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명의 의미, 무명의 가치. 백석 '남신의주 유동~'
천 명 혹은 만 명이라면 말이 크게 달라진다. 하지만 그저 도토리 키재기, 스무 명이나 백 명이나 그 무슨 차이가 있겠나? 이 또한 허망한 우리네 이름 세우기 욕망의 하나일 뿐인 것을?
오늘 내 글의 제목을 고심하면서 잠시 머릿속에 든 생각이다. 그러니 이런 제목을 뽑았다고 그리 나무라지는 마시라. 내가 좋아하는 시인 백석의 이 시가 참으로 좋았고 그래서 귀한 여러분들에게도 한번 '노출'시키고 싶었다는 저의 진의를 헤아려 주시기를!
유튜브에서, 그리고 지금의 이 브런치에서도 결국은 나의 어떤 특정한 글이 잠재적인 독자들에게 '노출'되는 것은 그야말로 운이고 하늘의 뜻이다. 아니 정확하게는 AI 알고리즘이라는 새로운 거대 무적 신의 영역이다. 적어도 나의 이해는 그렇다. 그래서 가끔은 내가 유튜브나 브런치 플랫폼의 알고리즘과 좀 아는 사이였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도 한다. 하지만 그 또한 헛된 생각이고, 정당한 방법은 아니라는 깨달음에 이내 집어넣는다.
독자들이 어찌어찌해서라도 나의 글을 읽게 되면 좋겠다는 생각은 여전히 한다. 충분히 좋은 글인데? 내가 오랜 시간 고민하고 사유하고, 내 삶의 경험과 그나마 가진 지혜를 담아낸 가치 있는 글인데, 뭐 이런 나만의 생각?
그렇다, 그건 그저 나만의 생각이다. 브런치의 다른 유능한 작가분들 모두 그런 생각을 할 것이다. 그러니 이 플랫폼에는 우리 독자들이 읽어야만 하는 '좋은' 글들이 넘치고 넘쳐나는 것이다. 이 또한 문제다, 작가들에게도 그리고 독자들에게도!
우리 인생은 결국 끝없이 이어지는 수많은 선택의 연속, 그 집합에 다름 아니라고 본다면, 그 개개의 선택들의 어려움을 이해한다면, 이런 선택을 강요하는 무자비한 선택지의 덤프는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하기는 그것이 우리 현대인들이 감내해야 할 시대적인 필수 항목 중 하나인지도 모르겠다. 기회라고 부르든 매스 마케팅이라고 부르든 새벽 배송이라고 부르든!
명불허전, 유명 이름은 그저 아무런 근거없이 그렇게 지금껏 여기까지 전해온 것은 아니다 그런 뜻이리라.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누군가가 그 말을 사용할 때는. 그 말에서 언급되고 있는 유명하다는 그 이름은!
사실 여러분이 박시봉 이 사람의 이름을 들어보실 일은 지금껏 거의 없었을 것이다. 유일한 가능성은 시인 백석의 이 시를 읽었을 경우 뿐이다. 그는 그저 시인이 한때 세 들어 살았던 집의 주인, 목수일을 하던 사람일 뿐이니까. 그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 이 시에서. 그러나 나는 어쩌면 이 시를 그리 유명하게 만든 것은 바로 이 무명의 집주인 박시봉 이 이름 석 자의 덕이라 생각하는 사람이다. 훅킹되었다 해도 좋고 낚였다 생각해도 좋다. 하지만 이 경우 '그래, 나의 관심을 끌었다, 그 기분 나쁘지 않았다' 이런 정도의 감상이 오히려 공정한 것 아닌가 그런 생각도 해본다.
세계 이곳저곳을 여행하며 한 곳에서 비교적 장기간 머무르다 보니, 언제부터인가 호텔보다는 에어비앤비를 선호한다. 내가 살던 집의 느낌이 그나마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에어비앤에 머무르고 있어요' 와 '아 네, 저 지금 월세 살아요' 이 둘 사이에 이리 큰 간극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사실 그게 그건데? 시대의 흐름과 함께 바뀐 갑과 을의 관계 때문일까? 내가 이해하는 한, 에어비앤비의 갑은 여전히 게스트다. 호스트에게는 그의 리뷰가 중요하고 새로운 고객의 끊임없는 유입이 중요하다. 그런데 전통적 개념의 월세 관계에 있서는 여전히 많이 다르다. 집 주인은 여전히 갑이다. 그 집의 주인이라는 단순한 그 사실 하나만으로.
수요와 공급의 개념으로도 설명할 수 있으리라. 공급의 과잉, 다양한 선택지의 존재, 에어비앤비를 말함이다. '집 주인'이라는 타이틀이 주는 힘이 그만큼 많이 달라졌다는 말일 수도 있다. 이름 혹은 타이틀의 힘을 말하면서 지금 여기까지 조금 길게 왔다.
유명과 무명, 이름이 있고 혹은 이름이 없고 이런 문리적인 의미를 떠나 알려진 이름 그리고 덜 알려진 이름, 이것이 아마 더 일반적인 우리들의 이해일 것이다. '(지금껏, 적어도 지금까지는) 무명의 선수, 무명 시인, 무명의 인물', 그래서 그곳에는 가능성이 있다. 유명으로 발전해갈 꿈과 희망을 볼 수 있다. 주식에서의 소위 '가치주'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조만간 탄탄대로를 타고 어엿한 '성장주'의 대열에 합류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사라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무명의 가치일지도 모르겠다.
학교 다닐 때 친구 중에 이름이 '진창'이라는 녀석이 있었다. 순하고 우직한 인물이었다. 우리는 곧 그의 별명을 만들어냈다, '엉망진창'. 초중고 때의 어린 나이는 아니었으니, 그 녀석이 그것으로 크게 상처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우리들의 기본적 애정 또한 그는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사람의 이름은 중요하다. 요즘은 신세대 부부들이라 이미 충분히 아름답고 세련된 이름들을 짓지만, 옛날에는 그저 부모 자신들의 욕심만으로, 그리고 그 한자적 심오한 뜻만을 바라보고 그리 '함부로' 귀한 자식들의 이름을 지은 경우가 많았다. 그 이후 그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자신들의 힘으로 법원에 개명 신청을 많이 한 것이 그 반증이다. 당연 법원의 수용률 또한 압도적이었다.
이름 얘기를 하며 또 여기까지 왔다. 이제 시 얘기를 하고 싶다.
처음 이 시를 읽었을 때, 박시봉 방 그래서 아, 목수 박시봉씨네 방 하나에 세 들어 산다고 그랬지, 그래서 그 방? 이리 생각했다. 아니었다, 여기서 '방'은 놓을 방 (놓아준다는 방면 또는 석방 그때의 방 자다). 그러니까 박시봉씨 집에서 쓴 시 또는 그곳에서 보내는 편지 뭐 그런 뜻이다.
우선 시의 제목이 길다. 내가 지금까지 읽어본 시 중에 아마도 제일 길 것이다. 시도 길다, 그만큼 사실적이고 구체적이고 절실하다. 아,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역시 그의 시의 제목이다.
갈대로 짠 헌 자리를 깐 방 하나에 '쥔을 붙이었다'라는 표현이 낯설고 재미있다. 아, 세를 살았다는 말을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구나. 추운 신의주 그 긴 겨울을, 하루 종일 좁고 눅눅하고 습기 냄새 나는 방 안에서 보내고 있다. 이런 궁핍과 결핍의 상황에 처한 자신의 지금 모습을 생각하며 슬픔 속에, 그저 자신의 어리석음을 되씹는다. 갑자기 울컥 가슴이 메어오고 두 눈에는 눈물이 그득하고, 얼굴이 화끈 달아오를 만큼 자신이 부끄러워 시인은 그저 그렇게 죽을 것만 같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때 문득 내게 큰 깨달음이 하나 생긴다. 그래, 무릇 이 세상에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있고 또 내가 할 수 없는 것들이 있는 바, 나의 힘과 능력을 벗어나는 것들에 대해 내가 아등바등 그래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나? 나를 이끌고 가는 신이, 섭리가, 아니 스피노자의 자연이 있을 것인데?
이런 새로운 깨달음의 시간이 몇 날 흐르자 그동안의 내 가슴 속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수 있는 것들은 다 가라앉았다. 그럼에도 외로움만은 여전히 내게 남는다. 그래 이것쯤은 괜찮다, 충분히 함께 갈 수 있다. 창문을 때리는 싸락눈 속에, 추위와 외로움을 이기려 나는 화로를 더욱 바짝 내 옆으로 둔다. 기도하듯, 구도자의 자세로 무릎도 꿇어본다. 그리고 지금도 저 어디선가 바위 옆에 그렇게 홀로 서서 어둠 속에 당당하게 하얀 눈을 맞고 있을, 희귀하고 단단하고 바른 그 멋진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한다, 내가 바로 그 갈매나무일 수도 있다는 그런 의연한 생각도 함께 한다.
남신의주/유동/박시봉/아내/아내와 같이 살던 집/살뜰한 나의 부모와 동생들/쓸쓸한 거리/어느 목수네 집/방 하나/옹기에 담아온 화롯불/창문과 천정/내 뜻과 나의 힘/그보다 더 크고 높은 그 무엇의 존재/싸락눈/먼산 바위 옆 어둠 속에 홀로 서서 의연하게 눈을 맞는 갈매나무, 결국은 이 모두 이름이고 의미이며 그 속에서 내가 보는 나의 의지요 인식이다.
# 갈매나무 - 북한에 많이 분포되어 있는 낙엽 활엽수로 잎 가장자리에 둔한 톱니가 있다. 높이 5-10미터로 상당히 키 큰 나무다. 작은 머루와 같은 검은 색 열매가 늦가을에 열린다.
순우리말 중에 '갈맷빛'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짙은 초록색을 뜻한다. 내가 사진으로 본 오래된 갈매나무는 마치 북유럽 신화 속 한 장면을 보는 듯, 땅으로부터 솟아난 여러 개의 중간 굵기 가지들이 구불구불 저마다 그 위용을 자랑하며 하늘을 향해 자라고 있었다. 때마침 낀 옅은 안개 속에서 그 신비로움과 당당함이 가득했다.
상대적으로 가지에 달린 잎들은 그 크기가 작은 편이라서 개개의 가지의 모양과 가지가 이루는 전체적인 균형의 미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시인이 굳이 이 나무를 등장시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참으로 멋진 나무였다.