만 옛날에는 흔한 일이었던 것 같다. 장독 맨위에 굵은 소금을 가득 얹는다, 김을 몇 장 덮어놓는다, 날 좋은 시간 장 항아리 뚜껑을 열어 놓는다, 장을 떠서 옮겨 담을 때 늘 깨끗한 숟가락을 사용한다 등등, 어릴 때 어머니 하시던 말씀이 새록새록 기억이 난다. 그 또한 또 다른 종류의 단백질원이라 말하면 너무 썰렁하려나?


언젠가 터키 이스탄불에서 맛있는 보랏빛 무화과의 세계에 빠져서 열매 속의 벌레를 먹게 된 때가 있었다. 꽤나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걱정 속에 의학 전문 사이트에 들어가 검색을 한다. 전문의 하는 말 - "그냥 색다른 방법으로 단백질 약간 섭취했다 그리 생각하면 된다", 명쾌했다. 더 열심히 무화과를 먹었다.


고사리도 채취 후 푹 삶아서 그 독성을 순화시켜야 제대로 먹을 수 있다. 맛있는 죽순 또한 잘 삶아서 물에 담궈 다량의 옥살산, 청산 배당체를 제거해야 한다. 이 두 가지 성분은 열에 약해서 익히면 사라진다.


우리 사는 세상에는 이런 것들이 아주 많다. 그 무서운 양면성!


잘만 쓰면 좋은 것, 하지만 반드시 사전에 그것이 가진 나쁜 것들은 제대로 충분히 제거해야만 하는 것, 그래야 그 좋은 면이 비로소 그 의미를 갖는 것. 그러니 어느 한쪽만을 보고서 그저 좋다, 아니 나쁘다를 말할 것이 아니다. 사실은 그 두 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어느 쪽을 보고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그 동일한 물건 혹은 존재의 최종 효익은 비로소 결정, 확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봄과 여름, 가을을 지나 이제 겨울로 접어드는 것을 말한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나이 듦의 1차적 정의다. 강에서 약으로, 푸르름과 싱그러움에서 누런 빛깔 낙엽으로, 넘치던 멋과 매력에서 굳이 옆에서 가까이 함께 걸어가고 싶은 생각은 많이 없는 그런 구물로, 에너자이저가 아닌 어쩌면 디-에너자이저로, 뭐 죄다 그런 아쉬움과 부족의 개체로 인식된다. 그것이 사실 대체로 맞다. 그러라고 자연은 모든 개체에게 나이가 들게 하는 것이니까, 바로 정확히 그런 목적과 의도에서.


그러나 그런 나이 듦의 과정에서도 그 존재의 기억과 의욕, 자신에 대한 강한 믿음은 여전히 남아있다. 본인은 아직도 펄펄 살아 숨쉰다, 특히나 그 정신 세계에서는. 그 두 가지 사이의 넓은 간극이 크면 클수록 나이 든 자의 소망과 간구는 더욱 절실해진다.


그럴 때 기적 처럼 일어난 그 과거의 영광의 순간의 재현! 아마도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들보다 본인 자신이 더 많이 놀랄 것이다, 감격할 것이다. 그 순간 그는 모든 것을 이루었다, 더는 바라는 것이 없다. "봐, 이래도? 나 아직 살아있어!"


헤밍웨이의 그 노인이 그랬다. 그것이면 된 것이었다 그에게는. 뼈만 남은 그 큰 고기, 거의 다 없어져버린 배의 모든 것, 그러나 이 순간 그에게 그것들은 그저 '아무 것도 아닌 것, 낫씽'이다. 그는 지난 사흘 동안 '자신이 누군인지'를 분명히 보았다. '여전히 유효한' 자신의 존재 가치를 보았다.


해 저문 9월의 바다, 춥다.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고기에게 끌려만 다닌다. 그러나 결코 포기는 않는다. 배 안에 쓰러지고 눈이 찢어져 피를 흘린다. 계속 고기가 잡아끄는 대로 그저 따라간다.


이틀째 날의 아침이 온다. 고기의 힘은 여전하다. 작은 다랑어를 생고기 (우리로 보면 싱싱한 참치 회, 그러나 이 노인에게는 익히지 못한 날 것. 다행스럽게도 주인공 노인은 평소 날 것의 생선을 잘 먹는 편이었다)로 먹으며 힘을 낸다. 또 다시 해가 지고 어두워진 바다에는 달이 떠오른다. 노인을 끌고 다니는 그 고기 역시 낚시바늘에 꿰어 있으니 당연 아무것도 먹지 못했을 터. 그 와중에도 꾸벅꾸벅 잠이 드는 노인, 그의 꿈속에 사자들이 나타난다.


사흘째 날의 해가 떠오른다. 노인은 이제는 기진맥진의 상태다. 그런데 그때 고기 또한 비슷한 상태였나 보다. 서서히 둥근 원을 그리면서 조금씩 수면 위로 떠오른다. 그러나 여전히 사납다, 날뛴다. 노인은 그때 비로소 그 고기의 거대한 몸통과 자줏빛 무늬를 보았다.


이제는 본격적인 2라운드다. 거의 육박전이다. 고기와의 격투가 시작된다. 침착하게, 노익장을 과시하듯 그는 고기의 배 옆구리에 작살을 들이박는다. 고기는 잠시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가 이내 은백색의 배를 보이며 수면으로 떠오른다. 사방은 온통 피다.


꼬박 사흘간의 치열한 사투, 서로 살기 위해 자신들의 최선을 다한 '그 아름다운 전투 혹은 전쟁'은 그렇게 끝이 난다. 영광의 승자인 노인은 고기를 배 옆에 바짝 붙여서 밧줄로 묶어 끌고 간다. 그 순간 노인은 자신의 상대 그 고기에게도 경의를 표했을 것이다. "비록 내가 이기기는 했지만 너는 충분 잘 싸웠다. 그저 한 마리의 물고기인 너, 인간인 나는 네게 존중의 마음을 표한다. 진심으로!" 아마도 노인은 이리 말했을 것이다. 이 노인이기에 그리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젊은이였다면 그런 말 하지 못 한다, 아니 안 한다.


전체 길이 5.5미터 (18피트), 무게 700킬로그램 (1,500파운드, 1파운드는 453그램), 대물 중의 대물이다. 이걸 낚시로? 노인 혼자서? 사흘 밤낮에 걸쳐? 와우! 지금 이 글을 쓰는 나도 잠시 의자에서 일어나 박수를 친다, 손바닥 얼얼해질 만큼의 격렬한 박수를!


웬걸, 그런데 이제는 상어가 따라온다. 처음 달려든 상어는 물리쳤지만 이어서 두 마리 세 마리, 밤이 되자 떼로 몰려온다. 노인은 손에 잡히는 대로 들고 그들과 싸운다. 배 옆에 매어둔 고기의 살은 점점 줄어만 간다.


그렇게 배가 해안으로 돌아왔을 때 그 거대했던 고기는 완전히 다 뜯겨나가 뼈만 남았다. 노인의 배 안에는 아무 것도 남아있는 것이 없다. 노, 작살, 끝에 칼을 묶은 곤봉 같은 막대도 상어 떼와 싸우는 과정에서 다 사라졌다.


항구에 도착한 노인, 돛을 내려서 감는다. 지친 몸을 이끌고 자신의 오두막집으로 들어간다. 그저 물 한 잔을 마시고는 침대에 눕는다. 깊은 잠 속에서 사자 꿈을 꾼다, 바다 위 배에서 고기와의 사투 중 꾸었던 그 사자의 꿈을!


"하지만 인간은 그저 패배하기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니야." 노인이 말했다. "사람은 파괴될 수는 있어, 그러나 결코 그를 패배시킬 수는 없어, 암!" (But man is not made for defeat," he said. "A 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


이 소설의 모든 것을 말해주는 노인의 소설 속 명대사다. 저로서는 달리 다른 말은 할 것이 없네요!


오늘의 시를 본다.


저 하늘의 구름들은 지금 어디 딱히 그 목적지가 있어서 저리 바삐 흘러가는 것일까?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그냥 바람이 몰고가는 곳으로 가는 것 아닌가? 오늘 시의 제목이 '구름의 종점'이라 문득 이런 생각이 든 것이다.


시인은 지금 나이 든 사람을 구름에 빗대어 말하고 있으니 그렇게 연결이 되는 것이렸다 - 구름/인생/종점...


굳이 하릴없이 공원 장기판 훈수나 두는 것은 하지 않으면 좋겠다. 본인에게도, 특히 그 모습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좋아보이는 모습은 아니다. 산엘 가면 좋겠고, 병천 순대라도 드시러 멀리 하루 나들이 갔다 오는 것도 좋을 것 같고. 가까운 미술관에 가서 몇 시간 그림과 동무하면 더욱 좋고.


아침과 저녁 규칙적으로 산책을 하면 제일 좋을 듯하고. 우선 몸에 좋고, 정신에도 좋다. 걸으면서 하는 묵상과 사유는 그 깊이가 책상머리에 앉아서 하는 것과는 또 다르다. 자유로움 속에 많은 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들락거린다. 망상이나 허상은 별로 없다. 상상/몽상/공상/환상, 다 나름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사유의 세계다. 충분히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프로세스라고 나는 믿는다.


노인들은 정말 잠이 많은가? 왜? 밤에 잘 시간 충분하지 않은가? 예이츠의 시에도 어디에서나 그저 앉으면 꾸벅꾸벅 조는 나이 든 사람의 모습이 나온다. 수면의 질의 문제일까? 낮잠을 자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내게는 그렇다. 억지로라도 낮시간의 잠을 참아야 밤에 숙면 꿀잠을 잘 수 있다.


오늘의 시가 그저 슬프고 안타까워서, 이리 엉뚱한 얘기로 화제를 돌리고 있다. 이 시에서도 주인공 노인은 결국 졸음에 꺾이는 것으로 무대 위의 자신의 역할을 마감한다. 야심차게 내내 때를 기다리는 김종삼 시인의 '어부'에서의 모습, 헤밍웨이의 그 노인은 아니더라도 그래도 조금은 더 활기차고 보람 있는 모습으로 나이 들어가면 좋겠다. 우리 모두, 당연 나를 포함해서 모두.


두려움? 그 실체를 좀 더 알게되지 않았는가? 그러니 그놈의 부정적인 면은 내 힘과 의지를 동원해서 찍어 누르자. 그리고 그놈이 뜻하지 않게 나를 몰고간 창조적/생산적/기적적인 영역에서 최대치를 한번 뽑아내보자. 그거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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